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광환 May 29. 2024

[단편소설] 帝網刹海 제망찰해

거대한 제석천의 그물망 안에 서로 비추는 인연을 큰스님은 꿰뚫어보았다

  

1

눈 덮인 숲에 검은 형체가 보였다. 추위에 얼어 죽은 산짐승인 줄 알았던 우석(愚石)의 예감은 맞지 않았다. 

어린아이다. 

장작 진 지게를 벗어 던지고 달려가 아이를 일으켰다. 작은 몸이 가볍게 들렸다. 눈을 털어내고 보니 목도리 속 여자아이 얼굴이 드러났다. 

대여섯 살쯤이나 될까. 

아이는 의식이 없었다.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았다. 다행히 품속엔 온기가 남아 있다. 코에서도 미세한 호흡이 느껴졌다. 

사방을 둘러봐도 아이 발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눈이 그친 건 새벽녘이었다. 발자국을 눈발이 지워버렸다면, 아이는 지난밤에 이곳까지 와서 쓰러진 것이다. 눈이 한 자 넘게 내리던 그 밤에. 멀리 떨어진 곳에 등산로가 있긴 했다. 그래도 이해되는 건 아니다. 눈보라 치는 겨울밤에 이런 작은 아이를 데리고 등산할 사람이 있을까. 어쨌거나 아이를 살려야 한다. 다급했다. 우석은 아이를 안고 뛰어갔다. 

산길로 암자까지 가려면 봉우리를 돌아야 한다. 금방 내린 눈은 무명실처럼 부드럽다. 설피를 신고도 발목까지 빠지는 그 먼 거리를 가려면 시간이 지체될 것이다. 그럴 시간이 없다. 우석은 봉우리를 넘는 지름길을 택했다. 가파른 길에 설피가 벗겨졌지만 그걸 챙길 여유가 없었다. 울창한 수풀과 교목들 사이로 눈을 헤치며 오르고 또 올랐다. 숨이 턱에 찼지만 쉴 수 없었다. 조급한 마음이 다리를 재촉했다.  


        

‘고집(苦集)이 없으면 멸도(滅道)도 없는 게야. 그러면 진리도 사라지지. 연기(緣起)를 두려워하지 마라. 세상은 어차피 중중무진(重重無盡)이니라.’

큰스님 말씀이 가슴으로 울려왔다. 하지만 우석은 마음속으로 외쳤다.

‘저는 이 아이를 살려야 해요. 큰스님, 제 다리에 힘이 나도록 좀 도와주기나 하세요.’

보름 전 입적하신 큰스님이 소나무 빼곡한 가지를 뚫고 좁은 하늘에서 웃는 기색으로 쳐다보았다. 큰스님다운 표정이다. 

큰스님은 평소 우석을 놀리길 즐겼다. 공양 때 산갓이나 삼나물을 조금이라도 더 익혀 올리면 큰스님은 여지없이 놀려댔다.

“아직도 그 붉은 양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구나.”

“그분은 큰스님을 뵈러 오는 분이지, 저를 보려고 오는 게 아니잖아요.”

“이 산꼭대기 암자까지 아무렴 이 늙은이를 보려고 매번 고생해가며 올라오겠느냐. 그 어여쁜 색시가.”

우석은 그럴 때마다 더 이상 대꾸하지 않는 것으로 큰스님께 항의했다. 

함초롬히 쳐다보는 눈빛에 가슴을 베이던 그날이 떠 올라 우석은 잠깐 통증을 느꼈다. 여자를 처음 보던 날, 번민 속에서도 미소를 지으려 애쓴 건 잘못이었다. 요동치는 가슴을 숨기려는 헛수작이라는 것을 큰스님은 놓치지 않은 것이다. 

작게 한숨이 나왔다.          



나뭇가지를 헤치며 봉우리에 다다른 우석은 저 아래 희미한 암자 지붕을 바라보았다. 중간쯤 가파른 계곡이 하얀 산중에 어두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계곡을 피하려면 능선을 타고 조금 돌아가야 한다. 그래도 30분 이상 빠른 길이다. 

봉우리엔 바람이 거셌다. 아이 온기가 식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우석은 솜저고리 매듭을 풀어 아이를 품속으로 안고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마음이 급했다. 능선을 타고 뛰다시피 걸음을 재촉했다. 쌓인 눈이 다리를 잡아채도 있는 힘을 짜냈다. 눈길이든 빗길이든 수백 번 오르내리던 산이건만, 오늘처럼 가파르게 느껴진 날은 처음이었다. 힘겹게 산에서 내려가자니 자꾸만 큰스님이 따라오는 것 같았다.    


