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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Nov 06. 2024

몸의 언어


그런 언어가 있다. 현실과 맞닿아 내 영혼과 정신, 그리고 몸을 이어주는 언어. 관념 속의 무언가가 실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언어. 이 언어는 아주 구체적이고 명확한 형태를 띠고 있어서, 정해진 공식을 넣으면 답이 도출되는 단순함으로 때로는 슬픔을 때로는 기쁨을 느끼게 한다. 중요한 것은 언어가 아니라 언어를 통해 소통하는 것이다. 우리는 행복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해 소통한다. 비록 그것이 단어의 나열에 그칠지라도.


온몸의 근육이 빠져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어려웠던 여름, 죽음을 어느 때보다 가까이 느꼈고 경고를 하는 몸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동안 듣지 않으려고 애써왔던, 무시해 왔던. 몸의 언어. 몸과 마음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전에는 그 사실을 몰랐다. 마음이 아프고 우울이 찾아올 때마다 나는 내 몸을 망쳤다. 먹지 않았다. 굶어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가끔씩 물을 마실 때마다 빈 뱃속에 찬물이 흘러들어오는 기분이 좋았다. 비어있고 싶었고, 아프고 싶었다. 누가 봐도 아픈 사람이었으면 했다. 폭식을 했다. 꾸역꾸역 음식을 밀어 넣고 토할 때까지 먹었다. 더 이상 먹는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기계적인 움직임이었다. 배가 불러서 아팠다. 토하고 싶었다. 토해내고, 또 토해내서 내 본질과 생명까지 토해내고 싶었다. 그렇게 죽고 싶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매일 아침 8시까지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아서 그냥 그렇게 있었다. 간헐적으로 쏟아지는 피곤에 기절할 때마다 꿈을 꿨다. 짧은 꿈은 행복하고 슬펐다. 그러다 죽은 듯 잠만 잤다. 이틀, 사흘을 내리 잤다. 더 이상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가끔씩 눈을 뜰 때마다 몽롱한 정신 사이로 목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다시 눈을 감는다. 암흑이 밀려온다. 방 안은 깨어있을 때 갈겨쓴 글들과 쓰레기들로 가득했고, 움직일 힘이 없어 씻지도 못했다. 머리가 떡이 지고 옷에서 눅눅한 냄새가 나도 느끼질 못했다. 그런 걸 신경 쓸 기력이 없었다. 몸은 언제나 내게 불편한 존재였다. 나를 한계 짓고 내 영혼을 가두었다. 몸의 존재를 잊으려 했으나 몸은 잊으려 하면 할수록 끊임없이 말을 걸어왔다. 더 이상 무시할 수가 없을 정도로 몸의 언어가 자신을 주장하기 시작했을 때 깨달았다. 몸은 잊으려 한다고 잊히는 존재가 아니라 잊으려 할수록 선명해지는 방식을 택하는 존재라는 걸.


가장 먼저 한 일은 내 방을 바꾸는 일이었다. 그 당시 내가 할머니 댁에서 쓰던 방은 오래된 책들과 가구, 물건들을 보관하는 창고방이었다. 먼지가 쌓이고 볕이 들지 않는 방 안을 둘러보고 일을 시작했다. 침대 대신 사용하던 빨간 소파를 버리고 제대로 된 침대를 들이는 일. 앉아있을 곳이 없는 공간 안에 책상과 의자를 들이는 일. 오래된 물건들을 버리고 먼지들을 털어내는 일. 물걸레로 바닥을 싹싹 닦고 새로운 환경을 만드는 일. 그때는 몸을 잡아주지도 못하는 빨간 소파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내내 자는 게 일상이라 왜 그런 작업이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나름대로 방의 모습을 갖추어 가는 방을 보며 달라지는 기분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내면을 들여다보기에 급급해서 주위를 둘러보지 못했는데 사실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꽤 많이 받는다는 걸 느낀 순간. 조명 하나가 얼마나 손쉽게 기분을 바꾸어 놓는지.


