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서방의 바닷바람과 동방의 모래바람----패배와 질서의 두 얼굴
타렌툼 협정에서 안토니우스의 함선 지원을 받기로 한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본격적으로 해군을 재건하기 위해 아그리파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아그리파가 갈리아 평정이라는 대업을 완수하고도 일생일대의 개인적 영예인 개선식을 사양한 일은 옥타비아누스로 하여금 그를 철저히 신임하는 계기가 되었다.
해군의 전권을 쥔 아그리파는 기원전 37년 중반 무렵, 루크리누스 호와 아베르누스 호를 잇는 운하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 여름, 두 호수를 활용한 새로운 군항 ‘포르투스 율리우스’를 완공한다. 포르투스 율리우스는 바다에서 루크리누스 호로 이어지는 통로와 루크리누스 호에서 아베르누스 호로 이어지는 다중 구조 군항이었다. 루크리누스 호를 외항으로 삼은 뒤 아베르누스 호를 은밀한 후방 훈련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두 호수와 바다를 운하로 잇는 군항 체계를 마련한 것이다. ‘포르투스 율리우스’라는 명칭은 아그리파가 조성한 군항을 옥타비아누스에게 헌정한다는 의미로, 율리우스 가문의 권위를 해상전력의 기반으로 삼겠다는 상징적인 이름이었다. 이 항구는 오늘날 나폴리만 서쪽인 지금의 포추올리 인근에 자리하는 지역이다. 화산 분화로 함몰된 두 호수는 고대인들이 ‘지하 세계의 입구’라 부를 정도로 수심이 깊어서, 대형 함선들을 운용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적격지였다. 아그리파는 그 신화적 장소를 군항으로 바꾸면서 함선을 건조하고, 병사들의 훈련을 독려했다. 그는 이 시기 ‘하르팍스’라는 신형 무기도 고안해 해전의 양상을 바꾸었다. 하르팍스는 쇠사슬에 연결된 갈고리를 공성기로 발사해 적선의 돛대나 난간에 걸어 배를 나포하는 장치였다. 그렇게 아그리파는 섹스투스와의 결전을 차곡차곡 준비해 나갔다.
아그리파가 포르투스 율리우스 항 건설을 마무리해가던 시기에 안토니우스가 약속했던 동방의 함선 120척이 이오니아의 여러 항구에서 차례로 출항했다. 그리스식 장식이 달린 돛대와 시리아제 노가 달린 배들이 브린디시움으로 들어올 때, 로마인들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낯선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 배들은 카이사르 시대 이후 처음 로마로 들어오는 진짜 함대였다.
선원들이 사용하는 그리스어에는 이오니아 사투리, 안티오키아의 억양, 에게해 상인들의 욕설이 교차했다. 그 속에서 아그리파는 말없이 배를 점검했다. 그의 손끝이 돛대의 균형과 노의 각도, 그리고 선체의 갈라진 틈새들을 훑었다. 배마다 낡은 갑판 위에 대형 쇠뇌 대신 그리스식 투창기가 걸려 있었다. 아그리파는 그 모든 것을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육군 출신이지만 그는 바다에서 병사들을 훈련시켜야 했다. 그들은 오와 열을 지켜내며 방패와 창을 든 채, 세 겹으로 짜인 코호르스 전열, 즉 대열의 앞뒤가 서로를 보호하며 움직이는 로마 군단의 전후가 맞물린 중층 배열로 상대 육군을 섬멸하듯, 바다에서 적의 함대를 그렇게 맞아 싸워야 했다.
그는 함대를 나폴리 만으로 옮겨 포르투스 율리우스 해군기지의 훈련장에 배치했다. 새벽부터 호수에 내려앉는 안개 위로 노 젓는 소리와 북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아그리파의 명령에 따라 노수들은 하루 종일 노 젓는 훈련을 거듭했다. 그들은 파도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파도와 호흡을 맞추는 법을 배워나갔다.
아그리파는 말이 적었다. 그 대신 깃발과 북소리가 그의 언어였다. 함대를 움직이는 언어로 고착된 그의 신호 체계에 따라 대규모의 함선이 동시에 방향을 틀게 되었다. 그는 하르팍스라는 신무기를 통해 전혀 새로운 해전체계를 구상 중이었다.
당시의 해전은 본질적으로 파괴의 전법이었다. 적선을 뱃머리의 충각(衝角)으로 들이받아 침몰시키고, 불화살을 쏘아 돛대와 갑판을 불태우는 것이 전투의 전형이었다. 아그리파는 이 낡은 전투 양식의 한계를 꿰뚫어 보았다. 그는 적선을 부수는 대신 붙잡는 전법을 구상했다. 그가 고안한 사슬 달린 하르팍스가 날아가 적선의 돛대나 난간에 걸리면, 병사들이 일제히 끌어당겨 그 배와 밀착시킨다. 이어서 병사들이 적선 갑판 위로 뛰어올라, 육전에서 익힌 백병전으로 적을 제압하는 것이다. 해전의 양상이 충돌의 전쟁에서 제압의 전투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백병전에 익숙지 않은 적의 해군에게 이 전법은 치명적이었다. 아그리파 병사들은 이 하르팍스 갈고리를 일컬어 ‘악마의 이빨’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바다를 육지처럼 다루는 보병 논리로 설계된 해전 방식이었으며, 동시에 탁월한 지략가이자 용감한 육군 전사이기도 한 아그리파다운 구상이었다. 그는 “적선을 부숴라!”가 아니라, “적선을 나포하라!”라고 항상 강조했다. 그가 내리는 짧은 명령은 로마 해전의 전통을 바꾸었다. 포르투스 율리우스의 병사들은 점차 육군에서 해군으로 변모해갔다. 그들은 노의 박자가 군단의 행군과 다르다는 것과, 바람의 방향이 전략이 된다는 것을 배웠다.
기원전 36년 9월 3일, 시칠리아 북쪽 해안의 바다는 유난히 조용했다. 거친 파도 위를 덮은 새벽안개 저 멀리서 노꾼 지휘자의 북소리가 들려왔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함대는 항구에서 때를 기다렸다. 검은색 돛이 말아 올려진 함선에 올라탄 그의 노련한 선원들은 ‘폼페이우스의 바다’를 신으로 섬기는 사람들이었다.