 

“너는 네 마음을 훔쳐 도망친 유녀(遊女)를 벗어나 잃어버린 너를 언제나 찾을 작정이냐.”

“무슨, 제가 여자한테 마음을 빼앗겼다고 그러세요.”

“자무량심(慈無量心)을 벗어난 놈이 탐진치(貪瞋癡)에 허덕거리는 걸 모를 줄 아느냐.”

우석이 도끼로 장작을 팰 때나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뿐만 아니라 홀로 선정에 들었을 때도 큰스님의 놀림은 그치지 않았다.

“반야(般若)를 던져버린 놈이 삼매(三昧) 짓을 다 하는구나.”

“큰스님, 공부 좀 훼방 놓지 마세요.”

우석이 퉁명스레 대꾸해도 큰스님은 그저 킬킬 웃을 뿐이었다. 

큰스님이 이 아이를 봤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이 생명이 꺼져가는 아이 또한 번뇌로 치부하셨을까. 

우석은 매사에 장난기 넘치는 큰스님이 내릴 결정이 궁금했다. 그렇지만 이내 큰스님의 표정이 떠올랐다. 큰스님은 웃을 것이다. 그 의미는 분명했다. 

아이를 나더러 책임지라고 하시겠지. 까치가 산속에 물어다 놓은 걸 내가 데려왔으니까. 

우석은 하늘을 바라보며 큰스님 미소를 쳐다보았다.

‘제가 어리석은 놈이라도 좋으니 큰스님, 이 아이를 살려주세요. 이젠 어떻게 놀리셔도 화 안 낼게요.’  


   

여자는 언제나 붉은 양산을 쓰고 왔다. 여자는 암자에 오면 큰스님께 절을 올린 뒤, 우석을 찾아 합장 인사를 했다. 여자는 곧바로 법당과 부엌, 그리고 큰스님 방과 우석의 방을 청소했다. 그 손길이 지난 자리는 모든 게 윤이 나고 질서정연하게 자리 잡혔다. 여자는 그러고 나서야 큰스님께 법문을 요청했다. 큰스님이 반갑게 맞이하는 재가신자로는 그 여자가 유일했다. 이 높은 암자까지 찾아오는 사람이 드물기도 하지만, 큰스님은 그 외 어떤 이가 법문을 요청해도 받지 않았다.

우석은 여자와 마주하는 일을 피했다. 견고한 줄 알았던 자신의 중심을 가볍게 무너트린 사람. 우석은 여자가 오면 으레 지게를 지고 산으로 올라, 서녘 하늘이 붉어질 무렵 나무를 지고 내려왔다. 그러면 여자는 사라지고 우석의 방에 정갈한 저녁상이 차려져 있었다.     


여자는 언제나 붉은 양산을 쓰고 왔다


2

암자로 들어선 우석은 얼른 방으로 뛰어 들어가 아이를 뉘었다. 코밑에 손가락을 대보니 여린 숨결이 여전했다. 방바닥엔 지난 저녁 불 땐 열기가 아직은 남아 있었다. 그래도 아이를 소생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우석은 이불로 아이를 여민 다음 방을 뛰쳐나가 눈 덮인 장작더미 속 젖지 않은 장작을 꺼냈다. 그러나 불쏘시개 나뭇잎은 속엣것도 눅눅했다. 여러 차례 성냥을 그어대도 불이 붙지 않았다. 초조한 이마엔 쉴 새 없이 땀이 흘렀다. 주위를 둘러봐도 불붙일 만한 게 눈에 띄지 않았다. 우석은 솜저고리를 벗었다.

지난 초겨울에 여자가 다녀갔던 날, 저녁상 옆에 못 보던 솜저고리가 다소곳이 개켜져 있었다. 메모지 한 장과 함께.

‘스님 겨울 저고리가 낡아 보이기에 손바느질로 만들어봤어요. 눈대중으로 만들었지만 잘 맞았으면 좋겠네요.’

우석이 입어 보니 여자 걱정과는 달리 잘 맞았다. 게다가 바느질 맵시가 빼어났다.

 우석은 망설임 없이 솜저고리에 불을 붙여 아궁이로 던져넣었다. 이어서 눅눅한 나뭇잎 뭉텅이와 장작을 함께 쑤셔 넣었다. 

제발 좀 활활 타올라라.

우석은 간절한 마음으로 합장하며 눈을 감았다. 매캐한 연기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범어(梵語기도문이 입으로 쏟아져 나왔다. 잠시 후, 연기가 사라지면서 아궁이가 환한 빛을 발했다. 마침내 장작에 불이 붙은 것이다. 우석은 합장한 채 팔을 번쩍 들고 모든 천운을 긁어모으는 심정으로 외쳤다.

