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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광환 Mar 26. 2022

남한산성의 치욕

조선 사대부들 실태의 현장에서 바라본 한국정치의 현주소

남한산성은 우리 역사에 굉장한 족적을 남겼던 유적지입니다. 조선 사대부들이 치욕이라고 기록한 사건이 거기에 얽혀있으니 말입니다. 남한산성의 패전을 치욕으로 받아들인 조선의 사대부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을 더 치욕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치욕적 행태들은 그 시절만의 이야기인가,라고 자꾸만 자문하게 됩니다.  아직도 그 망령이 우리 주위를 배회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남한산성, 인조의 한숨이 들려오는 듯하다



명나라를 정벌하고자 하는 청 태종의 눈에 조선은 눈엣가시였습니다. 힘도 없는 주제에 자기들을 오랑캐라며 업신여기는 조선이 가히 꼴불견으로 보였을 겁니다. 그들이 당근과 채찍을 아무리 번갈아 써도 조선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홍타이지는 대군을 일으킵니다. 그 일을 조선 사대부들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1636년 12월 9일, 청 태종 홍타이지(皇太極)가 12만의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와....... 중략........ 이듬해 1월 30일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던 인조대왕이 성문을 열고 나와 삼전도에서 항복의 예를 올리고...... 후략.

그런데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조선이 전쟁에 패했고 그래서 백성이 어렵게 되었다는 이유로 그 날을 치욕의 날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청 태종이 지금의 성남시 탄천 근방에 주둔시켰던 군사는 12만의 병력이었고, 당시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던 조선 군사는 일만 삼천을 넘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이후 군세를 아직 제대로 정비하지 못한 조선 각지에 주둔하던 병력 역시 보잘것없었습니다. 게다가 청 태종 홍타이지는 자기 아버지인 청 태조 누르하치와 더불어 중국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지략가입니다. 


그러니 군세에서부터 중과부적이었던 조선으로서는 을지문덕이나 이순신 같은 전설적인 우리 민족의 천하 명장들이 한꺼번에 살아 돌아오기 전에야 어쩔 수 없이 패할 수밖에 없던 전쟁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날의 패전은 비통한 일일지언정 치욕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치욕이었나?  


남한산성 수어장대, 남한산성 수비대의 지휘소였다



당시 조선의 국왕 인조는 송파에 있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했습니다. 그냥 항복 조인을 하고 말았던 것이 아니라 항복의 예를 올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항복의 예란 것이, 승자의 요구에 따라 황제에게만 할 수 있는,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를 한 것입니다. 이게 문제였습니다. 

그들의 요구를 끝까지 버티면서 듣지 말던가, 조선 왕이 차라리 자결을 하고 말 것이지, 황은이 망극하게도 북경의 자금성에 아직 시퍼렇게 살아 계신 위대한 명나라 황제를 배신하고 엉뚱한 놈과 군신의 맹약을 맺었다는 것, 더구나 그 상대가 오랑캐의 두목이었다는 것, 그것이 조선 사대부들에겐 중세 서양의 교황이 힘에 눌려 이슬람의 사라센 왕에게 입을 맞춘 것보다 더 치욕이었던 이유였습니다. 

다시 말해 내 나라 강토가 피로 물들여졌으며, 수십만의 백성들이 무참하게 포로로 끌려간 일들은, 명나라 황제에게 망극한 불충을 저지른 일에 비하면 당시 사대부들에겐 아무것도 아닌 거였습니다.  

그들에겐 그저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여자들은 화냥년(還鄕女)이었고, 그 여자 뱃속에 들어있던 아이는 호로(胡虜) 자식으로 보일 뿐이었습니다. 청나라에서 요구하는 포로에 대한 속전(贖錢)은 처음부터 사대부들의 정부에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결국 포로들은 가족들의 도움으로 돌아오거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만리타국에서 끝내 노예로 일생을 마쳐야 했습니다.

당시 조선 사대부들은 아무리 다 쓰러져가는 왕조라도 명나라는 주군의 국가이며, 자신들은 그들의 모범적인 제후국이라고 믿었습니다. 절대 불변의 이념이었던 성리학에 목욕재계한 조선 사대부들은, 신하(조선)가 군주(명나라 황제)를 배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건 야만인이나 하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명나라가 청의 기세에 눌려있는 틈을 타서 조선의 주권을 회복시키고자 노력했던 광해군 같은 이단적인 왕을 단칼에 폐위시킬 정도로 그들은 조선이 자주 독립국이기를 포기한 지 오래입니다. 