한편 시칠리아 남쪽 육지에서는 레피두스가 아프리카에서 이끌고 온 군단을 정렬시켰다. 그는 표면상 옥타비아누스의 협력자로 보였지만 마음속 계산은 그와 달랐다. 그는 섹스투스가 무너지면 시칠리아의 항만과 세입을 차지할 기회가 열린다고 판단했다. 남쪽 해안을 먼저 점령하면 시칠리아의 전리품이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기대 속에 그는 아그리파와 옥타비아누스의 진영에는 끝내 합류하지 않았다.
그 맞은편, 북쪽의 나울로쿠스 만에서는 아그리파가 함대를 정렬시켰다. 포르투스 율리우스에서 단련된 노수들이 북소리에 맞춰 마지막 기동훈련을 마친 뒤였다. 그들에겐 바람의 방향, 돛의 각도, 사슬의 길이까지 모든 것이 머릿속에 축적되었다. 마치 보병군단처럼 대오를 갖춘 함대와 함께 바다도 숨을 죽였다.
옥타비아누스는 북쪽의 해전과 남쪽의 레피두스 움직임을 번갈아 살피며 승리 이후 벌어질 정치적 향방까지 머릿속에 그렸다. 섹스투스가 패하면 레피두스가 자신의 병력 규모를 내세워 시칠리아의 지배권을 주장할 수 있다는 점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그리파에게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흠결 없는 완전한 승리’를 요구했다. 이는 섹스투스 타격과 동시에 레피두스의 명분을 약화하려는 정치적 계산이기도 했다.
해가 떠오르며 쇠사슬이 빛을 받아 번쩍일 때, 멀리 적선들의 검은 돛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바람이 바뀌면서 아그리파가 북을 느린 박자로 세 번 울리니, 그의 함대가 파도를 가르며 일제히 전진했다.
새벽안개가 물결 위로 깔린 수면 위로 양쪽 함대가 서로를 향해 미끄러지듯 마주쳐 왔다. 바람은 남서쪽에서 약하게 불었고, 파도는 짧고 촘촘했다.
섹스투스의 함선들이 먼저 돛의 각도를 바꾸었다. 햇빛을 덜 받는 검은 돛은 그만큼 표적이 되지 않았다. 가벼운 선체들이 먼저 물살을 할퀴며 측면을 노리기 시작했다. 그때 아그리파가 깃발 신호로 전열을 고정시켰다. 선두의 몇 척이 속도를 떨어뜨리자, 후미가 따라붙어 길고 완만한 활모양을 그렸다. 그 활이 바다에 누워 있는 동안, 중간 열에서 북소리가 빠르게 세 번 울렸다. 그 신호는 곧 하르팍스의 준비를 의미했다. 쇠사슬을 감던 갑판 위 손들이 동시에 멈추면서 갈고리의 방향을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노수들도 숨을 길게 들이켰다. 지금부터는 힘으로 버티는 구간이었다.
남쪽의 육지에서는 레피두스가 아그리젠툼 일대를 압박하며 시칠리아 남부를 먼저 선점하려 했다. 승리가 확실해질수록 시칠리아의 ‘해방자’는 자신이라고 주장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그의 행동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이 움직임은 아그리파에게 부담으로, 옥타비아누스에게는 전투 직후의 새로운 정치적 대결을 예고했다.
잠깐 사이 바다 위 물안개를 날카롭게 베면서 섹스투스의 함선들이 좌현과 우현으로 치고 들어왔다. 말발굽처럼 빠르고 일정한 노 젓는 소리와 함께 뱃머리 충각이 아그리파 함대의 옆구리를 겨냥했다, 그 순간 아그리파의 기함에서 첫 번째 갈고리가 튀어나갔다. 공기를 가르며 날아가는 쇠사슬 소리와 잠깐의 정적 뒤에 둔탁한 격음으로 갈고리가 적선의 난간에 물어뜯듯 박혔다. 다음 순간, 하르팍스가 쏘아 올린 수많은 갈고리가 연이어 하늘을 가르며 날아갔다. 이어서 아그리파의 해군들이 힘차게 적선을 끌어당겨 아군의 배와 맞붙여 버렸다. 그러자 당황한 섹스투스의 선장들이 노를 역으로 저어 빠져나가려 했지만, 아그리파의 병사들이 먼저 함성을 지르며 적선으로 돌진했다. 순식간에 피의 살육장으로 변한 갑판 위에 비명과 무기 부딪치는 소리가 섞여 섹스투스 수병들의 처절한 영역으로 변해갔다.
같은 시간 남쪽 해안에서는 레피두스의 선봉대가 섹스투스 잔여 세력을 밀어내며 전과를 과시하려 했다. 그는 시칠리아를 실질적으로 점령하는 주력이 자신이라는 인상을 남기고자 했다. 이 야심은 해전과 나란히 두 번째 긴장 축을 만들어냈다.
아그리파의 우현 쪽에서 첫 균열이 일어났다. 섹스투스의 중장선들이 급히 방향을 틀어 나가려는 순간, 아그리파의 기동선들이 바람을 가르며 비스듬히 파고들었다. 적선들과 서로 맞닿자, 갑판이 맞물려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갈고리가 잇따라 날아가 배는 완전히 고정되었다. 이어진 금속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스스로 기수를 꺾으며 고꾸라지는 배의 그 기울어진 틈으로 아그리파 병사들이 방패를 세워 밀고 들어갔다. 바다 위의 전투는 뱃사람의 싸움이 아니라, 육지의 군단이 바다로 옮겨온 싸움터였다.
한편 중앙에서는 노 젓는 박자가 승부를 갈랐다.
아그리파가 훈련 시킨 노수들은 북소리 하나에 일제히 노를 들고 내리는 각도를 정확하게 맞추었다. 세 번의 박자 후, 하르팍스가 공중으로 솟았고, 다섯 번째 박자에 병사들이 건너갔다. 모든 동작이 군단식으로 계산되어 있었다. 그들의 리듬은 군율이었고, 그 박자는 승리의 맥박이었다.
