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경주'
스물여덟에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을 졸업하는데 3년 6개월의 휴학 기간(군 휴학 2년)을 포함해 대략 7년 하고 6개월 정도 걸린 것 같다. 남들은 대학 가서 꿈도 찾고 한다는데, 7년 6개월간 대학을 다니면서 내가 고작 찾은 거라곤 마카롱이 생각보다 맛있다는 것뿐이었다.
얼마 전 노트북을 사면서 필요한 자료들을 옮기려고 바탕화면의 폴더를 정리하다가 '대학교 과제'라는 폴더에서 '2주 차 과제(보관)'라는 짧은 파일명의 한글 문서를 찾았다. 파일명이 작성자처럼 재미없어 휴지통으로 던지려다 괜히 궁금해서 열여 몇 줄 읽어 봤더니, 작성하던 당시의 시간이 떠오르기도 하고 글도 그럭저럭 재밌는 것 같아서 계속해서 읽게 됐다. 기억상으로는 대학 과제를 제출할 때 어떻게든 졸업만 하자라는 마인드로 마치 영수증을 건네주듯 제출했던 것 같은데, '2주 차 과제(보관)' 텍스트에서는 낯선 고민이 담긴 타이핑 흔적이 보인다는 점에서 뭔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제목은 초록빛 무덤. 글쓰기 교양 과목의 과제였으며 주제는 장률 감독의 영화 <경주> 비평이었다. 비평이라기보다는 과제 양식에 맞춘 짧은 감상문이다.
초록빛 무덤
영화를 좋아했고 꽤 많이 봤다. 그렇다고 영화광처럼 영화에 빠져있었던 것도, 평론가처럼 흘러 다니는 기표들을 찾아 작품의 의미를 연결하는 과정에 도전한 것도 아니었다. 액션이 주는 시각적인 화려함과 스릴러 특유의 서스펜스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고요함을 즐길 뿐이었다. 당연히 제목부터 잔잔한 느낌을 주는 영화는 명작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 아니라면 지금껏 웬만하면 보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경주>는 거창하게는 내게 기념비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를 내 만족에 종속되는 수단으로 바라보던 태도에서 벗어나 영화를 아름다움 그 자체로 바라보는 정신적 활동의 당위성을 받아들이는 단계에 이를 수 있었다.
비평문을 쓰면서 제목을 고민하지 않아도 됐다. 어느 작가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는 한 인터뷰에서 글감과 제목의 상관성에 대해, 만약 글을 쓸 때 제목이 머릿속에서 바로 떠오른다면 그 글감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한 것이라고 말했다. 글을 많이 써보지는 않았지만 그 대답에 대해 어느 정도 동감하는 입장에서, 비평문 작성이라는 과제를 안고 영화 <경주>를 보는 내내 그리고 이후까지도 글의 제목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건 스크린을 뚫고 나온 능(陵)과 죽음의 숭고함 때문이었다.
"집 앞에 능이 있으니까 이상하지 않아요? 경주에서는 능을 보지 않고 살기 힘들어요"
영화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삶과 죽음을 그중에서도 특히 죽음이라는 난해한 현상에 대해 우리가 견지해야 할 태도를 알려주는 듯한 느낌을 준다. 창이 형의 장례식부터 거대한 능 위에서 뛰노는 아이들, 사진, 모녀의 죽음, 오토바이 사고, 7년 전의 돌다리와 같은 시퀀스와 이미지를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죽음은 단지 그것의 현상에 불과할 뿐 우리는 죽음을 제대로 알 수 없으며, 죽음을 알려고 하는 것조차도 특히 인생이라는 유한한 시간 안에서는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창밖으로 유난히 강한 초록빛의 거대한 능이 보이고 그 위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사랑하는 두 학생이 걷는 것처럼 죽음과 삶은 경계가 모호하여 우리가 알지 못하고, 우리는 그것들을 구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린 호모 데우스라고 불리기에 충분하듯 죽음과의 거리를 정밀하게 측정하여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때로는 교만으로 때로는 기만으로 불리기도 하는 그런 태도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죄인 인생을 허비한 죄(영화 빠삐용 中)를 짓게 하는 기초가 된다.
