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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Dec 12. 2021

What’s in my bag?

 

밖에 자주 나갈 때에는 매일 똑같은 가방을 들고나간다. 따로 짐을 챙기지 않아도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이 어제 들고나갔던 그대로 들어있다. 휴대폰, 지갑, 열쇠, 지하철 안에서 읽을 책, 짧은 메모를 남길 수 있는 노트와 연필. 그 정도면 충분하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나갈 필요도, 혼자 있을 때의 나를 보여줄 필요도 없다. 이미 사람들과의 만남을 위해 준비된 ‘나’가 있으니까. 그러나 오랜만에 사람을 만날 때면 밖에 나가지 않은 시간만큼의 고민이 필요하다. 어떻게 가방을 꾸려야 할까. 어떤 나를 데리고 나가야 할까. 중요한 것을 잊거나 엉뚱한 것을 집어넣을 때도 있다. 이를테면 휴대폰 대신 토마토를, 지갑 대신 샐러리를, 열쇠 대신 수도꼭지를, 책과 노트 대신 손전등을 챙기는 식이다. 하지만 샐러리로 계산을 하고 수도꼭지로 문을 열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쯤이면 이미 현관은 저 멀리 있어 돌이킬 수 없다. 준비되지 않은 가방과 준비되지 않은 나를 데리고 집을 나선 날에는 인간관계를 어떻게 하는지 잊어버린 사람처럼 고장이 난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사람 대하는 법을 잊어버린 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차라리 침묵을 선택한 날. 어떤 때 웃어야 하는지, 어떤 때 감탄사를 넣어야 하는지, 어떤 종류의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고, 소소하게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유령처럼 흐릿하게 존재하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사회성과 사교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꼭 닮은 두 개의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사람은 많고, 에너지는 없고, 그저 아늑하고 작은 내 방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타인을 사랑하고 싶었고, 타인이 사랑하기 쉬운 모습이 되고 싶었다.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랐다. 나에게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랐다. 사람들을 신뢰하고 믿지만, 부러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나의 기대로 인하여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나’라는 건 한 가지의 고정된 평면적 모습이 아니고, 계속해서 변하는 입체적인 존재니까. 글로 쓰는 것처럼 마냥 설정한 대로만 살 수는 없는 거니까. 하물며 글로 쓴 인물도 쓰는 사람 말을 안 듣고 자기 멋대로 휘젓고 다니는데, 사람은 더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니까. 설령 칭찬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에게 “너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장점이라고 못 박아둔 그 모습 이외의 다른 부분들을 배제하는 것이 될까 봐. 그게 그 사람에 대한 몰이해가 될까 봐. 아마 평생을 알아도 어떤 사람의 모든 면을 다 알 수 없을 것이다. 달의 표면만 보고 뒤편을 알 수 없고 주사위의 한 면만 보고 나머지 면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뒤편에 어떤 모습이 있더라도 사랑하고 싶었다. 완벽한 사랑을 주고 싶었다. 내 욕심인 걸 알면서도.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애쓰면서도 한편으론 사랑이 두려웠다. 누군가의 사랑이 오롯이 나를 향하는 게 느껴지는 순간 도망치고 싶어졌다. 그래서 생각했다.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나를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단지 나를 알 만큼 가깝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도 아니라, 나를 알고도 좋아해 주면 좋겠다. 내가 어떤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단지 나라서 좋아해 주면 좋겠다. 누군가의 앞에서 온전히 나로서 존재한다는 건 가능한 일일까. 내가 주고 싶었던 종류의 사랑은 사실 내가 받고 싶은 사랑이었다.


문득, 이 모든 것이 피곤해졌다.


언제부터였을까.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 그저 나로서 존재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 어쩌면 방에 틀어박혀 지낸 시간 동안 서서히 바뀌어 왔는지도 모른다. 인생의 중요한 사건은 때로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 조용하게 일어나곤 하니까.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책을 읽는 순간순간 변화는 일어나고 있으니까. 이제 내 가방 안에는 휴대폰 대신 토마토가, 지갑 대신 샐러리가, 열쇠 대신 수도꼭지가, 책과 노트 대신 손전등이 들어 있다. 이제 내 가방 안에는 웃는 얼굴 대신 나의 상태를 살피는 태도가, 밝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 대신 평온함이, 신념에 따라 완벽하게 행동하려는 강박 대신 때로 모순적인 행동을 하기도 하는 엉뚱함이 들어 있다. 내가 나에게 진실하다면 괜찮다. 이제, 아주 조금쯤은, 준비되지 않은 가방과 준비되지 않은 나를 데리고 사람을 마주할 용기가 생긴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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