반면 섹스투스의 노련한 수병들은 여전히 바람을 믿었다. 돛에 실린 바람을 타고 빠져나가려 했지만, 그 순간의 바다는 너무도 고요했다. 그 반 박자의 공백과 한순간의 정적에 그들이 꼼짝없이 묶여버린 것이다. 돛이 무게를 잃으면 노 젓는 힘만으로 하르팍스의 끌어당기는 힘을 거스를 수 없었다. 그들 함선이 모래 위의 수레처럼 둔해질 때 아그리파의 사슬이 그 틈을 물고 놓지 않았다.
함대의 좌익에서도 격전이 벌어졌다.
거대한 충각을 자랑하는 섹스투스의 대형 함선들이 아그리파 함대를 겨누며 달려들었다. 파도가 일렁이며 높이 솟은 물기둥이 햇빛을 삼켜버렸다. 그러나 충돌 직전, 아그리파의 함선이 요란한 북소리와 함께 한 치를 비켜서면서 헛되이 옆으로 미끄러져 나가는 그 배 위로 여지없이 ‘악마의 이빨’이 날아들었다. 이윽고 아그리파의 병사들이 고삐를 잡아당기듯 사슬을 감아올릴 때, 적선의 갑판으로 뛰어든 방패벽이 육지의 군단처럼 진형을 폈다.
바다는 이제 기동의 영역이 아니라 ‘붙잡는’ 쪽이 이기는 싸움으로 바뀌어 갔다. 동트면서 불붙었던 치열한 전투 끝에 정오 무렵부터 결국 섹스투스의 우익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흩어진 함선들이 각자 살길을 찾아 나오려 해도 사슬에 묶인 전선들이 그들의 퇴로를 가로막았다. 놓치지 않으려는 쪽과 벗어나려는 쪽이 갑판 위에 얽히면서, 비명과 파도 소리가 섞여 바다를 뒤덮었다.
육상 기지의 높은 둔덕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이 모든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순간 그는 전투의 결말이 곧 레피두스와의 정치적 대결로 이어질 수 있음을 명확하게 인지했다. 섹스투스의 패배가 결정되는 즉시, 다음 단계는 레피두스의 요구와 이를 제압해야 하는 수순이 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해상 지휘를 아그리파에게 맡겼으면서도 해전의 흐름을 주시하며, 필요할 때마다 곁에 선 기수들을 통해 전투 이후의 대응을 염두에 둔 지시를 전달했다.
지중해의 변화무쌍한 바람이 오후가 되어 다시 바뀌었다.
섹스투스의 잔여 함대가 바람을 타고 후퇴하려는 순간, 아그리파가 함대 좌익을 길게 늘여 그들을 가로막으면서 수많은 하르팍스의 쇠사슬이 빗발쳤다. 도주하던 적선 몇 척이 갈고리에 잡히면 뒤따르던 배들도 서로 엉켜 난파의 사슬로 변했다. 그래도 그 와중에 검은 돛 몇 척이 수평선 저편으로 사라졌다.
이윽고 아그리파가 기함의 난간에 서서 손을 들자, 그의 장교들이 북을 울리면서 함대의 움직임이 일제히 멈추었다. 함성이 멎고 고요를 찾은 바다에는 부서진 노와 깨진 돛대, 그리고 떠오르는 시체들로 뒤덮였다. 포로가 된 수병들이 무릎 꿇은 갑판 위로 피 섞인 분홍빛 파도 거품이 쓸고 지나갔다.
조용해진 바다 위로 마지막 쇠사슬이 덜컥 소리를 내며 감길 때, 멀리 육상 둔덕 위에 옥타비아누스의 깃발이 천천히 올라갔다. 승리의 신호였다.
그 시각 남쪽에서 레피두스의 깃발도 높이 올랐다. 그는 병사들 앞에서 시칠리아가 자신의 몫이라고 선언했다. 이 소식이 곧바로 옥타비아누스에게 전달되었을 때, 그는 지체하지 않고 레피두스의 진지로 향했다. 이때 레피두스는 군단을 앞세워 자신이 공동 승리자이자 섬의 지배권을 주장할 위치에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시칠리아를 속주로 삼으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으면서 서방에서의 영향력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 순간 옥타비아누스는 레피두스의 병사들 앞에서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연설했다. 레피두스가 협력의 이름으로 움직였지만 실제로는 전쟁을 독점하려 했다는 점, 삼두가 모두 참여하지 않았기에 로마의 이름으로 수행된 전쟁이라 부르기 어렵다는 점, 그리고 실질적 승리는 아그리파의 해군과 옥타비아누스의 병력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이 군단병들 앞에서 분명하게 제시되었다. 이 연설이 병사들의 마음을 흔들면서 이탈의 조짐은 곧 현실이 되었다. 레피두스의 군단병들이 하나둘 옥타비아누스의 진영으로 이동했다.
결국 레피두스는 속주 통치권을 포기하는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카이사르가 맡고 있던 최고 제사장직을 암살 이후 이어받았던 그였다. 종신직인 그 지위만 남겨둔 채 정치적 은둔으로 밀려나는 처지가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길이 되었다. 그날 해가 기울 무렵까지 바다는 본래의 색을 되찾지 못했다. 섹스투스의 몰락과 함께 레피두스의 정치적 생명도 사실상 끝난 날이었다. 결국 로마의 곡물 길이 되돌아오면서 시칠리아의 곡창지대와 함께 로마의 권력도 되돌아왔다.