마하 보드히 삿뜨와! 쓰마라! 쓰마라! 흐르다얌!

(대보살 님이여기억해 주소서기억해 주소서이 기도를!)

숲 어딘가 까치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석은 암자 마당으로 나가 까치 우는 쪽을 바라봤다. 암자 뒤 눈 뒤집어쓴 참나무에 까치들이 앉아있었다.     

“까치가 반가운 걸 물고 오려는구나.”

입적하기 전날 큰스님이 말했다.

“제깟 놈들이 물어오긴 뭘 물어와요.”

우석이 볼통하게 받아쳐도 큰스님은 장지문 밖 까치 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러더니 말했다.

“너는 제망찰해(帝網刹海)를 기억하느냐.”

“세상이 그물코처럼 얽혀있다는 말이잖아요.”

“이놈이, 그토록 가르쳐도 뭘 제대로 아는 게 없구나. 얽히긴 뭐가 얽혀 이놈아.”

쀼루퉁해진 우석이 대꾸하지 않으니 큰스님이 한숨 쉬며 말했다.

“인연의 씨란 모든 곳에 숨을 쉬고 있다는 말이니라. 그러니 아주 가까운 곳에도 있기 마련이지. 저 까치 소리가 바로 무진법계(無盡法界)로 널 이끌어가려는 거야. 너는 개시허망(皆是虛妄)이라는 말을 믿지 말거라. 그 말이야말로 허망한 거다.”

부처님 설법의 핵심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큰스님을 우석은 처음 보았다.

“절집에서 존경받는 어른이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어떡해요.”

“이런 답답한 놈 보게나. 내가 그러니 하는 말이 아니겠느냐. 아무도 못 보는 걸 볼 수 있는 중은 나밖에 없다는 걸 알아야지. 겨우 간시궐(乾屎厥마른 똥 막대기)이나 붙들고 있는 놈들이 도대체 무얼 볼 수 있겠느냐.”

우석은 한마디 불끈하려다가 참았다. 그런데 마치 우석의 내뱉을 말을 이미 들었다는 듯 큰스님이 말했다.

“허허, 그놈 참 말이 많구나.”

큰스님은 다음 날 새벽, 작별 인사도 없이 입적해버렸다.


큰스님은 작별 인사도 없이 입적해버렸다.


우석은 불붙은 장작을 여미고 아궁이 문을 닫았다. 이 열기가 사경 헤매는 아이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준다면 까치가 심란한 마음을 흔들어댄들 괘념치 않을 것이다. 그 옛날 운문선사의 똥 막대기를 자신이 들고 있다 해도 무슨 상관이랴. 

아이가 깨어나지 않으면 어떡한다? 

전화기도 없는 암자에서 세상 밖으로 소식을 알리려면 본사(本寺)까지 내려가야 한다. 이 눈 속에 한 시간이 넘게 걸릴 것이다. 

그동안 아이가 생명을 유지할까. 

조바심이 일었다.

‘큰스님, 제발 좀 아이를 살려주세요.’

큰스님이 계셨다면 이토록 초조하지 않을 것이다. 큰스님은 우석에게 어떤 타박을 한다 해도 아이만큼은 살려내시리라. 자꾸만 기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우석은 아이를 확인하기 위해 방문 앞에 섰다. 방 안엔 기척이 없었다. 내려앉으려는 가슴을 다잡으며 슬며시 방문을 열어본 우석은 깜짝 놀랐다. 일어나 앉은 아이가 눈을 껌뻑이며 이쪽을 쳐다보았다. 우석이 방으로 뛰어들어 아이를 끌어안았다.

‘큰스님 고맙습니다.’

아이 얼굴을 만져보니 따뜻할 뿐 열은 없었다. 아이가 꼬물꼬물 우석의 품을 빠져나오려 했다. 아이를 놔주고는 그렁그렁 맺힌 눈물 너머 그 작은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멀뚱멀뚱 쳐다보는 눈동자가 맑았다. 아이가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어버, 어버.”

아이가 손을 자기 입으로 가져갔다.

“배고프지?”

“어버, 어버.”

우석은 뛰어나가 가마솥 더운물을 가져왔다. 아이가 물을 마시고는 손을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어버, 어버.”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아이는 배가 고프다. 그런데 지어놓은 밥이 없었다. 우석은 지난 저녁 본사 동배 스님이 생일선물로 가져온 케이크를 아침에 조금 먹었을 뿐이었다. 남은 케이크는 툇마루 끝에 놔두었지만, 그 차가운 걸 아이에게 먹일 수는 없었다. 큰스님은 전기나 가스도 암자에 들이지 못하게 했다. 음식을 만들거나 데우려면 불을 지펴야 했다. 더구나 아이는 죽을 먹여야 할 것 같았다. 우석이 아이 어깨에 이불을 둘러주며 말했다.

