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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우 Jan 22. 2022

애도와 위로를 위한 진혼곡

당신 자신이 당신의 보배이다

*'어쩌면 세상을 믿고 세상일을 기억해도 되지 않을까? 혹시 그녀가 무너지면 붙잡아줄 남자가 거기 있으니.'


과거에 발목이 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은 현재를 저당 잡혔을 뿐 아니라 미래까지 좀 먹히게 될지도 모른다. 아픈 기억들. 다시 떠올리기 싫은 깊은 상처들. 그 상처 때문에 과거에 붙잡혀 있거나 과거를 내려놓지 못하면 현재를 살아갈 수 없다. 미래로 나아갈 수도 없다.


빌러비드. 네 글자를 새기는데 십 분. 아이의 무덤 옆에서 석공에게 십 분을 허락하고 공짜로 새긴 이름. 십 분을 더 허락했다면 아기의 묘비에 '디얼리(참으로 사랑하는)빌러비드'라고 새길 수 있었을까?'라는 미련에 괴로운 그녀, 세서.

흑인 여성에게 결혼이란 제도가 허락되지 않은 시절 그들의 임신과 출산은 오로지 재산(노예)을 불리는 수단일 뿐이다. 세서는 자기 아이들이 동물-불에 태워지고, 목이 매달리고, 입에 재갈이 채워지고, 채찍에 맞아 등에 나무를 키우는-로 살아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두 살배기 딸의 목을 자르고 감옥에 들어갔다 나온 뒤 그래야만 했던 이유에 대해 어떤 변명도, 항변도 하지 않은 채 18년을 과거에 갇혀 산다. 세서가 속한 사회 집단의 어느 누구도 왜 그랬느냐고 묻지 않고 그녀 또한 그들을 경멸하며 스스로 고립을 택한다.

그녀와 딸 덴버가 살고 있는 집 124번지, 갓난아기 빌러비드의 독기가 서린 그곳에 옛 친구 폴 디가 찾아오며 그녀의 삶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폴 디는 세서가 노예로 있던 농장에서 함께 지냈던 과거 속의 인물이다. 124번지에 온 첫날, 폴 디는 세서의 집에 있는 어린 유령을 내쫓아버린다. 그리고 세서를 과거 속에서 차츰차츰 끄집어낸다. 하지만 빌러비드는 살아 있는 성인 여성의 모습으로 다시 찾아와 그들과 지내며 세서를 끊임없이 과거 속으로 끌고 간다.


세서의 영아살해에 대해 알게 된 폴 디가 잠깐 그 집을 떠난 뒤 세서, 덴버, 빌러비드는 비로소 완벽하게 그들끼리의 삶을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세서는 빌러비드에게 과거에 자신이 했던 행위에 대한 이해와 사죄를 구하기 위해 노력을 다하지만 그럴수록 둘 사이는 비정상적으로 되어가고 그녀의 영혼은 피폐해져 간다.

*아무도 그들이 넘어지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내가 넘어지는 그 순간에 나를 바라봐주는 누군가가 없다면 내가 넘어졌다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 손 내밀어주는 사람이 없으니 나 혼자서 아픈 손과 다친 무릎을 털고 일어나야 한다. 혼자 일어설 수 없다면 넘어진 그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순간, 세서가 넘어졌던 그 순간에 세서와 그 가족에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일어나려 하기는커녕 넘어진 그 자리에서 18년 동안 웅크리고 있었다. 마음을 닫고 과거에 파묻혀. 딸 덴버가 과거의 상징인 124번지를 벗어나 현재의 삶 속으로, 미래를 향해 발을 내디딜 용기를 냈을 때 손을 내밀어준 사람들. 그 사람들의 힘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과거와 같은 사건을 다시 겪는 과정에서, 백인을 향해 얼음송곳을 휘두른 세서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빌러비드는 감쪽같이 사라진다.

빌러비드, 어린 유령, 아픈 과거의 상징. 우리의 아픈 과거는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불쑥불쑥 찾아와 정신을 지배하는 유령과도 같은 것인지 모른다. 그 과거에 함몰되어 고립되고 단절된 삶을 살 것인지 과거에서 벗어나 미래로 나아가야 할 것인지는 우리가 선택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미래로 나아갈 것인가.

토니 모리슨은 <빌러비드>를 통해 만약 현재에 충실하고 미래로 나아가려거든 과거의 아픈 상처를 털어내라고 말한다. 과거와 화해하고 치유되는 삶을 살라고 말한다. 잘 잊으라고 말한다. 잘 잊는다는 것은 진심 어린 애도와 서로의 용서로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제 과거와 화해하고 치유와 공생의 길로 나아가자고 말한다. 그리고 과거에 무너졌던 고통 속에 있거나 지금 무너질 것 같은 이들에게 속삭인다.

만약 당신이 무너졌다면 곁을 둘러보세요.
당신 곁에는 분명히 당신을 지탱해 줄 폴디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당신은 '사랑받은 이'였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 자신이 당신의 보배'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평론가들은, 이 작품은 노예제도를 고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노예제도에 의해 희생된 6천만 명이 넘는 흑인 노예에게 바치는 애도의 노래이며 슬픈 영혼에 대한 위령제와 같다고 했다. 대체 이런 위령제를 얼마나 더 올리고 얼마나 많은 애도의 노래를 부른 뒤에야 미국에서 벌어지는 그 사악한 인종 차별 사건이 사라질 것인가.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빌러비드의 발자국 이야기를 이제는 그만 전해 듣고 싶다.


-지금도 124번지 뒤로 흐르는 시내 근처에는 빌러비드의 발자국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 발자국은 아주 친숙하다. 아이든 어른이든 발을 대어 보면, 꼭 맞을 것이다. 발을 빼면 마치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것처럼 발자국은 다시 사라진다. (448 쪽)

그리고 이제는 그들이 그만 참아도 되는 세상이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토니 모리슨의 장편소설 <빌러비드>는 노예로 살다 도망친 '마거릿 가너 사건'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1856년 1월, 켄터키 주의 노예였던 마거릿 가너는 임신한 몸으로 네 명의 자녀를 데리고 얼어붙은 오하이오 강을 건너 신시내티로 도망쳐 삼촌의 집에 몸을 숨겼다. 추격해온 노예 사냥꾼과 보안관들이 집을 포위하자 그녀는 자식을 노예로 살게 하느니 차라리 자기 손으로 죽이겠다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두 살배기 딸을 칼로 베어버리고 다른 자식들도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한다.

이후에 마거릿 가너는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고, 이 사건은 미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보통 도망 노예에 대한 재판이 단 하루면 끝나는데 반해 이 재판은 이례적으로 길어졌는데, 그녀의 행동에 대한 인간적 이해나 연민 때문이 아니라, 마거릿 가너를 '사람'으로 인정하여 딸을 죽인 살인죄로 기소할 것인가, 아니면 1850년 발효된 도망 노예법에 따라 단순히 잃어버린 재산으로 취급하여 무죄방면할 것인가 하는 논쟁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마거릿 가너의 변호사는 그녀를 살인죄로 재판해줄 것을 강력히 주장했고, 가너 역시 자신의 행동을 그저 이성이 없는 노예의 미친 짓으로 여기고 관대히 넘기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마거릿 가너는 한 명의 자유로운  '인간'으로 재판받지 못하고 노예로 생을 마쳤다. P457. 옮긴이 해석 중-

후기 중 * 표시한 부분은 책 속에서 가져온 문장입니다.

#빌러비드  #사랑받은-이  #토니 모리슨
#위로ㆍ애도  #퓰리처상(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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