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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우 Jan 26. 2022

글의 침묵, 그 힘에 대해

밴드를 탈퇴한 뒤 만난 장 그르니에의 「섬」에 부쳐

활자에 지쳐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글소리에 내 글소리를 더하는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졌었다. 말소리가 글소리로 변한 공간. 그 진공관 같은 공간에서 소리는 마비된 상태였다. 소리의 톤과 색을 알 수 없는 곳, 화자의 표정과 몸동작이 연막에 가려진 곳에서 나누는 대화. 그 대화에 색을 입히고 소리의 높낮이를 정하는 일은 순전히 내 몫이었다. 내 컨디션과 감정에 따라 글소리의 양상이 다르게 받아들여졌다. 소리의 톤이 날카로워지고 말하는 이의 표정이 무뚝뚝해지다가 어느 순간 뾰로통해지기도 했다. 어느 때는 짜증 난 얼굴이 보이기도 했다. 글을 소리로 변환시키는 내 감정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계를 느꼈다.


어떤 글들은 내가 잘못 살고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방식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 가슴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보다 타인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리고 그 글들이 드디어 내 삶을 압도했다. 타인의 글, 들리지 않는 소리에 짓눌려 정작 내 가슴속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가치관에 혼란을 느꼈다.


이 시대에 타인에게 친절하고 선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위선인가?

가벼운 사랑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불륜에 너그럽지 못한 것은 고루하고 답답한 것인가?

나는 위선자인가? 나는 고리타분한 사람인가?


날마다 그 질문 앞에 서서 나와 직면했다. 대답할 수 없었다. 내 가슴속의 소리를 듣고 싶은데 들을 수가 없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날이 갈수록 진공관 같은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커져갔다.  안 보면 그만인데 아침에 눈을 뜨면 습관처럼 들어가고 습관처럼 읽는 글들. 글소리가 없는 고요한 시간들에 대한 갈망. 결국 나는 도망쳤다. 그 뒤 김화영의 글을 만났다.


지식을 얻거나 지혜를 얻기 위함이 아닌 가슴 찡해지는 아름다운 한두 줄의 문장을 만나기 위해, 내 마음속에서 불쑥 일어나는 파랑을 잠재우기 위해 늦은 밤 뒤적였던 몇 권의 책들. 구멍 뚫린 마음을 메워주던 한두 줄의 문장을 만났을 때 일었던 떨림. 그것을 경험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이 짧은 글 속에 들어 있었다.

 

- 아무나 글을 쓰고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주워온 지식들로 길고 긴 논리를 편다. 천직의 고행을 거치지 않고도 많은 목소리들이, 무거운 말들이 도처에 가득하고, 숱하고 낯선 이름들이 글과 사색의 평등을 외치며 진열된다. 정성스러운 종이 위에 말없는 장인이 깎은 고결한 활자들이 조심스럽게 찍히던 시대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멀리 떠나왔는가?

노랗게 바랜 어떤 책의 첫 장을 넘기고 <장인 마리오 프라시노가 고안한 장정 도안에 의거하여 그리예와 페오의 아틀리에에서 제조한 독피지에 50부의 장정을 특별 장정본을 따로 인쇄하였다.>라고 써놓은 것을 읽을 때면 마치 깊은 지층 속에 묻혀버린 문화를 상상하는 듯하다. 그런 책 속에는 먼 들판 끝에 서 있는 어느 집 외로운 창의 밤늦은 등불 빛이 잠겨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썩지 않는 비닐로 표지를 씌운 가벼운 책들을 쉽사리 쓰고 쉽사리 빨리 읽고 쉽사리 버린다. 재미있는 이야기, 목소리가 높은 주장, 무겁고 난해한 증명, 재치 있는 경구, 엄숙한 교훈은 많으나 <아름다운 글>은 드물다.

잠 못 이루는 밤이 아니더라도, 목적 없이 읽고 싶은 한두 페이지를 발견하기 위하여 수많은 책들을 꺼내서 쌓기만 하는 고독한 밤을 어떤 사람들은 알 것이다. 지식을 넓히거나 지혜를 얻거나 교훈 따위의 목적들마저 잠재워지는 고요한 시간, 우리가 막연히 읽고 싶은 글, 천천히 되풀이하여, 그리고 문득 몽상에 잠기기도 하면서, 다시 읽고 싶은 글 몇 페이지란 어떤 것일까?

겨울 숲 속의 나무들처럼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 서서 이따금씩만 바람소리를 떠나보내고 그러고는 다시 고요해지는 단정한 문장들. 그 문장들이 끝나면 문득 어둠이나 무(無), 그리고 무에서 또 하나의 겨울나무 같은 문장이 가만히 일어선다. 그런 글 속에 분명하고 단정하게 찍힌 구두점.

그 뒤에 오는 적막함, 혹은 환청, 돌연한 향기, 그리고 어둠, 혹은 무, 그 속을 천천히 거닐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 산문집을 번역했다. 그러나 전혀 결이 다른 언어로 쓰인 말만이 아니라 그 말들이 더욱 감동적으로 만드는 침묵을 어떻게 옮기면 좋단 말인가?  

 -장 그르니에의 "섬"을 옮기며 김화영이 쓴 글 전문


답답함을 느낄 때가 많았던 지난날들을 돌이켜보며 그때 내게 필요한 것은 그 무엇도 아닌 아름다운 글이었음을 알았다. 아름다운 글이 가진 문장 속 침묵이었음을 알았다.


다른 이의 글을 읽을 때마다 그 글이 가진 침묵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나는 글 속에 어떻게 침묵을 채워 넣어야 할 것인지 생각한다. 어렵다. 글의 침묵은 내겐 아직도 숙제로 남아 있다.


그와 별도로, 대면하지 않은 사람들끼리 글로 나누는 대화에서 침묵이 가능할까.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휘두른 언어에 심장이 찔렸으나 말을 참는다는 것은 고통이다. 타인에게 가하는 언어폭력을 보면서도 방관하는 사람의 침묵은 더 큰 상처로 남는다. 누군가의 가식과 허위를 알면서도 침묵을 행사하는 일이 고통일 때가 있다. 때론 누군가의 침묵이 형벌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한다면 그 침묵만으로도 할 일을 다 한 것이었음을 안다. 말의 침묵 못지않게 글의 침묵이 필요할 때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늦은 깨달음이다. 이 깨달음은 또 얼마나 나를 들볶을 것인가.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아직은 아픈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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