영화 경주는 최현 교수와 안내원의 대화 장면(천둥소리와 북한 포격)과 폭주족의 사고를 통해 이와 같은 태도에 대한 주의를 주는 것만 같다. 죽음은 어떻게 보면 말도 안 되는 것이며(북한 포격)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것이라는(폭주족의 사고) 인식을 새로 정립하길 기대하며 현재의 중요성, 시작과 끝에 대한 정보의 영원한 무지 안에서 현재의 가치를 새롭게 이해하길 기대하는 것 같고, 우리에게 또 그렇게 얘기하는 것만 같다.
"저는 제가 하고 있는 이 학문이 뭐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똥 같습니다."
최현 교수와 북한학과 박교수가 대화를 나누다 최현 교수가 위와 같이 말한다.(최현 교수는 극 중 동북아 국제관계사에서도 근대 이전 한중관계사의 최고 석학이다) 김정은 체제가 얼마나 지속될 것 같냐는 박교수의 질문에 "100년"이라고 대답한 것에 이어 최현 교수는 본인이 하고 있는 학문을 똥이라고 표현한다. 자신의 본질이자 타자를 평가하는 잣대인 학문의 가치를 무시당한 박교수는 최현 교수를 허무주의자로 취급하며 언성을 높인다.
만약 영화 안에 메시지가 있다면 최현 교수와 박교수의 대화 장면이 영화의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없는 본질을 끊임없이 찾아가며 그것에 목숨 거는 박교수(우리)에게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최현 교수. 허무주의자라기보다는 죽음이라는 난해한 현상을 조금 더 탐구하고 가깝게 다가간 사람의 삶의 조언이며, 영화의 메시지다.
- 당신이 생각하는 건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사실 비평문을 쓰면서도 영화를 제대로 본 건지 모르겠다. 사랑을 다룬 영화인 것 같으면서도 아니고, 미스터리 한 요소들과 샤머니즘적인 느낌, 의미심장한 대사들. 내겐 난해한 영화였고 심지어 창이 형의 부인과 찻집 아리솔의 춘화는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영화 <경주>를 통해 영화가 지닌 미학적 요소를 찾기 위한 시도의 가치를 알 수 있었으며, 영화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될 수 있었기에 영화를 감상하고 비평문을 작성하기까지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기간에 임박해서 쓴 느낌도 많이 나고.. 그렇게 잘 쓴 글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현학적이고 오글거리는 표현들과, 특히 과제의 후반부로 갈수록 생각이 정리되지 못했다는 사실이 들통나기에 충분한 부분들이 눈에 보인다.(분량도 그렇고..) 이렇게 내놓기 부끄러운 글을 그때 <보관용>이라는 표시까지 해가며 남겨놨던 걸 보면 당시엔 과정과 결과에 나름 만족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글을 쓰는 게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머리가 탁월하지 못한 탓에 고작 몇 줄 쓰는데도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며 머릿속의 문장들이 손으로 전달되지 않을 때마다 답답함을 느끼지만, 그래도 계속 무언가를 쓰고 싶은 걸 보니 괜히 이러한 스트레스를 감당하고 싶은 것 같고 그 느낌들이 불편하지도 않다.
무엇보다도 글을 쓰면 언젠가 내게 좋은 결과로 돌아올 것만 같다.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억지로 시간을 내서라도) 브런치에 이런저런 글을 올리려고 한다. 어린 시절이 담긴 신발 박스에 잡동사니를 넣어 놓듯 시, 서평, 수필, 소설 등등 '아무거나'라고 느껴지는 글들을 브런치에 담을 계획이다. 현재라는 시간에서는 필요한 물건이 되고 미래에는 골동품이 되어 기억 속의 과거를 선명하게 해 줄 잡동사니의 역할을 앞으로 쓰일 여러 글에게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