여성 창업가 100명에게 듣는다
남산 아래 108계단을 오르고 난 후 첫 번째 집이다. 엘리베이터가 설치되기 전에는, 한겨울 꽝꽝 언 계단 위에 뿌려진 연탄재를 밟고 올라갔다. 서울 하늘 아래 아직 낭만이 남아있다는 후암동 ‘밀영 109 하우스’ 한미영 대표를 만났다.
Q. ‘밀영’에 대해
‘밀영'은 꽤 오랫동안 불리던 애칭이에요. 연애할 때, 영화 '첨밀밀'을 보고 인상 깊었는지 당시 남자 친구(현재 남편)가 제 이름 가운데 글자를 '밀'로 바꿔서 '밀영'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어요. 꿀을 뜻하는 한자 ‘밀蜜'에서 연상되는 달콤한 꿀과 밀가루가 양과자 가게 이름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가게 이름을 지을 때 ‘밀영'을 놓고 덧붙일 말들을 찾았어요. 첫 번째 가게는 제가 좋아하고 어감도 예쁜 남산 소월길 아래에 위치해서 ‘소월길 밀영'이라고 이름 짓고, 두 번째 가게는 108계단을 오르고 난 후 처음 만나는 집이라 ‘밀영 109 하우스'로 지었습니다.
Q. 창업하기 전 했던 일
출판, 광고 지면 쪽 편집 디자인을 했었습니다. 디자인 업무는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일이기 때문에 뿌듯함이라고 해야 하나 만족감이 컸어요. 그래도 일이기 때문에 당연히 스트레스는 있었고, 그때 베이킹 수업을 들었어요. 과정을 마칠 때마다 쿠키나 빵을 만들어 주변에 나눠 줬는데, 맛있게 먹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같이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따뜻했던 그 경험이 두 번째 여정의 시작이 되었죠.
그리고 서래 마을 ‘오뗄두스’ 정홍연 셰프가 진행하던 ‘레꼴두스 양과자 베이킹 클래스’를 1년 정도 들었어요. 클래스가 끝날 즈음에는 동네 마을센터에서 베이킹 강사로 섭외가 들어왔어요. 그런데 당시 본업이었던 디자인과 병행을 하다 보니, 체력적으로 한계가 느껴졌어요. 개인적인 일들까지 겹쳐 심적으로도 힘들었고요. 결정이 필요했어요. 생각했던 일정보다는 당겨졌지만, 원래 하던 일을 접고 본격적으로 베이킹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Q. 현재 사업체 ‘소월길 밀영’과 ‘밀영 109 하우스’
양과자 카페인 ‘소월길 밀영’을 창업하고, ‘나카무라 파티시에 과정 상급반 코스’를 들었어요. 처음에는 ‘소월길 밀영’에서 카페와 베이킹 스튜디오를 같이 운영했었는데, 혼자 하다 보니 베이킹을 하거나 강습이 있을 때 카페 손님을 받는 게 쉽지 않았어요. 공간 분리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나왔고, 카페를 운영한 지 2년 정도 지난 후에 스튜디오 ‘밀영 109 하우스’를 차렸습니다.
Q. 요즘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
맛있는 양과자를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 가장 기쁩니다.
Q. 창업하기 전과 후 차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제품이나 서비스를 끌고 갈 수 있는 점이 가장 큰 차이 같아요. 물론 제가 다 책임져야 하지만... 그래서인지 아직은 직장 다닐 때보다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없는 것 같아요.
Q. 재충전, 휴식 방법
평소에는 집에서 쉬어요. 맥주 한잔하며 영화 보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시간 나는 대로 여행을 다녀요. 보통 여행을 가면 한 동네에 머무르다가, 카페에 들려 그곳만의 특별한 정서나 분위기를 살펴보곤 해요. 직업 탓에 베이킹 도구를 보러 우리나라 방산시장 같은 곳을 찾아가기도 하고요.
Q. 관심 분야
손으로 만드는 다양한 것들에 흥미를 느껴요. 그러다 깊게 파고들며 배우는 편이죠. 요즘엔 시간이 많지 않다 보니 다른 새로운 것들은 시도하지 못하고 있네요. 시간 날 때면 주로 서점에 가는데, 디저트나 파티시에 코너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사서 따라 만들어 보곤 해요. 정홍연 셰프에게 배웠던 레시피가 《시크릿 레시피》라는 책으로 나와서 참고하고 있어요.
밀영의 흑밀 케이크는 고창의 흑밀을 재료로 만들었어요. 고창에서 농민들의 새로운 수익원을 찾던 중, 보리와 원두를 섞어 보리 커피를 개발했다는 연락을 받은 적이 있어요. 카페 원두는 이미 거래하는 곳이 있어서 교체가 어려웠지만, 농가 돕는 일은 하고 싶었죠. 그래서 다른 아이템을 찾다가 흑임자 슈를 만드는 과정에 착안해 흑밀 시트와 흑밀 크림을 개발했어요. 그 이후로는 메뉴 개발 시 양과자로 만들 만한 로컬 재료를 먼저 찾아봐요. 최근에는 단호박으로 케이크를 만들었는데 어르신들도 많이 좋아해 주세요.
