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같지 않은 소설 : 똥 지린 등장인물을 보고 뭘 느끼지?
2024년의 노벨문학상은 노르웨이 출신 작가 욘 포세(Jon Olav Fosse)에게 돌아갔다. 일반 독자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이며, 이 글을 쓰는 작가에게도 낯선 인물이다. 사실, 세계에 얼마나 많은 작가가 있고 그들이 내는 작품이 얼마나 많은지 잘 모르는 상황에서 매년 등장하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를 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솔직히 고전만 읽어도 부족한데, 욘 포세와 같은 독특한 작가를 읽는 게 일반인으로서 쉬운 일도 아니며, 특별히 권하고 싶지도 않다. 문학을 좋아해서 매년 적게는 수십 권, 많게는 백 권 넘게 읽어도 상 받는 작가의 작품을 미리 읽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문학의 세계는 넓고 깊고, 그 양이 너무 많다. 바로 문학의 매력 바다이다.
욘 포세는 노르웨이에서 태어났고, 노벨문학상을 받기 전에도 수많은 문학상을 휩쓴 작가이다. 일반적인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들의 전철을 밟은 셈이다. 그리고 그의 천재성은 영국 일간신문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선정한 2007년 ‘100명의 살아 있는 천재들’ 리스트에 83위에 랭크됨으로써 증명되기도 했다.
※ 참고로 당시 1위에는 1942년 환각제 LSD를 발견한 화학자 알버트 호프만과 1989년 월드와이드웹을 창시해 인터넷 시대를 연 버너스 리가 공동으로 차지했다.
작가는 1990년대 초부터 전업 작가로 활동하면서 소설뿐만 아니라 시, 아동서, 에세이, 희곡 등 다양한 문학 장르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런 여러 장르의 활동으로 인해서 그의 소설은 시적이 요소와 희곡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다. 간결한 문장, 메타포는 없지만 압축적이고 간결한 문장은 운문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고, 여러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이 독백하듯이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구성은 희곡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실제로 그의 희곡 작품은 1990년대 이래로 세계에서 수 천 번 이상 공연될 정도로 성공적이었다고 하는데, 접한 경험이 없어서 희곡에 대한 평은 생략한다.
보통은 한 두 작품을 꼼꼼히 뜯어 읽어보면서 독자에게 안내하는데, 포세의 작품은 뭉뚱그려 간결하게 설명하려고 한다. 필자가 읽은 작품은 《보트하우스》, 《3부작》, 《저 사람은 알레스 》, 《아침 그리고 저녁》, 《멜랑꼴리아 I-Ⅱ》등이다. 공통점은 간결한 문장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대체로 마침표 대신 쉼표가 많다. 그리고 계속 반복되는 말이 많아서, 등장인물의 정신 수준을 의심하게 될 정도이다. 최근 수상자들의 작품이 그렇듯, 우리가 생각하는 교훈 따위를 얻으려 한다면 실망할 것이다. 다 읽고 나면, ‘정말 끝인가?’라는 생각이 들 테니까. 기승전결을 찾을 수는 있으나, 큰 의미가 없다. 결말 자체가 허무하니, 머릿속에 뚜렷하게 각인되는 메시지도 없다. 은유적인 표현이 없고, 추상적이지 않아서 읽기는 쉬우나 그렇다고 이해가 잘 되는 작품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냥 한 작품, 한 작품 읽다 보면, 욘 포세라는 작가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갈 뿐이다.
1990년대를 기억하자!
작품을 읽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시대적 배경은 1990년대 이후이다. 1990년대 이후는 세계를 양분하던 극강 중 하나가 무너지고, 유일한 초강대국만 남았던 시점이다. 그렇다고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가 대동단결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초강대국을 제외하고는 고만고만해서 치열한 경쟁 시대가 펼쳐졌다. 공산주의 이념이 허무하게 종식되어 버린 시점에 유일하게 남은 것은 자유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였다. 물신이 지배한 현실, 그러다 보니 정신을 강조한 종교, 철학, 사상 등은 뜻밖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본격적인 도래와 진리의 부정은 정통적 가치관을 서서히 무너뜨린다.