“여기 가만히 있으렴. 죽을 끓여올 테니까. 밖으로 나오면 안 되는 거 알지? 밖은 꽤 춥거든.”

빤히 쳐다보던 아이 손이 또 입으로 갔다.

“어버, 어버.”

우석은 죽을 끓이며 아이를 보양시킬 음식이 없을까 생각해봤다. 그러나 암자에 있는 음식이라곤 그럴만한 게 없다. 살생의 계율이고 뭐고 산토끼라도 잡아 고기를 먹이고 싶었다. 본사 공양주 보살들에게도 고기가 있을 것이다. 한참 키 크는 행자들에겐 고기 음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 아이에게 음식을 먹여야 하는 우석은 산토끼를 잡거나 본사에 다녀올 시간이 없었다. 암자 뒤 음식 저장 토굴에 지난 가을 주워 모은 밤하고 말린 능이가 떠올랐다. 그거라도 가져다가 손질해서 잘게 잘라 죽에 넣었다. 

우석이 끓인 죽을 쟁반에 받쳐 들고 부엌을 나오니, 아이가 툇마루에 앉아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 우석을 보더니 아이가 크림 묻은 얼굴로 히히 웃었다. 우석이 쟁반을 놓고 달려가 아이를 케이크에서 떼어내며 말했다.

“왜 이 차가운 걸 먹니. 어서 죽 먹자. 넌 지금 더운 걸 먹어야 해.”

아이는 케이크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난감했다.

“그럼 이걸 따뜻하게 해 줄게. 따뜻하게. 조금만 기다려 주겠니?”

아이에게 케이크를 떼 내려 하니 우석의 손을 밀어냈다. 아무리 달래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불안했지만 아이에게 케이크를 안겨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에게 따뜻한 죽을 먹이면서 차가운 케이크를 함께 먹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아이는 케이크를 먹게 해 준다면 죽도 먹어줄 수 있는 아량을 보였다.     



3

아이 가족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해봤지만 봄이 오도록 아이를 찾는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아이 건강에 이상은 없었다.

‘까치가 반가운 걸 물고 오려는구나.’

입적하시기 전날 큰스님은 도대체 어떤 예지력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우석은 큰스님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너는 개시허망(皆是虛妄)이라는 말을 믿지 말거라. 그 말이야말로 허망한 거다.’

큰스님은 우석 앞에서 불가의 진리를 부정해버렸다. 큰스님이 어째서 그런 놀라운 말을 했는지 우석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우석은 구족계(具足戒)를 받지 않았다. 본사 강원에서 공부하던 3년 전에 심부름을 왔다가 큰스님 홀로 계시던 암자에 눌러앉게 되었다.

“너는 거기서 공부를 왜 하느냐?”

“당연히 비구(比丘)가 되려는 거지요.”

“그건 돼서 뭐 하려고?”

“수도를 하면서 중생제도를.....”

“그런 건 해서 뭐 하려고?”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아무래도 큰스님 질문을 종일 받아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물었다.

“큰스님 생각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거야 간단하지. 나하고 있으면 당장 중놈으로 인정해줄 테고, 그 어지러운 공부 안 해도, 내가 더 높은 견식과 덕목을 가르쳐 줄 텐데, 그깟 강원에서 뭘 배울 게 있다고 그 고생을 하느냐? 어디 가서 내 시봉 수좌라고 하면 넌 아마 죽을 때까지 사람들한테 대접 좀 받을 거 아니겠느냐.”

“큰스님께서는 시봉 스님을 들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가요?”

“이놈아, 네가 보기엔 내가 아무 시자 놈을 들일 사람으로 보이느냐?”

“그럼, 제가 그 아무나가 아니란 말씀인가요?”

“길게 말할 것 없다. 당장 네 법명을 내려주마.”

그러더니 큰스님은 붓을 들어 ‘愚石’이라고 썼다. 

우석이 사미계를 받을 때 함께 받은 법명이 따로 있다는 걸 큰스님이 모를 리 없건만, 큰스님은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우석의 법명을 새로 지어버렸다. 우석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왜 하필 어리석은 돌인가요?”

“네 눈엔 이 글자가 그렇게 보이느냐?”

“그럼, 큰스님 눈엔 어떤 글자로 보이십니까?”

“내 눈엔 육조(六祖) 혜능선사께서 등에 지고 있는 우직한 돌이라는 글자로 보이느니라.”