타렌툼 협정이 체결된 뒤, 안토니우스는 잠시 평화를 믿었다. 그는 약속대로 함선을 옥타비아누스에게 넘겨주었고, 그 대신 옥타비아누스가 보내주기로 한 베테랑 병사들의 증원을 기다렸다. 그러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옥타비아누스는 내전의 잔불을 수습한다는 명목으로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그 침묵은 명백히 계산된 것이었다. 그는 이제 동맹의 균형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로마의 제도와 민심을 장악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반면 안토니우스는 자신이 ‘동방의 군주’라는 낙인 속에 고립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협정의 균열은 실상 정치적 분리의 서막이었다. 그때부터 안토니우스의 감정은 복잡하게 뒤섞였다. 배신감, 경계심, 그리고 무엇보다 명예를 되찾고자 하는 욕망이 앞섰다. 그는 로마에서의 불신을 단 한 번의 압도적 승리로 씻어내려 했다. 그가 파르티아에서 카이사르가 계획했던 미완의 원정을 완수한다면, 옥타비아누스와의 권력 균형은 다시 복원될 것이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7년 가을,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안티오키아로 소환했다. 이 만남의 목적은 다가올 파르티아 원정을 감당할 재정과 보급망의 완전한 확보였다. 안토니우스는 이미 동방 속주의 여러 나라에서 지원을 약속받았지만, 아직도 재원과 물자는 턱없이 부족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자금과 선박, 곡물 수송망을 원하는 안토니우스의 요구를 승낙했다. 그 대가로 그녀는 동방에서의 정치적 보장을 요구했다. 이 협상은 군사 원조를 넘어 로마의 전쟁에 이집트의 이해관계를 결합하는 계기가 되었다. 안토니우스에게 이 결단은 불가피했다. 로마의 신뢰를 잃어가던 그에게는 이집트의 자원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준비가 마무리된 기원전 36년 봄, 안토니우스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를 출발했다. 그의 뒤에는 16개 군단의 대규모 중무장 보병 전력과 1만 명의 기병, 그리고 동맹국의 보조병이 따랐다. 로마 시민들에게는 복수와 명예의 전쟁이었지만, 그 자신에게는 그것이 정치적 재기의 도박이면서, 제국 내 입지의 시험대였다.
이때 아르메니아 왕 아르타바스데스가 안토니우스와 손잡은 것은, 힘이 아닌 정치적 고려의 결과였다. 파르티아 왕 프라아테스 4세가 유프라테스 동쪽에서 세력을 다지는 동안, 아르메니아는 북쪽 산악 경계에 눌려 침묵의 균형을 유지해 왔다. 서쪽으로는 로마의 압력이, 동쪽으로는 파르티아의 응시가, 그리고 남쪽에서는 메디아 아트로파테네라는 경쟁 왕국의 변덕이 그의 목을 조여 왔다. 아르타바스데스는 로마의 대군이 동방으로 향하자, 최소 비용으로 최대 안전을 확보하려는 생존 전략을 택했다. 그는 안토니우스에게 길과 짐수레, 안내자와 기병을 약속하는 대신, 원정이 성공하면 영토 조정과 왕권의 승인을 얻어내려 했다. 로마가 이길 때는 로마의 동맹으로, 로마가 흔들릴 때는 파르티아의 이웃으로, 그의 동맹은 언제든 철수의 여지를 남겨둔 동맹이었다.
행군로는 산악을 가르는 길로 잡았다. 메소포타미아의 넓은 평야를 정면으로 건너면 파르티아 기병에게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안토니우스는 아르메니아 고원을 타고 내려와 메디아 아트로파테네의 수도 프라스파를 기습 점령한 뒤, 거기서 보급을 보강해 동심원처럼 파르티아의 심장부로 파고들 계획이었다. 그는 공성 병기와 식량, 화살과 예비 무기로 가득 찬 거대한 공성대를 따로 편성해 주력군의 후위에서 따라오게 했다. 주력은 속도를, 공성대는 안전을 택한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빈틈이 없었다.
그러나 파르티아의 기습은 그 빈틈을 정확히 노렸다. 그들은 전면적인 결전을 피하면서, 모래와 바람의 무기, 즉 말과 활을 앞세운 빠른 속도전을 이용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낮에 그들은 먼지구름 너머에서 갑자기 나타나 원형으로 에워싼 뒤 화살을 퍼붓고는 사라졌다. 해 질 무렵엔 사막에 늘어선 채 천천히 물러나며 로마군의 추격심리를 자극했다. 그런 다음 어둠이 깔리면 측면의 낮은 고개를 돌아 후방의 보급대를 공격했다. 이른바 가장 느리고 가장 비싼 표적인 ‘공성대’를 찾아내기 위한 유인과 차단의 연속 작전이었다.
로마 보병군단의 심층 코호르스 전열이 정면충돌에는 철벽이었으나, 그 완벽한 대열조차 보급선의 길이만큼은 방패로 가리지 못했다.
결정타는 공성대를 노린 습격이었다. 공성대를 호위하던 부대가 고원 능선의 완만한 굽이를 도는 순간, 파르티아 기병이 사선으로 파고들어 선두와 후미를 동시에 깨뜨렸다. 앞선 수레들이 뒤엉키자 진로가 막히면서 말들이 하얀 김을 내뿜는 그 몇 분 사이에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로마 보급병과 공성대 호위병들은 수레를 뒤집어 임시 보루를 만들었으나, 일시적 후퇴와 재집결, 재돌입으로 이어지는 파르티아군의 박자감 살린 타격 앞에 방어선이 조각나버렸다. 이때 수레에 실린 투석기 부품과 공성 사다리가 불탔고, 곡물 자루들이 터지며 모래 위로 흩어져버렸다.
안토니우스는 그제야 작전 계획이 어긋났음을 깨달았다.
공성 무기를 잃으면 성을 공격할 수 없고, 그것은 메디아 아트로파테네의 견고한 수도 프라스파 공략이 가능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이제 안토니우스 군단의 산악을 이용한 진격은 곧 위험한 노출 행군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아르메니아 왕인 아르타바스데스가 바로 그때 “길의 안전이 담보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병을 거두어 가버렸다. 로마가 이기면 돌아오고 지면 떠난다는 냉혹한 방침을 이번에는 그가 노골적으로 실행했다. 동맹의 사라짐은 곧 현지 보급의 붕괴를 의미했다. 길잡이와 말, 창고와 징발권을 제공하던 왕의 그늘이 걷히자 로마군은 낯선 산악에서 완전히 고립되었다.
이후의 몇 주는 기습과 회피의 연속이었다. 파르티아의 말발굽은 끝없는 원을 그리며 로마군의 측면과 후방을 공격해 들어왔다. 로마군은 방패를 들어 머리 위를 덮으면서 거북이처럼 뭉친 방진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러나 전열을 지킬수록 속도는 느렸고, 속도가 느릴수록 물의 소비가 늘어났다. 샘과 웅덩이는 지리에 훤한 적이 이미 차지해버려 군단은 점점 추격에 응할 기력을 상실해갔다.
전투는 어느새 공격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이동으로 바뀌었다. 이때의 상황을 플루타르코스는 이렇게 적었다.
