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산 사람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영준 Jun 21. 2024

시인은 걷고, 시는 길 위에서 줍고

지리산 떠돌이 시인 이원규

  

흥성광업소 막장 광부를 거쳐 사노맹 기관지 <노동해방문학> 창작실장이었다가 <중앙일보> 기자, 그리고 말총머리 휘날리는 라이더, 지리산 시인을 넘어 최근 한반도 대운하 반대 4대강 도보순례에 이르기까지, 그 이력의 굴곡은 독특함이라기 보단, 그게 과연 이 지리산과 어떤 연관 속에 이어져왔는가 궁금증이 들게 했다. 그의 삶만큼이나 굽이진 섬진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화개의 ‘피아산방’을 찾았다. 마당엔 그의 애마 ‘혼다 아프리카 트윈’과 ‘BMW 1200GS’가 잠들어있었고 금방 형제봉에서 내려왔다는 ‘산사람’ 이원규는 “피아(彼我)라는 게 너와 나, 결국 ‘우리’라는 말인데 지금까지 ‘피아’만을 보고 ‘우리’는 없었다”고 입을 열었다.  

“시는 내가 가는 만큼 내 뒤에 있는 것이고, 난 뒷집 할머니가 써주는 글을 주워 담기만 했어요.” 안치환의 노래로도 알려진 그의 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은 문단에서는 그리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산꾼이라면 누구나 가슴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절창이다. 



“지리산은 80년대 초반에 처음 와보고, 기자 시절엔 빗점골에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의 권총과 유품이 남아있다는 구체적인 제보를 받고 내려와 일주일간 산을 헤맸죠. 그리고 서울에 갔는데 술에 취해도 지리산이 생각나서, 97년에 와서 자리 잡고 98년 봄에 완전히 왔어요. 중앙일보 시절은 위장취업에 가까워서 시인행세도 어정쩡, 기자행세도 어정쩡하기도 했지만, 실상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며 이제 대한민국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것 같다는 판단에 운동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침 그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사표 내기도 좋았죠.”


1984년 시 ‘유배지의 풀꽃’을 발표하며 등단한 그는 이후 연작시 ‘빨치산 아내의 편지’ 15편을 내놓으며 본격적인 시작 활동을 했다. <노동해방문학> 시절에는 모두 필명을 쓰던 때 혼자서 실명으로 날선 문장의 현장시들을 쓰기도 했다. 서울을 떠날 때 그는 일종의 ‘서울하야식’을 치르며, 고향에서 제일 멀리 갈 것,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원칙을 세우고 지리산으로 향했다. 그 즈음 신동엽창작기금을 받았는데, 상금 700만원 중 인사동 술집들에 깔아놓은 외상을 갚고 나니 200만원이 남았다. 구례에서 80만원을 주고 오토바이 한 대를 사고, 남은 돈으로 3년을 버텼다. 쓰지 않으면 벌 필요도 없는 법, 주먹밥을 싸들고 간 어느 골짜기에서 산짐승처럼 하룻밤을 보내고, 술은 소주 반병으로 취하는 비법을 터득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때 지리산 댐 문제가 터진 거죠. 실상사 도법스님을 만나고, 댐을 막기 위해서 뛰다보니 이번엔 새만금이 튀어나오고, 서울까지 오체투지하며 어떻게 오다보니 또 한반도 대운하가 튀어나와 이번엔 4대강변을 따라, 그렇게 걸은 겁니다. 4대강 때는 여론이 갈라졌기 때문에 한편으론 돌 맞을 각오로 갔어요. 여주에서 ‘대운하 부동산’이란 간판들이 늘어선 가운데 야영을 할 땐 두려움에 규찰을 서기도 했지요.”


“사람들은 섬진강 벚꽃길 19번 국도를 아름답다고 하죠. 그런데 실상 길이 길을 막고 있어요. 거기엔 사람이 다닐 인도가 없어요. 4차선으로 확장한다 해도 거긴 자동차의 길이지 사람의 길이 아니에요. 그래서 지리산둘레길을 걸었고, 그 사업이 건교부, 문광부, 산림청으로 이관돼 예산이 잡히게 되자 바로 손을 뗐습니다.” 


지리산에서 한철 잘 놀았으니 그 빚을 갚기 위해 벌떡 일어나 걸을 수밖에 없었다는, 천상 시인과 혁명가의 숙명 같은 걸까. 그간 그가 걸은 길은 3만 리, 대장정 속에서 남은 후유증은 결핵성늑막염이라는 진단이었다. 이른바 ‘노숙자 병’이라는, 그래서 지난 7개월간은 독한 약을 먹으며 몸을 추슬러야 했다고. 


계급운동에서 시작해 보수매체의 기자로, 또 환경운동으로 넘어온 행로에 대해 당신은 대체 어느 길 위에 서 있는 것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민족과 계급은 다르지 않습니다. 또한 환경의 문제도 동일 선상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리산은 이 모든 갈등과 상처를 품고 있습니다. 벌목을 위해 낸 일제수탈도로는 분단 속에서 공비토벌로로 사용되었고, 이제는 자본이 흐르는 관광도로가 되었습니다. 지리산댐 반대에 앞서 한 일은 달궁에서 7대 종교단체가 모여 지리산 위령제를 지낸 것입니다. 4만 명의 위패를 놓고 지리산으로 표상되는 이념의 갈등을 무너뜨려보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피아와 좌우에 대한 위로에 앞서 지리산에서 죽은 모든 자연에 대해서 먼저 추모했습니다. 생명평화운동은 투쟁을 통해 얻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선, 인간의 존엄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현재의 진보가 외면 받는 것은 부분 운동에 치우쳐 우리 시대가 만들어놓은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또한 저는 아직도 문학은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변화의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시인, 라이더, 생명평화운동가. 그런데 어떨 땐 짖는 개들을 발로 차기도 하고, 섬진강 물고기를 어떻게 잡아먹을까 궁리도 하고, 여전히 나와 반대편에 선 보수매체에 기고도 하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그늘에서 ‘관광’의 문화가 바뀌지 않는 한 끊임없이 싸워야한다고 말하는 지리산 사람. 언젠가 경의선 열차가 다니게 되는 날, 거기에 오토바이를 싣고 만주로 가 대륙을 횡단하며 철로변에서 올 통일의 꿈을 꾸는 역마살의 영혼. 시는 내가 가는 만큼 내 뒤에 있을 것이기에, 뒷집 할머니가 써주는 글을 주워 담기만 할 것이라는 시대의 시인. 자리를 옮긴 화개장터의 참게탕 집에서, 차라리 길바닥에서 잘걸 그깟 운전 때문에 그와 소주병을 까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미련으로 남아, 이 글을 쓰는 나도 언젠가 다시 지리산으로 갈 핑계 하나 생긴 것이었다.      

2012.10



매거진의 이전글 대청의 구름 속에 사는 ‘멸종 위기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