당나라 때 오조(五祖) 홍인화상과 칠백 제자가 기거하는 절 방앗간에서 덩치 작은 나무꾼 노 씨는 돌을 지고 8개월간 디딜방아를 찧었다. 그러고 나서 단박에 진리를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홍인화상으로부터 의발을 전해받아 육조가 되었다는 그 혜능. 죽을 때까지 문맹이었어도 오랜 불교사에 전설이 된 그 사람. 

우석은 큰스님이 내린 법명을 무릎 꿇고 받았다.     


내 눈엔 육조(六祖) 혜능선사께서 등에 지고 있는 우직한 돌이라는 글자로 보이느니라


아이는 듣지 못하는 장애 때문에 말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우석의 마음을 읽듯 눈치가 빨랐다. 장애는 의사소통에 문제 되지 않았다. 더구나 늘 밝고 무엇이든 잘 먹었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도 아이는 엉뚱한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그뿐이었다. 단지 고집이 셌다. 새끼손가락을 걸며 아이를 달래야 하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지게를 찾으러 가던 날, 아이는 그 춥고 눈 쌓인 산속을 끝내 따라나섰다. 그날 우석은 지게에 장작을 지고도 아이를 안은 채 산에서 내려와야 했다. 마치 오래도록 함께 지낸 아이처럼 법당이든, 부엌이든, 마당이든, 졸졸 따라다녔다. 고집을 강제로 꺾으려 들지만 않으면 그 작은 얼굴에 제비꽃 같은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4

동배 스님이 찾아와 본사 주지 스님이 부른다는 말을 전해왔다. 큰스님 입적 후 주지가 찾는 것은 처음이었다. 우석은 예감이 좋지 않았지만, 아이를 데리고 주지 방으로 들었다. 그 방엔 도감(都監)스님도 함께 앉아있었다.

“그 아이를 아직도 데리고 있느냐.”

주지와 도감의 엄한 기색을 보자 아이가 등 뒤로 쪼르르 돌아가 턱을 우석의 어깨 위에 얹어 놓았다.

“아직 부모가 나타나질 않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할 작정이야. 넌 아직도 강원 이수를 못 하지 않았느냐.”

“큰스님께서 법명을 내려주셨습니다.”

주지와 도감이 마주 보며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도감이 말했다.

“그렇다고 네가 구족계를 받았다고 믿는 건 아니겠지?”

높은 암벽처럼 싸늘한 기운이 몰려왔다. 큰스님은 당신이 입적한 후 벌어질 이런 일에 대해 어떤 언질도 주지 않았다. 

우석이 머리를 숙이고 말했다.

“큰스님께서는 제가 시봉 수좌라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이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자 아이가 얼른 우석의 등으로 얼굴을 붙여왔다. 아이도 앞에 앉은 두 사람이 무서워진 것이다. 우석이 내려앉는 심장을 추스르려 애쓰는데 주지가 말했다.

“딴소리하지 말고, 절로 내려와 강원교육을 받도록 해라. 아이를 보낼 곳은 우리가 알아보겠다.”

우석이 고개를 들었다.

“아이를 어디로 보낸다는 말씀입니까?”

“가족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디 시설이 있을 것 아니냐. 아이를 맡아 기르는 시설 말이다.”

우석이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이 아이는 가족을 찾을 때까지 제가 데리고 있겠습니다.”

이번엔 도감이 나섰다.

“저, 저런 놈 보게나. 제 앞가림도 못하는 놈이 절에서 무슨 아이를 키운다는 말이냐. 더구나 여자아이를 말이다.”

“그러니 제가 아이 가족이 나타날 때까지 암자에서 데리고 있겠다는 말씀입니다. 허락해주십시오.”

“거기가 네 집인 것처럼 말하는구나. 넌 수도를 하려고 절엘 들어왔느냐, 아니면 아이를 키우려고 들어왔느냐.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를 지껄이거라.”

따지고 보면 그들 말은 틀리지 않았다. 비구들 절집에 여자아이를 키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아이 가족이 여태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앞으로도 찾을 길이 희박하다는 의미 아닌가. 하지만 우석은 아이를 이렇게 보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자기주장의 명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불가항력의 오라를 어떻게든 풀고 싶지만, 힘없음이 안타까웠다. 고개 숙인 우석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면서 눈물이 솟구쳤다. 그러자 아이도 울었다. 처음 보는 아이 눈물이었다. 우석이 돌아앉아 아이를 달래는데, 주지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를 보낼 시설이 정히 걱정이라면 이 아이를 맡아 줄 어디 비구니 스님들이라도 알아보마. 그러니 너는 아이와의 인연에 집착하지 말거라.”     