“그들은 더 이상 승리를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단지 죽지 않기 위해 고투했다. 전투가 아니라 굶주림과 목마름, 그리고 끝없는 행군이 그들의 목을 조여왔다.”
마침내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침공이라는 거대한 전략의 방향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프라스파 공략을 포기하고, 남은 병력과 함께 결국 귀환을 결정했다.
보급선이 끊기자 군단은 사막에 갇힌 섬처럼 고립되었다. 그리고 아르메니아 기병이 퇴각한 고원의 빈자리는 파르티아군의 화살로 덮여버렸다. 굶주림이 명예를 잠식하고, 무너진 동맹으로 군단의 침묵이 이어질 때, 뒤돌아본 고원에는 바람에 흩어지는 연기와 배신의 기류가 안토니우스의 눈에 어른거렸다.
기원전 36년, 나울로쿠스 앞바다는 ‘바다의 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버렸다. 그리고 전투가 끝났을 때, 그가 자랑하던 수백 척의 함대는 좌초되거나 나포되어 버렸다. 섹스투스는 몇 척의 경선을 이끌고 밤바다를 빠져나왔다. 이제 바다는 그의 제국이 아니라 도주의 길일 뿐이었다.
이탈리아 남단의 해안선을 따라 동쪽을 향하며 그는 칼라브리아와 브루티움의 작은 포구들을 뒤졌다. 잔당을 모으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미 옥타비아누스의 장군들인 칼비시우스와 스태틸리우스 타우루스가 시칠리아를 봉쇄해버렸다. 로마 국고의 표식으로 봉인된 항만의 창고들은 섹스투스라는 이름의 소멸을 선언했다. 곡물 운송을 담당하던 선주들도 그와 위험 프리미엄을 흥정하지 않았다. 섹스투스는 방향을 바꾸어 이오니아해를 가로질러 그리스로 향했다. 그는 동방의 인맥이었던 안토니우스의 속주와 항만을 마지막으로 기대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아직 희망이 남아 있었다. ‘폼페이우스’라는 이름의 상징성인 아버지 ‘마그누스 폼페이우스(Magnus Pompeius 위대한 폼페이우스)’는 여전히 병사와 시민에게 뚜렷한 기억으로 새겨져 있었다. 만일 항구 하나, 조선소 하나, 조달 창구 하나만 확보할 수 있다면, 그는 다시 바다의 지배자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그를 맞이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파르티아 침공이 실패로 막을 내리고 귀환길에 오른 지금, 섹스투스라는 위험한 존재는 옥타비아누스와의 새로운 충돌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동방의 모든 항만은 섹스투스에게 입항 허가를 거부했다. 섹스투스의 선단은 지도에 없는 정박지만을 찾아 헤매야 했다.
그때 안토니우스 휘하의 지휘관이자 소아시아 방면의 실무 책임자였던 푸블리우스 티티우스가 움직였다.
티티우스는 기원전 43년, 호민관으로 재직하던 시절 ‘티티우스 법’을 통과시켜 제2차 삼두정을 법적으로 성립시킨 인물이었다. 이후에는 안토니우스 진영으로 들어가 동방의 행정을 맡았지만, 파르티아 원정의 실패로 주군의 운이 기울자, 그의 관심은 다시 서쪽의 옥타비아누스로 옮겨갔다. 그가 섹스투스의 체포에 나선 것은, 이렇듯 기회적인 심리의 결과였다.
티티우스는 섹스투스의 평판이 아직도 높은 도시들에 먼저 서신을 돌렸다. 그 서신을 통해 그는 섹스투스를 맞이하거나 숨기는 자에게는 로마의 분노가 뒤따를 것임을 경고했다. 이어서 움직임을 드러내지 않고 부대를 해안 멀리 배치해 해안선에 군사의 자취를 지워냈다.
기원전 35년 초, 섹스투스는 레스보스섬의 미틸레네 근방으로 간신히 도피했다. 폭풍이 지나간 뒤의 그 섬에서 그는 소수의 호위대와 함께 은닉할 작정이었다. 바다는 조용했고, 모래톱에는 사람 흔적이 사라졌으며, 그 고요가 섹스투스에게 안전하다는 착각을 갖게 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작은 배를 몰아 해안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가 뭍으로 올라온 순간, 모래 언덕 뒤에 숨어 있던 티티우스의 병사들이 돌진해 나와 어렵지 않게 체포했다.
티티우스는 그를 로마로 호송하지 않고, 재판도 없이 처형해버렸다. 폼페이우스 가문의 마지막 남자이며 한때 ‘바다의 신’이라 일컫던 자의 죽음은 이렇듯 공허했다.
섹스투스의 삶은 여기서 끝났지만, 그의 기능은 로마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았다. 그는 내전 시대 바다 위에 이룬 자치의 상징이며 공화정의 마지막 잔광이었다.
섹스투스가 무너진 후, 옥타비아누스는 곧바로 시칠리아와 사르데니아의 파괴된 항만을 복구하고, 세금 징수권을 로마 국고로 환수했다. 또한 전쟁으로 폐허가 된 농토를 다시 경작지로 등록함으로써 농민과 퇴역 병을 동원해 지중해 남부의 생산망을 복원했다. 로마의 권력은 처음으로 군사와 행정, 재정이 일체로 움직이는 체제로 바뀌어 갔다. 곡물의 유통과 조세의 흐름이 한 사람의 명령으로 통제되자, 로마 시민은 비로소 안도했다.
그의 명예는 승리의 환호보다 행정의 효율 위에 세워졌다. 원로원은 그를 맞이하기 위해 사절단을 꾸렸고, 모든 군단은 그를 ‘임페라토르’로 추대했다. 하지만 그는 영예를 독점하지 않았다. 승전의 공은 아그리파에게, 내정의 실무는 마에케나스에게 돌렸다. 이후로도 모든 결정을 본인이 내리면서도 실행은 그들에게 위임했다. 그는 이렇게 전면에 나서지 않고도 모든 공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구조를 만들었다. 일찍이 그가 배운 것은 전쟁이 아니라 통치의 기술이었다.