90년대에 초·중·고등학교에 다닌 필자는 ‘도덕과 윤리’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돈’, ‘권력’, ‘명예’ 보다 중요하다고 배웠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보이지 않는 부분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순간의 자기 ‘관종’ 행위를 위해 명품을 휘감고, 국가, 사회, 가족, 그리고 다른 사람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게 ‘돈’이지 않은가? 보편적 가치와 진리가 소멸한 시대의 문학도 정통적인 기승전결을 부인한다. 아울러 현실을 상상력으로 보완하지 않고 오히려 상상력을 현실화시켜 문학으로 배출한다. 소설이 실제 본인이나 실제 살아있는 사람의 내레이션이 되기도 한다.
욘 포세의 작품은 이런 시대를 그대로 보여준다. 숨겨진 의미는 그야말로 개나 줘버리고, 기존 문장 쓰기의 문법도 버린다. 읽다 보면, ‘이게 소설인가?’라는 생각도 들고,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거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이 두 가지 질문을 하는 순간, 독자는 시대를 거스르는 삶, 즉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꼰대’ 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노(0.000000001m) 단위의 개인화
조금 과장해서 설명하면, 포세의 작품은 나노 단위의 개인화를 시도했다. 주인공은 일상적 생활이 불가능하다.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그런데, 어쨌든 정신병원에서 살다 나온 한 예술가(《멜랑꼴리아 I-Ⅱ》)를 빼고는 현실 생활을 한다. 사회 부적응자(《보트하우스》)도 있지만, 그래도 그런 사람도 그럭저럭 살아간다. 그러나 작품의 대부분은 개인의 이야기다. 그것도 아주 세심하게 개인을 다룬다. 불안함, 죽음, 질투, 분노, 수치심 등 개인의 심정을 간결하지만 집요하게 보여준다. 집요하다고 해서 정밀 묘사하는 게 아니라, 간결한 문장을 계속 반복함으로써 등장인물의 상태를 독자가 알 수밖에 없다. 이 또한 1990년대 이후의 모습이다. 국가, 사회, 공동체 등의 집단주의가 힘을 잃고 진짜 개인이 등장한다. 가족도 분열해서 남는 것은 ‘나’ 뿐이다. 그러나 이때 등장하는 개인은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 같은 자가 아니라, 찌질한 개인이다. 사실, 위대한 사람 한 명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인류는 특별할 게 없지 않은가? 그런데, 작가는 이런 별거 아닌 개인을 주인공으로 선택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삶을 이야기하지 않고, 생활을 다룬다. 태어나서 죽음까지, 혹은 특정한 사건을 언급하지 않고(물론 전혀 다루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금 처한 상황을 다룬다. 예를 들어 오줌이나 똥을 지린 등장인물의 수치심 등.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을 읽다가 등장인물이 똥을 지리고 수치심을 느낀 장면을 수십 쪽에 걸쳐서 읽게 된다면, ‘뭐지?’라고 생각하지 않을 독자가 있을까? 한 역자는 “개인적으로 특히 공들인 이 책이 과연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어떻게 가닿을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라고 걱정스러운 소감을 남겨놓기도 했다.
욘 포세를 정리하면서
포세의 작품만 이토록 특이한 것은 아니다. 2022년 수상작가 아니 에르노의 작품은 본인의 변태적인 성행위와 불륜을 그대로 옮겼고, 더 오래전에 엘프리데 옐리네크 작품의 사도마조히즘적인 성격과 폭력성은 노벨문학상이 아니라 ‘19세 금(禁) 딱지를 붙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외설적인 작품이었다.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정통의 파괴라고 할 수 있었다면, 현재는 파격이 하나의 정통이 된 듯하다. 그리고 이러한 파괴적인 작품들이 계속 등장하고 좋은 평가를 받는 시대가 온 것이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독자들은) 다시 원래 정통적 작품을 그리워하지 않을까? 아마도 그렇게 될 것이다. 물론, 우리가 아는 정통적 작품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등장할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