너는 행복의 7할은 먹는 것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유독 피곤하거나 기분이 우울할 때는 전해질이 부족한 것이니 이온음료를 마시라고 하고, 무기력할 때는 체력이 부족한 것이니 운동을 하라고 하는 사람. 마음의 언어를 연구하는 대신 몸의 언어를 잘 듣고 그 필요를 채워주는 사람. 너를 따라다니면서 먹는 것에 돈을 쓰는 일이 아깝지 않게 되었고, 뜨거운 땡볕이 내리쬐는 날 수영장에 가서 수영을 하고 마시는 시원한 음료가 얼마나 단지 알게 되었고, 내가 관념 속의 존재나 머리만 있는 존재가 아니라 아끼고 돌봐야 할 몸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요즘에는 몸의 언어를 배우는 중이다. 몸의 한계가 곧 나의 한계인 것 같아서 내 정신의 한계인 것 같아서 계속해서 미워했지만, 몸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에 나는 바쁜 일상 속에서 쉼을 챙길 수 있고, 나는 오래 우울 속에 내버려 두지 않을 수 있다. 몸의 언어가 보내는 신호를 통해 나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다. 나는 마음이 아플 때 그 증상이 몸으로 드러나는 사람이다. 면역력이 떨어져 감기에 걸리거나, 살갗만 스쳐도 아프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천식이 심해지거나, 몸에 빨간 반점이 돋는 식으로. 전에는 제대로 인지조차 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이제는 몸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 귀를 기울인다. 내가 스트레스를 받는구나, 마음이 힘들구나, 나를 돌볼 여력이 없었구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늘 어려운 일이다. 처음에는 음절 하나를 발음하는 것도 어려워 자유로운 소통은 먼 미래에도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언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영원히 배울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러나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천천히 차근차근 배운다면, 내가 배운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사용해 소통하는 연습을 한다면, 어느새 꽤 많은 문장을 발화할 수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배고픔과 배부름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배고프지 않은 것이 아니고 배부르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그것을 명확한 문장으로 만들어 몸에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먹지 않을 때는 먹지 않아도 사는 존재처럼 살았고, 먹을 때는 주는 대로 먹다가 배가 터져 죽는 물고기처럼 먹었다. 잠도 마찬가지였다. 잠을 자지 않아도 괜찮을 것처럼 살다가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것처럼 잤다. 그러나 지금은 몸이 걸어오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생각한다. 배고프니까 먹어야지, 배부르니까 그만 먹어야지. 피곤하니까 잠을 자야지, 충분히 잤으니 일어나야지. 그렇게 서서히 몸의 언어에 익숙해진다.


페소아는 말했다. ‘언제나 똑같고 변화 없는 내 삶을 지속하는 무기력, 결코 변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덮고 있는 표면에 붙은 먼지나 티끌처럼 남아 있는 이 무기력을 나는 일종의 위생관념의 결여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몸을 씻듯 운명도 씻어주고, 옷을 갈아입듯 삶도 갈아줘야 한다. 먹고 자는 일처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존중하기 때문에 그리해야 하고, 그것을 우리는 위생이라고 부른다.’ 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있다. 우울할 때면 개운할 때까지 푹 자고,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따뜻한 차를 마시며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흥미로운 책을 읽는다. 몸의 위생과 마음의 위생은 연결되어 있다. 몸을 씻음으로써 영혼에 묻은 먼지와 묵은 때를 벗겨내고 삶을 새것으로 갈아준다. 인생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로 가득하다. 해결할 수 있으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마음의 문제가 생겼을 때 원인을 찾아 해결하려고 할수록 우리는 그 원인이 정말 복잡하고, 사실은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럴 때는 마음의 문제를 몸의 문제로 우회해 해결하면 된다. 우울할 때는 맛있는 걸 먹자. 슬플 때는 잠을 자자.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하루를 채우고, 내 몸을 달래기 위해 애쓰자. 복잡한 영혼의 언어를 풀어내는 대신 몸의 언어를 듣고 대화를 나누는 것. 갈수록 더 단순해지고 가벼워지는 것. 그런 것들로 인해 우리는 삶을 지속해 나갈 수 있다.


그런 언어가 있다. 현실과 맞닿아 내 영혼과 정신, 그리고 몸을 이어주는 언어. 관념 속의 무언가가 실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언어. 이 언어는 아주 구체적이고 명확한 형태를 띠고 있어서, 정해진 공식을 넣으면 답이 도출되는 단순함으로 때로는 슬픔을 때로는 기쁨을 느끼게 한다. 중요한 것은 언어가 아니라 언어를 통해 소통하는 것이다. 우리는 행복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해 소통한다. 비록 그것이 단어의 나열에 그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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