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환한 봄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봄으로부터 소박한 제비꽃 편지를 받았다. 지난겨울 잘 지냈냐는, 작은 보라색 꽃의 안부를 듣고서야, 비로소 나는 봄이 왔음을 깨달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편지 쓰는 것을 좋아했다.
좋아하는 친구에게, 멀리 떨어져 계신 할머니에게, 군대 간 오빠에게, 학교를 졸업하고 꽃꽂이를 배우러 떠난 언니에게, 그리고 어른이 돼서는 혼자 좋아했던 사람에게 이름을 밝히지 않은 편지까지, 참 많은 편지를 썼었다. 편지 한 통 쓸 때마다, 내 딴에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편지지를 찾는다고,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여러 문구점을 헤매다니곤 했다. 그러고는 행여나 글자 받침 하나 삐뚤어질까 봐, 한 글자 한 글자를 정성껏 꾹꾹 눌러쓰곤 했다. 그 시절을 기억하듯, 지금도 내 가운뎃손가락에는 연필을 잡았던 부분이 뭉툭하게 굳은살로 남아있다. 이제는 쓰기보다는 봄이면 향기로운 꽃 편지들을 읽느라 바쁘다. 어떤 날은 목련꽃 아래에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기도 한다.
나에게 책을 읽는다는 것은 향긋한 일이다. 그래서 ‘세계 책의 날’도 봄에 있는 것일까?
1995년 4월 23일, 유네스코는 이날을 ‘세계 책의 날’로 지정했다. 1926년부터 스페인 카탈루냐에서는 세인트 조지 축일(4월 23일)에 책을 사는 사람에게 장미꽃을 선물하는 관례가 있었으며, 1616년 4월 23일은 세계적 대문호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가 사망한 날이기도 하다. 이런 연유로 4월 23일은 ‘세계 책의 날’이 되었다.
도서관 사서로서, 책 읽기의 즐거움에 빠진 독자로서 ‘세계 책의 날’을 맞아, 내 인생의 책에 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살면서 내 영혼을 건드린 책은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내 삶의 가치관을 세우는 데 도움을 준 한 권의 책이 생각났다.
바로 헬렌 니어링(1904~1995)과 스콧 니어링(1883~1983)이 쓴 <조화로운 삶>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을 처음 만난 것도, 화사했으나 애달팠던 2000년 4월의 어느 봄날이었다. 나는 서점의 신간 코너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그 당시 나는 정서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라, 제목이 주는 평화로움에 이끌려 아마 이 책을 펼쳐봤을 것이다.
“당신의 편지에서 나는 당신이 전환기에 이르렀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모든 걸 시작하세요. 새로 시작하세요. (…) 새로운 곳으로 가세요. 일을 얻으세요. 당신이 찾을 수 있는, 가장 적성에 잘 맞고 만족스러운 일을요, 규칙을 세우고 꾸준히 그 일을 하세요. 그러면 당신은 자신감을 얻고 당신 자신과 당신이 하는 일에 스스로 책임을 지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누군가를 돕는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 사랑과 원기, 조화로운 생활을 빌며, 스코트”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헬렌 니어링, 185.
<조화로운 삶>은 사회철학자이자 자연주의자, 실천하는 생태론자였던 스콧 니어링과 그의 영혼 동반자 헬렌 니어링이 함께 쓴, 1932년 도시를 떠나 시골 버몬트 숲속에서 자급자족하면서 살았던 스무 해를 기록해 놓은 책이다. 읽는 내내 법정 스님이 말씀하셨던 ‘무소유’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와 같은 놀라움을 느꼈다. 책 곳곳에서 나무 냄새와 싱그러운 풀 냄새가 쉼 없이 쏟아져 나와, 마냥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두 사람의 삶이 자꾸만 궁금해졌다. 그래서 바로 찾아 읽은 책이 남편 스콧을 떠나보내고, 헬렌이 두 사람의 삶을 정리하면서 쓴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라는 책이었다. 그리고 이 책은 바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책이 되었다.
단순한 생활, 긴장과 불안에서 벗어남, 무엇이든지 쓸모 있는 일을 할 기회, 그리고 조화롭게 살아갈 기회.
<조화로운 삶> 18.
그때부터 꿈꿨던 조화로운 삶, 지금의 내 삶은 얼마나 조화로워졌을까?
오랜만에 책장에서 먼지를 이고, 고요한 명상에 잠겨있는 <조화로운 삶>을 다시 펼쳐 들었다.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이 책을 선물해 주었던 분의 안부 인사가 짧게 적혀있었다. 나를 보면서 본인이 스스로 포기하며 살아온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그래서 고맙다는 인사말을 보면서, 2007년의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스콧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을 처음으로 만났던 2000년 봄은 나에게 언제나 기쁨으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