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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우 Jan 25. 2022

마음의 키

「합체, 박지리, 사계절출판사」를 읽고

오랜만에 재밌는 소설을 읽었어요. 생각을 많이 해야 이해되는 책이 아니고 줄거리를 따라가면서 웃으면 되는 책이에요.


박지리의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을 읽은 뒤 박지리 작가에게 반해서 바로 "맨홀"을 읽었고 그 뒤 이 책을 읽었으니 이제 박지리 작가의 세 번째 책을 만난 셈이요. 박지리 작가를 따라 걷는다고 한다면, 세상에 내놓은 순서가 이 책이 앞의 두 책 보다 먼저여서인지, 그 책들보다 가볍고 경쾌한 걸음걸이로 따라 걷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이 책은 키가 작은 쌍둥이 형제 합과 체에 관한 이야기예요. 그 소년들의 좌충우돌 키 키우기 도전기가 한 편의  코미디를 보는 것처럼 재미있었어요. 그렇다고 재미만 있는 것은 아니에요. 나름 생각할 거리도 있는 성장소설이랍니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옳게 보았다. 아버지는 난이였다. 사람들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옳게 보고 있었다. 난이라는 것 외에, 사람들이 아버지에 대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7쪽)


이 소설은 조세희의 <난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인용으로 시작해요. 합체의 아버지는 공을 쏘는 난이예요.


이번 체육시험은 팀으로 나눠 농구하고 이긴 팀과 골을 넣은 학생에게 가산점을 주는 평가 방식으로 정해졌어요. 키가 작은 합체 같은 팀이 되는 걸 원치 않는 친구들에게 눈총을 받습니다. 연습 경기 내내 열심히 뛰어다녔지만 합체에게는 누구도 공을 넘겨주지 않아 슛을 해볼 기회조차 얻지 못해요. 공부 잘하는 합은 일등을 놓치지 않으려면 체육 수행평가를 잘 봐야 하는데 걱정입니다. 체는 맘에 드는 여학생이 보는 앞에서  멋지게 공을 쏘아 올리고 싶은데 기회도 주어지지 않아 속이 상합니다. 게다가 작은 키 때문에 좋아한다는 말을 꺼낼 용기도 나지 않아요. 어떻게든 키가 빨리 크고 싶은 체..


체는 여름 방학을 맞아 키 키우기 작전에 돌입합니다. 자칭 용하다는 도사의 비법을  합을 꼬드겨서 가출을 감행합니다. 편지 한 장만 달랑 남기고 계룡산으로 도를 닦으러 들어간 거예요. 은 숲 속으로 들어가 도인처럼 사는 합체.


여름 방학이 끝나고..  합과 체는 어떻게 됐을까요?


합체의 아버지는 공을 쏘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런 사람을 알아봐 준 합체의 엄마는 또 얼마나 멋있는지 모릅니다. 아버지는 키가 안 클까 봐 고민하는 합체에게 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을 대하는 자세라는 걸 알려줍니다.


"합, 체, 니들은 아버지가 가지고 노는 이런 공 말고, 너희들의 공을 찾아야 해. 너희만의 진짜 공."(43)


"좋은 공이 가져야 할 조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다, 바로 공의 탄력도란다. (... ) 공의 탄력도란 말이지, 땅에 떨어져도 다시 튀어 오르는, 그러니까 실수로 잘못 쏜 공이 땅에 떨어지더라도 그대로 깨지지 않고 다시 뛰어오를 수 있는 힘을 말한단다" (...) 쇠공이나 유리공 같은 건 아무리 강하고 예뻐도 절대 좋은 공이 될 수 없는 거지. 걔네들은 쏘기도 어렵지만 일단 쏴도 다시 튀어 오르지 않고 땅에 박히거나 깨져 버리니까. 벽에 부딪혀도 거기서 더 힘을 얻어 다시 힘차게 튀어 오를 수 있는 힘인 탄력도, 이게 좋은 공이 가져야 할 조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거란다"(70)


"너무 커서도, 너무 작아서도 안 돼. 두 손에 딱 잡힐 만큼의 크기, 그게 좋은 공이지. 물론 어깨는 조금 많이 벌려도 좋아. 하지만 자기 두 손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공이거나 아니면 두 손을 쓸 필요도 없이 한 손에 움큼 들어오는 공은 그다지 좋은 공이 아니란다."(263)


"너무 무거워서도, 너무 가벼워서도 안 돼. 공을 들었을 때 내가 이 공을 들고 있구나, 하는 느낌, 그 정도의 느낌이 이상적인 무게지. 그 공을 드느라 움직이지 못할 정도면 절대 좋은 공이라 할 수 없고, 또 반대로 공을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그래서 잃어버려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공이라면 그것 역시 안 좋은 공이야."(264)


합체에게 해주는 아버지의 이런 말들이 줄거리 사이사이에 있어요. 좋은 공의 조건, 좋은 공을 고르는 법, 공을 대하는 자세... 자신이 잘 아는 공을 예로 들어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말해줍니다. 삶에 대해 이런 자세를 가진 아버지 좀 많이 멋지지 않나요?


성장기의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역할은 아주 중요하죠.  비록 키는 작지만 마음의 키만은 누구보다 컸던 아버지처럼 합체는 아마 자기 몫을 잘 살아내는 사람으로 자랐을 거예요.


그래서 합체는 키가 컸냐고요? 글쎄요.

마음의 키가 랐다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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