Q. 창업 전 가장 두려웠던 일
처음 하는 일이다 보니 ‘잘할 수 있을까?’, ‘적자는 나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어요. 출퇴근 거리도 계산해보고 임대료도 알아보며 사전 조사를 하다가, 익숙한 동네에서 작게 시작해보기로 했습니다. 매출이 저조해도 타격이 덜 할 테고, 실패해도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어요. 마침 은행나무가 예쁜 지금의 ‘소월길 밀영’ 2층 자리가 나와서 계약했습니다. 가게 오픈 후에는 베이킹 수업에서 알게 된 친구에게서 음료 제조법, 재고 관리 등 가게 운영에 대한 노하우를 배웠습니다. 가게 운영 경험이 부족했던 제게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Q. 운영하면서 어려웠던 일들과 극복 방법
혼자 운영하다가 남편과 같이 하게 되었을 때 서로 호흡이 맞지 않아 스트레스가 조금 있었어요. (웃음) 한 사람은 베이킹만 하고, 다른 사람은 베이킹 과정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부딪히는 문제들이었던 것 같아요. 또 처음 가게를 운영하다 보니 주변 의견에 휩쓸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본인만의 기준이 없다 보니 고객 반응에 따라 흔들리게 되더라고요. 다행히 남편이 까눌레 같은 양과자를 직접 굽기 시작하고, 둘 다 운영에 대한 경험이 쌓이면서 의견 차이가 줄었습니다.
요즘은 가게 규모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요. ‘소월길 밀영'은 남편이 맡고, 저는 ‘밀영 109 하우스’ 스튜디오에서 양과자 베이킹을 담당하고 있는데, 체력적으로 힘든 일이 많아요. 직원이 한 명쯤 있으면 좋겠는데 고용하기에는 규모가 애매하고, 계속 혼자 하자니 벅차서 고민입니다. 여유가 되면 밀영의 제품을 만드는 직원을 한 분 모시고, 저는 메뉴 개발에 집중하고 싶어요.
Q. 초기 마케팅, 홍보 방법
‘소월길 밀영’은 남편의 마케팅 덕이 컸다고 생각해요. 원래 남편이 회사에서 광고, 마케팅 쪽 일을 했었는데, 가게 인테리어 공사할 때부터 페이스북과 블로그에 계정을 만들고 가게 준비 과정을 올렸어요. 오픈 후에는 동네 문화센터와 같은 콘셉트를 가져가고 싶어서, 다양한 오프라인 모임과 행사를 했고요. 독서 모임부터 쿠바 음악 감상 모임, 지월장 플리마켓, 지인/단골들과 함께 하는 연말 행사까지 다양하게 운영했습니다. 한번은 카페를 운영하면서 알게 된 동네 자영업자분들과 요가를 배우려고 요가 모집을 했었는데, 손님들도 신청을 하셔서 저희 집 옥상에서 다 같이 요가를 하기도 했어요. 그렇게 모이게 된 분들이 카페 손님이 되고, 다시 주변에 홍보를 해주시면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Q. 그동안의 창업 과정에서 가장 후회하는 것
베이킹 외에도 카페 운영 측면에서 알아야 할 것들이 예상보다 많아서, 시행착오를 좀 겪었어요. 현장 경험이 있었다면 더 수월하게 운영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Q. 성공이란
자기만족. 남이 아니라 내가 만족하는 삶이라고 생각해요.
Q. 해당 분야에 필요한 자질, 덕목
꼭 카페나 베이킹이 아니더라도 모든 창업 과정에는 끈기가 중요합니다. 창업하면서 바로 결과물을 얻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면 어려워져요. 힘들지만 초심을 잃지 않고 소신대로 끌고 가면, 그 시간만큼 성공 가능성도 같이 쌓이는 게 아닐까요. 주변에도 조금만 더 버티자고 이야기를 해요. ‘소월길 밀영’은 안정기에 접어들기까지 3~4년 정도 걸린 것 같아요.
Q. 해당 분야의 트렌드
레터링 케이크처럼 보기에도 좋은 이벤트성 케이크가 유행이에요. 이런 트렌드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기준이나 원칙들을 지키며 조금씩 변화를 주고 있어요.
Q. 창업 관련 정보,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기관
베이킹 강좌는 파티시에 과정 입학 설명을 직접 듣고 본인에게 맞는 수업을 선택하는 걸 추천해요. 대표적인 아카데미로 나카무라와 르 꼬르동 블루가 있습니다. 나카무라는 고전적인 쇼트 케이크, 르 꼬르동 블루는 내추럴한 무스 케이크를 주로 다룬다고 알고 있어요. 시간이 된다면 2개 과정을 모두 듣는 것도 좋을 거예요. 간단한 디저트를 만들고 싶다면 입소문 난 개인 스튜디오의 강좌를 다양하게 들어보세요. 가장 중요한 건 과정을 마치고 난 후, 자기화된 나만의 레시피를 만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