5

암자로 올라가는 동안 등에 업힌 아이는 다시 밝아졌다. 우석의 민머리를 쓰다듬거나 귀를 잡아당기며 까르르 웃었다.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들꽃을 보고는 따달라 보채기도 했다. 그 해맑은 웃음이 우석의 가슴을 찔러댔다. 

어떻게 하면 이 아이를 보내지 않을 수 있을까.....그런데, 큰스님은 까치가 반가운 걸 물어온다고 하셨는데, 그 반가운 게 뭘까. 

우석은 큰스님이 아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믿어왔다. 우석에겐 이미 아이에 대한 책임감이 무거워졌다. 그것은 깊은 우물처럼 신비롭게 빠져드는 감정이었다. 그렇지만 이 작은 아이와의 인연은 고통으로 끝날 처지가 되었다. 

이 아이를 시설이나 비구니 스님들에게 보내놓고 참다운 수도 생활에 전념할 수 있을까. 

우석은 그럴 자신이 없었다. 

큰스님은 까치가 물어올 것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신 걸까. 

그 어느 것도 우석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저 하늘을 쳐다보며 마음속 간절히 외칠 뿐이었다.

‘큰스님 저 좀 도와주세요. 우리 좀 도와주시라구요.’

큰스님은 야속하게도 여전히 웃는 낯으로 다가왔다.    


 

암자에 들어서니 장작 패던 마당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법당문과 방문, 부엌문들도 열려 있었다. 법당 안을 들여다보니 거기도 깨끗하게 치워지고 향과 초가 새것으로 바뀌었다. 법당 툇마루 한쪽으로 가방 위에 여성용 코트와 머플러가 얹혀있고, 그 옆에 놓인 붉은 양산이 그제야 눈에 띄었다. 우석은 밀려드는 내면의 파고를 어떻게든 잠재우려 애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이를 내려놓고 법당으로 들어가 무릎 꿇고 앉았다. 조금 있으려니 밖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아주 예쁜 아이네? 이렇게 예쁜 공주님이 어디서 오셨을까.”

법당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에 낯익은 후각의 느낌이 실려 왔다. 우석에겐 두렵도록 가슴 뛰는 냄새였다. 일어서 돌아보니, 여자가 법당 툇마루에 앉아 아이를 안고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큰스님 다비식 때 마지막으로 본 여자는 이제 암자에 오지 않을 줄 알았다. 큰스님 법문을 듣기 위해 이 높은 산 중 암자를 찾아오던 여자가 이젠 올 일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눈이 녹고 봄이 오니 여자가 다시 암자를 찾아왔다. 

아이는 여자에게 안긴 채 얌전했다.

우석은 말없이 합장 인사를 하고 나서 헛간으로 들어가 지게를 지고 나왔다. 여자는 리본 달린 머리핀을 아이 머리에 꽂아 주고는 손거울을 함께 보며 웃고 있었다. 그 웃는 얼굴에 진한 향이 묻어났다. 고개 숙인 우석이 그 앞으로 가 말했다.

“나무를 좀....”

우석 입에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여자는 마치 허물없는 가족처럼 웃는 낯으로 말했다.

“네, 그러세요. 저는 아이 목욕 좀 시켜야겠어요.”

그 눈빛을 피해 우석이 지게를 지고 산으로 올라가는데, 아이도 따라올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함께하는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이는 여자에게 안긴 채 우석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슬며시 서운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법당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에 낯익은 후각의 느낌이 실려 왔다


6

우석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산을 일찍 내려가기에는 도저히 내키지 않았다. 여자와 마주 앉는 일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늦게 내려가면, 그렇지 않아도 일찍 내리깔리는 산속의 저녁 길로 여자 혼자 돌아가야 한다. 큰스님 계실 땐 생각지도 않은 일이 이젠 큰 문제가 된 것이다.

그런데 어찌 큰스님도 안 계신 암자를 찾아왔을까. 혹시 아이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까. 

그러고 보니 여자가 아이에 관해 묻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우석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이 소문이 여자에게 전해질 리 만무했다. 이 깊은 산 중의 일을 도심에 사는 여자가 어찌 알겠는가.

큰스님 자취가 그리워서 한 번 와봤겠지.

우석은 여자와 큰스님이 나누는 대화를 들은 적이 있었다. 숲에 쓰러져 있는 큰 나무를 발견하고 톱을 가지러 암자로 다시 내려갔던 날이었다.

“제가 어떻게 그분을 신랑으로 모실 수 있겠어요.”