그는 곧 토지 분배에 착수했다. 시칠리아와 캄파니아의 농토 일부를 몰수해 베테랑에게 나누어 주면서, 병사들의 충성심을 토지라는 물적 기반 위에 세웠다. 지주들의 불만이 터졌을 때, 마에케나스는 이를 보조금으로 무마했다. 이렇게 모든 불만이 제도 속으로 흡수되면서, 전쟁의 피로조차 행정으로 봉합했다. 해군의 선박 운용 또한 군사 명령이 아닌 행정 명령서로 기록했다. 이때부터 로마의 전쟁과 평화는 이제 원로원의 토론이나 장군의 결단이 아니라, 통치자가 서명하는 명령서 한 장으로 결정되었다.
이 변화의 배경에는 공화정 말기 로마가 오래도록 안고 있던 조세 구조의 불안정에서 오는 재정문제가 놓여 있었다.
공화정 체제에서 세금은 일관된 국가 재정이 아니라, 속주와의 거래, 전쟁의 결과에 따라 유입되는 수입에 가까웠다. 이탈리아 본토의 로마 시민은 직접세를 면제받았기에 재정의 상당 부분은 속주에서 거둔 관세와 공납, 그리고 전쟁이 끝날 때마다 들어오는 전리품에 의존했다. 문제는 내전이 반복되면서 이 전통적인 수입원이 동시에 흔들렸다는 점이었다. 속주는 전쟁터가 되었고, 상업로는 끊겼으며, 징세권을 임대한 민간 세금 징수인들의 횡포는 통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치달았다.
이런 조건에서는 원로원의 결의만으로 군단을 유지하고 곡물을 공급하는 일이 점점 불가능해졌다. 군대는 상시로 급료를 요구했고, 로마의 도시들은 매년 정기적인 곡물 배급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상태로 변해 있었다. 공화정의 조세 체계는 본래 ‘전쟁이 끝난 뒤’ 작동하도록 설계된 구조일뿐, ‘내전이 상시화된 상태’를 떠받칠 수 있는 장치는 아니었다. 그 공백을 메운 것이 바로 옥타비아누스의 방식이었다. 그는 세금을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조세가 흘러들어오는 지점을 군사 배치와 겹쳐 놓음으로써 재정을 통제했다. 어느 속주에서 얼마나 들어오고, 그 수입이 어느 군단과 어느 항구를 거쳐 로마로 연결되는지가 하나의 체계로 묶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조세는 원로원의 추상적 권한이 아니라, 병력과 곡물의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행정 명령의 일부가 되었다. 공화정 말기의 세금 문제는 누가 군대를 먹이고, 누가 도시를 유지하며, 누가 제국의 공간을 체계적으로 묶을 수 있는가, 라는 통치의 문제로 변해 있었다. 옥타비아누스가 장악한 것은 세금이 작동하는 경로 그 자체였다.
도시 로마의 곡물 배급 역시 이 조세 재편의 한가운데에 놓였다. 공화정 시기의 곡물 분배는 정치적 약속이자 임시 처방에 가까웠다. 흉년이나 전쟁의 불안이 닥치면 특별 조달이 이루어졌기에 전쟁이 끝나면 다시 느슨해졌다. 그러나 내전이 상시화되면서 이런 방식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다. 곡물은 매년, 정기적으로, 실패 없이 도시에 도달해야 했다. 이를 떠받칠 재정 또한 안정적으로 확보되어야 했다. 이 요구는 원로원의 결의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었다.
이 지점에서 옥타비아누스는 곡물과 세금을 하나의 행정 경로로 묶었다. 이집트와 아프리카, 또는 그 외의 수입처에서 출발한 곡물은 항만과 창고, 배급 지점을 따라 유통되도록 재편되었다. 그 과정에 필요한 비용은 관세와 공납, 그리고 새로 정비된 간접세 수입으로 충당되었다. 곡물은 더 이상 호민관의 선동이나 민회의 요구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행정 명령에 따라 이동해서 군사 보호 아래 도시에 도착했다. 이 체계가 유지되는 한 로마의 군중은 굶주리지 않았으며, 군단은 급료를 받았다.
이 변화는 조세의 기능 전환에 가까웠다. 세금 문제는 결국 제국의 공간을 안정적으로 연결하는 윤활유가 되었다. 군사 배치와 곡물 유통, 조세 수입이 같은 도표 위에 놓이면서, 통치는 논쟁보다는 관리의 문제가 되었다. 공화정이 오랫동안 분리해 두었던 영역들이 이때 하나로 겹치면서 그 위에 새로운 체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행정적 통합은 곧 조세 제도의 성격 변화를 요구했다. 공화정 시기의 재정은 전쟁과 속주 수탈에 기대어 움직였고, 시민 사회 내부에서 안정적으로 반복되는 수입원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군단의 상시 유지와 이탈리아 도시들의 정기적 곡물 배급이 제도화되면서, 일회성 전리품이나 임시 공납만으로는 이 체계를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 필요한 것은 시민 사회 안에서, 비교적 저항 없이,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재정이었다.
이 요구에 대한 해답으로 등장한 것이 재산 상속과 노예의 해방이라는 지점이었다. 재산이 이전되는 순간, 혹은 노예가 법적 지위를 바꾸는 순간은 개인의 삶에서는 중대한 사건이지만, 공동체 전체의 저항을 불러일으키기에는 가장 부담이 적은 시점이었다. 재산 상속세와 노예의 해방세는 새로운 세금이라기보다, 이미 존재하던 사회적 관행에 국가가 개입한 형태였다. 살아 있는 시민에게 직접 부과하는 세금은 여전히 꺼려졌지만, 재산의 이동과 신분의 변화에는 공적 부담을 붙일 수 있었다.
이 조세들은 명목상으로는 제한적이었고, 공화정의 전통과도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 효과는 분명했다. 재정은 더 이상 전쟁의 결과에만 의존하지 않게 되었고, 국가가 시민 사회 내부의 경제 흐름에 상시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통로가 열렸다. 군단의 급료와 퇴역 군인의 보상은 이제 일시적 정치 결의가 아니라, 제도화된 수입을 통해 유지될 수 있었다. 공화정 말기의 조세 문제는 이 지점에서 처음으로 ‘관리 가능한 재정’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군단의 배치와 곡물 유통망을 한 지도 위에 그렸다. 사실 군단과 세금이 겹치는 그 도면이야말로 그가 계획한 새로운 통치방식이었다.
