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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Nov 19. 2021

출석부

‘기역’은 급박하다. 혀의 모양에서 태어나 제일 먼저 이름을 얻은 값, 앞장선 순서의 값. 처음이 나중 되고 나중이 처음 된다는 말. 예리하게 찌르다 힘 있게 뒤로 빠지는 제 본성을 원망한다. 이럴 거면 중간이나 끝쯤 줄 세워주어도 좋았을 거라고 양냥거리며 ‘기역’은 매일 아침 깨달음을 얻는다. 산소는 폐의 끝까지 올라 송곳을 들었고, 거리를 달리는 다리는 멈출 줄 모른다. 기역과 붙은 모음 ‘아’는 덩달아 제 이름을 길게 소리치며 뛰어간다.


‘히읗’은 한만한 데가 있다. 깊은 곳에 부는 바람에서 태어나 끈덕진 인내심을 발휘한 몫,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 제 이름을 기다린 몫. 분침이 시에 떨어졌건만 아직도 느긋하기만 하다. ‘히읗’과 적당한 간격을 두고 걷는 모음 ‘이’는 환하게 웃으며 제 이름을 늘어지게 발음한다. 아늘아늘하게 흔들리며 걷는 팔다리. ‘히읗’은 달려가는 기역의 뒷모습을 담는다.


흰 종이에 수 놓인 아로롱다로롱한 글자들. 적게는 두 글자, 많게는 네 글자, 보통 세 글자를 넘나들며 변주를 만들어내는 글자들. 어떤 이름은 수줍고, 어떤 이름은 수럭수럭하고, 어떤 이름은 안연하고, 어떤 이름은 어리어리하다. 서너 글자에 압축된 수많은 사건과 이야기와 만남과 헤어짐과 삶과 죽음과 성격과 환경. 가지고 태어난 이름 뒤 몇 글자가 더 붙은 사람이 앞에 선다. 수 놓인 글자를 하나하나 짚는다. 그리고 낭독한다. 정묘하게 쓰여진 이름들의 시를.


기역, 네. 니은, 네. 디귿, 네. 리을, 네. 미음, 네. 비읍, 네. 시옷, 네. 이응, 네. 지읒, 네. 치읓, 치읓? 안 왔나? 키읔, 네. 티읕, 지금 오고 있어요. 피읖, 네. 히읗, 왔습니다. 같은 것이 반복되나 또한 같은 것 하나 없는 문답 위로, 저마다 다른 길이와 높낮이 위로, 미리 정한 것 하나 없이 연주되는 즉흥 교향곡이 흐른다. 매 악장은 새롭게 진행되고, 주제를 변주하며 다른 방식으로 반복한다. 사소한 것이 웅장해지기도, 웅장한 것이 사소해지기도 한다. 조그마한 것이 거대해지기도, 거대한 것이 볼 수 없을 정도로 작게 변하기도 한다.


묻는 사람이 묻는다. 이 이름은 어떤 이야기에 붙여진 이름인가요? 누구의 이야기인가요? 누구의 이름인가요? 답하는 사람이 답한다. 이 이름은 인생에 붙여진 이름이에요. 저의 이야기예요. 저의 이름입니다. 때로는 질문에 대한 자신이 없거나, 침묵하거나, 도망하기도 하며, 내가 나임을 증명한다. 그 인생이 나의 인생임을 증명한다. 증명하기를 반복한다. 그건 어제의 나입니다. 그건 오늘의 오늘의 나입니다. 그건 내일의 나입니다. 그건 나입니다. 나라고요.


다른 사람의 증명이 시작되면, 이내 잠잠해진다. 누구나 자신을 증명하나, 아무도 다른 사람의 증명을 듣지 않는다. 가끔 다른 사람이 자리에 없을 때, 그가 증명할 수 없는 상태임을 증명할 뿐이다. 짧은 증명의 시간은 곧 사라진다. 모두들 일상으로 돌아간다. ‘기역’도 ‘히읗’도 같아진다. ‘아’와 ‘이’는 탄식을 내뱉는다. 아-, 아-, 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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