큰스님 방에서 들려온 여자 목소리에 이어 큰스님이 목청을 높였다.

“아, 글쎄, 저놈은 중 될 놈이 아니라니까. 그쪽도 저놈이 싫지 않은 걸 내가 모를 줄 아남?”

“아이, 싫고 좋고가 어딨어요. 큰스님도 참….”

“저놈이 그쪽 배필감이라는 걸 일찌감치 알아보고 여기 붙들어 둔 거야. 내가 당장 저놈한테 호통을 쳐서 그쪽으로 쫓아버릴까?”

“안 돼요, 큰스님. 그럼, 제가 수도하시는 분을 억지로 끌어낸 나쁜 여자가 되잖아요.”

“하긴, 인연의 끈이라는 것이 그리 나약하지 않으니 서두를 것도 없지.”

그러면서 큰스님은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두 사람 대화를 듣고 우석은 큰스님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공부 중인 젊은 승려를 계도하기 위해 계(), 정(), 혜(), 삼학(三學)을 가르치는 것보다 탐(), 진(), 치(), 삼독(三毒)을 들어 놀려대길 즐기시더니, 아예 장가를 들이려는 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심지어 큰스님 놀림에 부아가 난 우석이 대들다시피 부정해도 안색이 바뀌지 않은 채 웃기만 하던 분이었다.  


   

우석이 나무를 지고 내려오니 암자 마당에 저녁 어스름이 드리워졌다. 지게를 내려놓고 법당으로 들어가려는데, 여자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우석이 말했다. 

“아직 안 내려가셨습니까.”

다가오는 여자 향기에 물든 저녁 바람이 우석의 몸을 휘감았다.

“아이를 혼자 놔두고 어떻게 내려가겠어요. 저녁 공양 차려놨으니 들어오세요.”

여자 목소리가 소리 없는 바람에 젖은 듯 아주 낮았다. 우석이 여자를 돌아봤다. 양손을 맞잡은 채 바라보는 여자 눈이 깊었다. 

“저는 절로 내려가겠습니다. 그럼, 아이와 함께...”

“내려가셔도 저녁 공양 시간은 지났을 거예요.”

“그래도 저는 그냥 내려가서.....”

“들어오세요.”

여자 목소리는 낮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들었다. 돌아서는 여자를 잠시 바라보던 우석은 법당으로 들어가 예불을 올렸다. 그러는 동안 수많은 상념이 들어찬 마음을 밀어내지 못했다. 

우석은 예불을 마치고 어쩔 수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가 안겨 왔다. 목욕한 뒤 말끔해진 아이는 못 보던 옷을 입고 있었다.

“스님 방에 커튼을 달아드리려고 천을 가져왔는데, 그냥 아이 옷을 만들어 입혔어요.”

그동안 아이는 겨울옷을 입고 지냈다. 봄이 왔어도 아이 옷을 장만할 겨를이 없었다. 여자는 아이가 입던 옷을 빨아 널고 급하게 옷을 만들어 입힌 것이다. 그래도 아이 옷이 고왔다.

우석이 저녁을 먹는 동안 여자는 아이에게 밥을 먹였다. 아무런 지장 없이 소통이 이루어지는 두 사람이 신기했다. 여자는 표현이 어설픈 아이 의도를 정확하게 알고 행동했다. 아이 역시 여자 눈 속에 담긴 의미를 금세 알아차렸다. 둘의 행동은 자연스러웠다. 겨우 한나절만 함께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둘을 보며 우석은 한숨을 삼켰다. 급기야 절여 오는 가슴을 안고 끝내 아이 이야기를 해버렸다.

“아이를 키워줄 사람들에게 보낸다는군요.”

여자가 행동을 잠깐 멈췄다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지난겨울 산속에 쓰러져 있던 이 아이를 데려왔는데, 아직 가족을 찾지 못했어요. 그렇다고 여자아이를 절에서 계속 데리고 있을 수도 없는 형편이니.....”

“아이를 눈 속에서 구하셨다는 이야기는 절에서 공양주 보살님들께 들었어요. 그동안 아이를 위해 절 공양간을 자주 드나드셨다는 말씀도 들었죠. 피붙이라도 그토록 눈물겨운 정성을 다하지 못할 거라는 말씀들을 하시더군요. 그런데 스님도 이 아이를.....정말 다른 곳으로 보내실 작정인가요?

아이를 바라보는 우석의 눈이 조금 흐려졌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지금 궁리 중이긴 한데......,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군요.”