나아가 그는 원로원 보고 절차를 단축시켰다. 그의 모든 명령은 ‘비상대권’이라는 명목으로, 그리고 다시 ‘공화정의 임시 조치’로 발동되었다. 그러나 그 ‘임시’라는 형식은 점점 영구 형태를 띠었다. 군사와 재정이 한 축으로 묶이고, 행정 명령이 법의 위에 놓이면서, 로마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단일 지도 체제로 굳어진다.
옥타비아누스의 곁에는 이미 두 개의 확고한 축이 세워져 있었다. 하나는 무력의 이성인 아그리파, 또 다른 하나는 통치의 이성인 마에케나스였다. 그들의 손에서 로마의 군사와 내정, 외교와 재정이 움직였다. 삼두정은 여전히 형식상 존속했지만, 현실은 한 사람의 통치로 기울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형태’를 보존하며 ‘본질’을 장악하는 기술을 감추고 있을 뿐이었다. 기원전 35년, 섹스투스가 처형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던 날, 로마의 항만에서는 곡물선이 떠나고 있었다. 시민들은 그 소문을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이제 바다는 한 사람의 것이다.”
그 문장은 이윽고 로마 전체의 문법이 되었다. 표면적으로 공화정은 존재했지만, 그것은 한 사람의 손끝에서 움직이는 공화정이었다. 즉 제도는 그대로면서 권력의 방향은 따로 정해진 것이다. 그가 아직 ‘프린켑스’라 불리지 않았을 뿐, 로마는 이제 그의 중력 아래 움직였다.
안토니우스가 시리아로 돌아왔을 때, 원정 실패는 돌이킬 수 없는 정치적 사건이 되었다. 전황 보고는 숫자보다 형식에서 그를 배신했다. 전리품보다 부상자 명단이 길었고, 점령 도시는 없었으며, 공성대를 잃었다는 사실 하나가 모든 설명을 무력화했다. 시리아와 킬리키아의 재정 관리들은 추가 징세를 논했지만, 상인들의 호응은 차가웠다. 파르티아 국경과 맞닿은 변경 국가의 조세는 군수품 조달 명목으로 미리 징발한 상태였다. 군단병들은 급식과 급료의 지연이 불만이었으며, 전쟁 지휘부의 석연치 않은 판단도 의심스러워했다. 섹스투스가 사라진 서방에서 곡물선이 다시 왕래한다는 소식이 퍼질수록, 안토니우스가 동방에서 “왕의 흉내”만 낸다는 수군거림이 설득력을 얻는다.
반면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에서 행정과 군권을 정비하며 시민들의 마음을 훔치고 있었다. 그는 안토니우스를 공개적으로 비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침묵으로 상대를 고립시키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의 침묵은 말보다 강했다. 당시 로마 시민들은 그 둘의 입장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한 사람은 여인 곁에 있고, 한 사람은 로마 시민 곁에 있다.”
핵심을 찌르는 정치적 표현일수록 그 말은 단순한 법이다. 그리고 그 단순한 대비가 정치의 방향을 바꾼다.
옥타비아누스의 측근들이 장악한 서방의 여론 장치가 이 점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복수 미완’과 ‘보급 상실’이라는 기사의 뼈대에 사치와 연회의 살을 덧입혔다. 그런 다음 알렉산드리아의 향과 음악, 디오니소스적 의례, 화려한 행렬, 동방의 방탕이라는 가면을 그의 얼굴에 씌웠다. 반면 옥타비아누스 자신은 미세눔과 나울로쿠스 이후 로마의 건설자라는 이미지를 다졌다. 항만이 회복되면서 로마의 곡물 가격표가 먼저 그의 편을 들었다. 곡물값이 안정되고 항구의 돛대가 늘어날수록, 시민들은 논리가 아니라 빵의 무게로 통치자를 평가했다.
문제는 가정에서도 일어났다. 로마에서 옥타비아는 남편의 원정을 위해 병사와 돈을 모아 아테네까지 와서 남편을 맞이하려 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가져온 것을 받으면서도 그녀는 로마로 돌려보냈다. 로마 귀족이 대부분인 장교단은 이를 사적인 문제로 치부했지만, 로마의 일반 시민인 병사들은 장군이 가정과 명예 사이에서 방향을 잃었다고 느꼈다. 로마의 여론은 더 단순했다.
“어질고 절제된 로마의 아내를 돌려보내고, 향과 금사(金絲)로 수놓은 동방의 궁정으로 돌아가는 남자”
이 비교는 선전이 필요 없을 만큼 강렬했다. 로마인들의 입에서 오간 소문만으로도 그의 명예는 충분히 흔들렸다.
안토니우스는 이 모욕을 권위의 형식으로 봉합하려 했다. 그는 동방의 속주들을 돌며 잔여 병력을 재편하고, 파르티아에 빼앗긴 명예를 다시 세우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병사들의 피로와 행정의 혼란은 그의 의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로마의 행정관들은 그를 더 이상 정복자로 보지 않았다. 파르티아 원정 이후의 안토니우스는 동방의 불안정한 주재자에 가까웠다. 명령은 여전히 유효했지만, 이를 수행하는 손들은 점차 머뭇거렸다.
로마의 냉담함은 무엇보다 정치적 계산의 결과였다. 그는 원정 중 막대한 지원을 요구했으나, 귀환 후에는 그에 상응하는 성과를 내놓지 못했다. 병사들에게는 부상과 체불된 급료가, 동맹자들에게는 약속의 파기가, 조달업자들에게는 미수금과 손실이 남았다. 그 와중에도 그는 동방에서 독자적 권한을 유지하려 했고, 여러 왕국들을 묶어 자신의 통치권을 보완하려 했다.
로마가 불신한 것은 권력의 방향이었다. 그는 삼두정의 한 사람으로 여전히 합법적 권한을 지녔지만, 그의 통치 행위는 번번이 공화정의 체계 밖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이 시기의 옥타비아누스 역시 예외는 아니었으나, 로마인들이 두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은 같지 않았다. 그것이 로마인들의 불안을 키우는 요소였다.