조선 사대부들의 눈에 만주족이 지속적으로 오랑캐였던 것도 중화사상의 시각을 그대로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주족인 청나라는 당시 부국과 강병을 이룩한 점에서 명나라를 압도했습니다. 

그 500년 전에도 그들은 금나라라는 대제국을 세워 우리 조상들인 고려도 조공했을 정도였고, 청나라도 초기엔 그들의 후예라는 의미에서 大金(後金)이라는 국호를 썼습니다. 알고 보면 그들은 털북숭이 야만인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싹수가 있는 민족이었습니다.  

선양 고궁, 청 태조 누르하치와 청 태종 홍타이지의 궁전이다, 만주족은 이미 500년 전에도 금나라라는 대국을 건설한 바 있다


백성을 위한 실리를 따지는 조선 지도자들이었다면 당연히 그런 청나라와의 외교를 등한시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비참한 전쟁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화(中華)에 기대는 조선 사대부들의 이데올로기는 너무 강했습니다. 

주군이라면 마땅히 제후국을 도와 어려움을 해결해 주어야 하는 법인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명나라는 이미 우리가 섬길 나라가 아니다, 우린 이제부터라도 스스로 나아갈 길을 개척해야 한다,라고 외치는 자주적인 메아리는 성리학의 기본도 모르는 놈이라며 배척받는 분위기가 당시 조선의 사대부 사이에서는 너무도 팽배했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조선의 국체(國體)는 기괴했습니다. 조선은 왕국이면서도 유림 사대부들도 막강한 지분을 소유한 주식회사 같은 국가였습니다. 다른 왕국들처럼 절대군주가 아니었던 조선왕은, 헌법(조선경국전, 후에 수정헌법인 경국대전으로 대체됨)이 허락하는 한계 내에서 권리를 행사해야 할 정도였지만, 그나마도 다른 주주들의 반대에 부딪치면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태종과 세조처럼 일부 강력한 권력을 가졌던 왕들도 자기 마음대로 법을 고치거나 대신들을 임명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런 것 자체가 법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말이 좋아 만인지상이지 왕들은 늘 다수의 사대부들에게 휘둘렸습니다. 게다가 사대부들은 각자 당(黨)으로 갈려 있습니다. 

사대부들이 백성의 안위 문제를 진정으로 고민하면서 왕을 지극정성 보좌하는 일들은 이미 옛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자기 당이 권력을 잡는 일이었고, 왕의 개혁적인 정치행위와 다스림의 묘는 종종 집권당의 당론에 의해 거부되기 일쑤였습니다. 심지어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태종 때 도입된 승정원(왕의 비서실)의 승지들마저 왕보다는 자기 소속당의 당론을 더 따랐습니다. 

어쩌다가 집권여당의 권신들이나 사대부들에게 대들면서 뭔가 제대로 일을 좀 해보려는 간 큰 왕들은 일찍 또는 갑자기 죽습니다. 그렇기에 왕이 되지 못한 세자들을 포함한 조선 역대 왕들 중 8명은 암살당했다는 야사가 존재하게 됩니다.

거기에 한술 더 떠 광해군 같은 주체적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던 왕은 온갖 비굴한 누명을 뒤집어쓴 채 왕궁에서 백주에 쫓겨났습니다. 삼강오륜으로 무장한 사대부들이 몽매한 백성 앞에서 체통을 지킬 수 있는 근간이 바로 군위신강(君爲臣綱), 즉 군주와 신하 간엔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 라는 고상한 대의명분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엉뚱한 곳(명나라 황실)엔 잘 지키면서 정작 필요한 곳(조선 왕실)엔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중국 선양 시에 있는 고궁(청나라 초기 궁궐)엔 당시 서양에서 들여온 천문학과 일반 과학기자재들이 소장되어있습니다. 거기엔 남한산성까지 쳐 내려왔던 청나라 팔기군이 사용했다는 고성능 대포 (홍이포, 紅夷砲)와 머스킷 소총도 유물로 보존돼 있습니다. 

  

청군의 각종 화살, 팔기군에겐 화살도 여려 용도에 의해 세분화되어 있었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궁궐 근처에 기거하던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도 분명 그것들을 봤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스톡홀름 증후군 환자처럼 자신을 인질로 잡아갔던 청나라에 매료되면서, 주화파(主和派 청나라와 잘 지내보자는 파)로 돌아서게 됩니다. 