식사를 마친 우석이 방을 나설 때도 여자는 표정 없는 얼굴로 아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 목소리는 낮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들었다


7

본사 동배 스님 방에서 잠을 잔 우석이 아침 일찍 암자로 올라가자 여자는 떠날 채비를 갖춘 뒤였다. 아이까지 단정하게 머리를 빗기고 어제 꽂아 주었던 머리핀까지 다시 꽂혀 있었다. 여자가 말했다.

“밤새 생각해봤어요. 우선, 아이는 제가 데리고 가겠어요.”

뜻밖에도 여자 얼굴에 자단나무처럼 곧은 결기가 서렸다. 어떤 말로도 여자를 가로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물론 여자의 결정은 다행이면서, 말로 표현 못 할 고마운 일이다. 그래도 가슴이 굉음으로 내려앉았다. 

이제 아이와 정말로 헤어지는 건가. 

우석이 아이를 쳐다보니, 아이가 샐쭉 웃으며 쪼르르 달려와 다리에 매달렸다. 그렇지만 아이는 결국 여자를 따라갈 것이다. 지난 저녁, 아이 행동을 본 우석은 그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자는 아이를 데려간다면서 ‘우선’이라고 말했다. 여자가 다가와 아이를 안아 올렸다.

“제가 엄마가 될 거예요. 그러지 않으면 후회할 거 같거든요. 하지만 아이에겐 아빠도 필요하죠.”

우석은 여자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멍하니 쳐다보자니 여자가 다시 말했다.

“큰스님 말씀이 틀리지 않네요.”

“큰스님 말씀이라니요?”

봄날의 이른 아침 산 공기가 차가웠어도 여자 얼굴에 연홍빛 물이 들었다. 

“스님과 제 인연을 말씀하신 적이 있거든요.”

여자가 가만히 우석을 쳐다보았다. 큰스님과 여자와의 대화를 우석도 선명하게 기억했다. 

하지만 그 말씀이 틀리지 않는다니?

우석이 마주 바라봐도 여자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우석이 물었다.

“우리 두 사람에게 어떤 인연이 있다는.....건가요?”

“사실은 저도 몰랐어요. 이제 큰스님은 돌아가셨고, 우리 둘만 남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그래서 무작정 와 본 거예요. 그런데.......이 아이가 나타났군요. 큰스님께서 정확히 무엇을 말씀하신 건지 어젯밤에 깨닫게 되었어요. 어차피 스님도 이 운명을 피하기 어려울 테니까.”

큰스님은 암자로 거처를 옮길 때 함께 따라가 시봉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던 젊은 스님들을 모두 물리쳤다고 했다. 그런데 그분이 처음 본 우석에게는 암자에 남으라고 강권했다. 

‘고집(苦集)이 없으면 멸도(滅道)도 없는 게야. 그러면 진리도 사라지지. 연기(緣起)를 두려워하지 마라. 세상은 어차피 중중무진(重重無盡)이니라.’

그토록 놀리시더니 무진법계의 세계를 깨닫게 하려고 그러셨던 거야. 

이제야 우석도 까치가 반가운 걸 물어올 것이란 의미와 함께, 여자 앞에 자꾸만 가슴 시렸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큰스님은 거대한 제석천의 그물망 안에서도 서로 비추는 인연을 처음부터 꿰뚫어 본 것이다.

‘너는 제망찰해(帝網刹海)를 기억하느냐.’

이토록 입적하기 전날까지도 큰스님은 그것을 이해시키려 애썼다. 우석에겐 필요 없다는 듯 금강경의 대 진리까지 부정하면서. 

여자가 코트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 건넸다.

“제 주소와 전화번호에요. 그럼 우린 이대로 내려갈게요.”

여자 목소리엔 여전히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들어있었다. 여자가 안고 있던 아이를 내려놓았다.

“우리, 가자.”

우석이 자신과 함께 가지 않는 걸 눈치챈 아이가 달려왔다. 우석이 아이를 안아 들려는데, 여자가 다가와 아이 손을 잡았다. 여자는 쪼그리고 앉아 아이 눈을 맞추며 손짓을 섞어 말했다.

“우리, 우리 먼저 가면, 나중에, 나중에 오실 거야. 나중에.”

아이가 우석의 바지를 잡아당겼다. 우석을 올려다보는 아이가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어버, 어버.” 

아이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우석은 그 간절한 눈망울을 보며 자기 손가락을 걸었다. 

햇볕이 아래쪽에서 조금씩 영접하듯 다가왔다. 여자가 일어서 우석을 잠시 바라보았다. 부드럽지만 깊은 그 눈을 향해 우석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여자가 아이를 데리고 돌아섰다. 아이는 여자 손에 이끌려 산길을 내려가면서도 자꾸만 뒤돌아보았다.     



--                    

작가의 이전글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단편소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