이때 옥타비아누스의 침묵은 또 다른 효과를 발휘했다. 그는 발언 대신 행정의 성과로 비교를 유도했다. 항만의 복구와 도로의 보수, 재정의 정리, 군단의 토지 분배가 그의 통치 아래에서 진행되었다. 반면 안토니우스의 이름은 파르티아에서의 철수, 동맹의 이탈과 함께 언급되었다. 이런 대조는 별도의 선전이 필요 없을 만큼 분명했다. 로마 시민들은 점차 두 인물을 안정과 모험의 상징으로 구분했다. 안토니우스의 명예는 전장에서가 아니라 여론의 저울 위에서 무너졌다.
파르티아 원정 실패는 이렇듯 로마에서 행사할 수 있는 안토니우스의 정치적 공간을 급격히 좁혔다. 그는 합법적 권한을 지녔어도 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이 미약했다. 그러나 아직 동방에서는 병력과 재정, 왕권의 승인이라는 구체적인 자원이 작동했다. 이런 토대에서 안토니우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알렉산드리아로 이동했다. 그곳은 로마에서 밀려난 그가 다시 권위를 세우기 위해 기댈 수밖에 없는 정치적 거점이었다.
파르티아 원정 실패로 명성이 흔들린 안토니우스는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접근하기 쉬운 아르메니아를 공략 대상으로 삼았다. 파르티아 원정 당시 아르메니아 왕 아르타바스데스의 배신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가 약속했던 지원을 철회해 로마군의 보급이 끊긴 결과 원정계획 전체가 붕괴한 일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의 이 결정에는 또 다른 정치적 판단이 작용했다. 파르티아를 재침공할 여력이 정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신속한 군사적 성과를 통해 로마의 여론을 반전시킬 필요성은 중요했다. 즉, 패배의 책임을 외부로 돌리고, 군사 행동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신뢰를 복원하려는 시도였다. 또한 이 전쟁을 ‘배신에 대한 응징’으로 규정함으로써, 동방의 여러 군주들에게 로마의 권위가 여전히 건재함을 보여주려는 속셈도 깔려 있었다.
기원전 34년, 안토니우스는 군단을 이끌고 아르메니아 고원을 향해 진군했다. 이번 원정에는 대규모 공성 장비를 동원하지 않았다. 현지 조달과 기동성을 우선시하며, 파르티아 기병의 기습을 차단하기 위해 행군로를 좁게 유지했다. 평원보다 산악과 협곡이 많은 아르메니아의 국경 방어는 귀족 영지들의 성채에서 담당했지만, 그들은 로마군을 두렵게 지켜볼 뿐이었다.
안토니우스는 군사 충돌에 앞서 외교 교섭을 시도했다. 그는 아르타바스데스 왕에게 사절을 보내 로마와의 동맹 갱신을 제안하면서, 회합 장소로 접근이 용이한 구릉지의 별궁을 지정했다.
아르타바스데스 입장에서 이 제안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초청이었다. 안토니우스 군단이 국경을 넘어온 상황에서 그가 회담을 거부하는 일은 곧 전쟁을 의미했다. 파르티아의 구원이 불확실한 그 당시, 아르메니아 영주들 또한 전면 충돌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로마의 분노를 피하면서 시간을 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외교의 형식을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결국 왕은 제한된 호위병만을 대동한 채 회담에 나섰다.
연회 형식으로 진행된 만남은 외견상 화해의 자리처럼 보였다. 그러나 회담이 진행되던 중, 안토니우스는 경호 병사들의 배치를 변경하도록 명령했다. 의례상의 ‘경의 표시’라는 명목 아래 병사들을 왕의 측근들 사이에 배치해서 은근히 포위망을 좁혀갔다. 그리고 잠시 후 별다른 저항 없이 아르타바스데스가 체포될 때, 왕의 호위대 역시 짧은 충돌 후 무장 해제되었다. 무력 대신 의례를 이용해 상대를 제압한 점에서, 그는 이번만큼은 전투가 아닌 외교의 틀 안에서 목적을 달성했다.
아르타바스데스를 포로로 확보하자, 아르메니아의 귀족과 영주들은 대부분 침묵으로 대응했다. 파르티아가 즉각 개입하지 않는 한, 그들은 현실적인 세력 관계를 우선시했다. 안토니우스는 각 영지에 사절을 보내 인질과 서약을 교환하며 복종을 확보했다. 그리고 저항의 조짐이 보이는 지역엔 단기간의 군사 시위를 실시했다. 그는 장기 포위전이나 전면전을 피하고, 권위의 과시만으로 통제력을 유지했다. 이 일련의 조치는 군사 작전이라기보다 정치적 시위에 가까웠다. 안토니우스는 전투의 완전한 승리보다 ‘왕을 사로잡은’ 단일한 수확을 통해 상징적 효과를 노렸다. 실질적인 전리품은 많지 않았지만, 왕의 포획 자체가 그 어떤 전과보다 큰 정치적 가치라고 여겼다.
아르메니아 원정을 마친 뒤, 안토니우스는 개선식을 알렉산드리아에서 열기로 결정했다. 알렉산드리아는 군수, 항만 시설뿐 아니라, 연출의 자유를 제공했다. 로마의 절제된 의례 대신, 이집트의 상징적 표현이 가능한 곳이기도 했다.
클레오파트라 역시 그의 결정을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그녀는 개선식을 로마 장군의 영예가 아닌, 이집트 왕권의 위엄을 보여주는 의식으로 이해했다. 두 사람은 각자의 목적을 결합했다. 안토니우스는 로마식 개선의 형식을 빌려 권위를 복구하려 했고, 클레오파트라는 이를 통해 동방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기원전 34년 가을, 알렉산드리아에서 열린 개선식은 로마의 군사적 의식과 이집트의 왕권 의례가 결합된 형태였다. 행렬의 선두에는 포로가 된 아르타바스데스가 세워졌고, 그 뒤를 군단과 제사 행렬이 이었다. 금과 향, 음악과 깃발이 어우러진 그 행사는 군사적 승리보다 정치적 상징을 과시하는 자리였다.
이 의식의 핵심은 로마와 이집트가 하나의 권력 무대로 결합되었다는 점에 있었다. 그러나 로마 본토의 시선은 냉정했다. 안토니우스가 개선의 장소로 로마가 아닌 이집트를 택한 결정은, 그가 제국의 중심에서 벗어났다는 증거로 해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