현실적으로 득이 될 수 없는 번잡한 중화 이데올로기에 전혀 구애됨이 없이, 동양보다 기술적으로 앞서가기 시작하던 그 당시 서양문물의 세례를 받고 있는 청나라의 모습에서 그는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당시 만주족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사상의 자유로움에서 마음껏 헤엄치는 모습으로 비쳤을 것입니다. 

소현세자는 만주족들이 명나라의 북경을 완전히 접수하는 현장까지 따라가서 서양 선교사들과 친분을 맺으며 서양문물에 본격적인 눈을 뜨는데, 자신이 조선의 왕위에 오르면 활발하게 서양과 교류하겠다고 다짐했을 정도입니다.   



청나라 팔기군의 대포, 청나라는 대포 주조기술을 서양인들로부터 전수받는다


물론 그 일이 실현되었다면 수구적 사고에 젖어있던 사대부들은 당연히 몰락했을 테고, 일찍부터 조선의 시야는 세계로 뻗어나갔을 것이며, 그다음엔 나라가 어떻게 변모했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볼모 생활을 할 때엔 그토록 건강하던 소현세자였건만, 조선으로의 귀국 후 몇 달 만에 급서 합니다. 세자의 죽음으로 아우인 봉림대군이 임금(효종)에 올라 북벌(청나라 정벌)을 계획하지만, 가소로운 찻잔 속의 태풍으로 그치면서 조선은 완벽한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맙니다. 결국 조선은 이후 250년간 잠자는 나라로 전락했다가 불시에 밀어닥친 외세의 쓰나미에 덮쳐 왕조의 종말과 함께 망국이라는 진짜 치욕을 백성에게 안겨줍니다. 

자꾸만 대국의 종속에 안주하려 했고, 국가의 자주를 말하는데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으며, 백성의 이익보다는 자기 소속 당의 이익에 더 신경 쓰는 사람들. 거기에 대국의 제도와 문화 등은 무조건 배워서 따라야 하고, 그 이외의 나라는 모조리 오랑캐라고 믿으며 배척했던 조선의 사대부들은 그 후로 어떻게 된 것일까요? 

어쨌거나 이상한 것은, 지금도 당장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그런 것들이 옛날 사람들의 행위라고 치부하기엔 왠지 낯설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망령이 아직도 살아 있는 걸까요.


사실 오늘날 어느 나라나 정파 간의 대립은 말릴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이 민주하의 정치에서는 필연적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대립의 이유가 백성에게 있느냐, 정치가 자신들에게 있느냐에 따라 결과는 판이하게 바뀐다는 것입니다. 조선의 국체가 당대의 선진 수준이었다는 주장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개혁정신을 잃어버린 나라에서 그 우수성이 과연 얼마나 지속될까요.


실제로 조선은 개혁의지를 잃어버린 직후에 일본에 의해 강토가 유린당하는 임진왜란이라는 참사를 겪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들은 반성은 고사하고 자신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다지는 데만 힘을 쏟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만주족에게 짓밟히고 나서는 정신을 좀 차렸을까요? 


이 나라에 정치가는 많았어도, 그들이 진정으로 받들어야 하는 백성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당시에도 사대부들 중 지식인들은 많았습니다. 하지만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진정한 전략적 지식인들의 목소리는 당파에 밀려 메아리로 사라지기 일쑤였습니다. 그렇기에 조선의 진짜 암흑기는 이때부터 시작되었고, 그것은 오래도록 국가 패망의 길로 가게 됩니다. 


지금도 개혁의 목소리는 큽니다. 그러나 부동산 정책 개혁이나 검찰개혁의 예를 봐도 그것의 성격과 가치에 대해서는 저마다 의미부여가 다릅니다. 누구를 위한 개혁인지, 무엇을 위한 개혁인지에 대해서도 모호합니다. 더구나 당파 간의 불신은 최고조에 달해있습니다. 이것은 현대의 정치인들조차 진정한 당파의 이익을 어디에 두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그 이익이 최소한 백성과 국가의 미래에 있다고는 볼 수 없는 현장입니다.


아직도 조선 사대부들의 망국 혼이 배회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울 따름입니다. 여기에서 온고지신이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보자는 메아리는 힘이 없어 보이니, 우리 소시민들의 한숨은 끊일 새 없음이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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