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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원의 초고들 Sep 23. 2023

동전을 너무 꽉 쥐고 있어서 그런가

씨꺼멓다. 새까맣다라는 표준어가 존재하지만, 지금 내 눈앞은 그 표현으로 부족하다. 한국에서 지낼 때, 한번도 본 적 없는 씨꺼먼 매연을 내뿜고 이르쿠츠크의 버스가 지나갔다. 버스 뒤에 적힌 번호는 480번, 학교에 가기 위해 타야 했던 버스다. 첫 수업에 늦지 않으려고 일찍 나왔기에 다행히 다음 버스를 기다리면 된다. 그런데 호흡할 때마다 콧속이 바싹 얼어붙는 느낌은 다행이 아니다. 정류장을 둘러보니 서 있는 사람들 눈덩이에 새하얀 마스카라가 발려있었다. ‘시베리아, 시베리아, 시ㅂ..ㅔ리..아’ 머릿속에도 눈썹 위처럼 살얼음이 꼈는지 아무 생각이 없다. 과연, 이 추위에 익숙해질까?


얼얼했던 코와 귀의 감각이 둔해질 때쯤 480이라는 숫자가 다시 한번 다가왔다. 김 서린 안경 덕에 눈에 뵈는 게 없어진 나는 마치 몇 년을 이미 시베리아에서 살아온 청년처럼 자신 있게 버스 계단에 발을 올려놓았다. “말라도이 칠라벡(젊은이)!” 순간 기사님의 호령이 내 귀를 찰싹 때렸다. 흐려진 안경알 사이를 비집고 앞을 쳐다보니 승객들이 나를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아뿔싸! 러시아는 뒷문으로 승차를, 앞문으로 하차하는 걸 몰랐다. 당연하게 앞으로 타려 했던 나는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뒷문으로 돌아가 승차를 완료했다. ‘쿵’ 하고 버스 뒷문이 닫혔고 나는 오른손으로 버스 손잡이를, 왼손으로 주머니 속 카드를 꽉 쥐었다.


‘카드 찍어야지’라는 생각이 들어 주위를 둘러봤지만, 반짝이며 나를 반겨주던 한국 버스의 카드리더기가 그 어디에도 없다. 버스는 움직이기 시작했고, 내 유학 생활 첫 바퀴는 생각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그래도 아무도 앉지 않은 자리를 찾았고, 그제야 손에 힘을 풀고 버스 의자에 털썩 엉덩이를 붙였다. ‘카드리더기도 없고, 그럼 환승도 안되겠고, 또 …’ 혼자 조용히 버스 안을 관찰하려는데 버스 안은 이미 너무 조용했다. 내 머릿속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들릴까 걱정됐다. 통화하는 사람도 없는 건 둘째 치고 도착지 안내 방송도 없다. 회색빛 날숨만 사람들 얼굴에서 보였다 사라지고 있다. 그때 갑자기 왼쪽에서 들린 쩍-쩍- 소리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얼어붙은 창문이 내는 소리였다.


2017년에 준희랑 대한이와 다녀온 삿포로도 처음이었다. 첫 번째 일본 여행이었고, 일본어도 급하게 공부하고 출발했다. 그만큼 모든 게 낯선 환경이었지만, 당시 진행 중이던 유키마츠리 덕분이었을까, 친구들 덕분이었을까. 눈이 쌓인 삿포로의 거리는 주황색 불빛과 함께 아름다웠고, 꽁꽁 얼어 붙은 얼음 조각상은 예술이었다. 나는 그때의 기억으로 지금 내 옆에 얼어 붙은 창문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하지만 꽝꽝 얼어버린 버스 창문은 나에게 밖을 내보여 주지 않았다. 결국 장갑을 벗고 손톱을 세워 벅벅 긁었다. ‘시원하네’. 창문 밖 거리에는 발목이 푹 잠길 정도로 눈이 쌓였다. 그런데 하얗다기보단 아까 본 사람들 한숨처럼 회색빛이다.


목적지 전 정거장에 도착할 때쯤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 손잡이를 붙잡았다. 카드로 결제가 안 되는 것은 배웠으니, 동전을 찾으려고 두꺼운 패딩 주머니를 뒤적인다. 필요한 금액은 25루블, 한화로는 400원이 채 안 된다. ‘살면서 400원을 내고 버스를 탔던 기억이 없는데…’ 차가운 이 동네 분위기에 적응하려니까, 이번에는 5루블, 10루블 동전이 주머니에서 짤랑거린다. 그렇게 애써 찾은 동전을 꽉 쥐고 있었더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동전을 너무 꽉 쥐고 있어서 그런가, 동전이 뜨끈해졌다. 기사님께 데워진 동전을 건네고 앞문으로 천천히 내려와 눈에 발을 푸욱 담궜다.


길바닥에 쌓인 눈보다 어두운 발자국을 여기저기 남기고, 마침내 4번 캠퍼스 출입문 앞에 멈춰섰다. 검은 자가 아닌 흰 자를 이용해 다른 학생이 어떻게 들어가는지 확인하고, 나는 똑같은 자리에 학생증을 살포시 가져다댔다. 삑-소리가 나고 드르륵- 철로 된 세 개의 봉 중 하나를 밀었다. 통과다. 마치 오래된 지하철을 타러 들어가는 기분이다. 통과한 학생들은 우르르 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분명 엘레베이터는 정면에 있는데, 이상하게 일제히 오른쪽으로 돌아간다. ‘통행료라도 내야하나?’ 라고 중얼거리는 사이 거대한 투명 아크릴판 뒤에 계신 할머님들과 마주했다. 할머님과 눈이 마주친 나는 급하게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런데 왼쪽 학생이 짤랑거리는 루블 대신 모자, 목도리 그리고 겉옷을 벗어 넘긴다. “휴… 스.파.씨.바.(고맙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필통을 닫고 학교를 나왔다. 문을 열고 나와 쌓인 눈을 밟는데, 아침보다 따뜻하고 푹신하다. 나는 한 걸음씩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고, 거리의 가로등은 주황빛을 내기 시작했다. 도착한 버스정류장에서 카드가 아닌 동전을 만지작거리면서 기숙사로 돌아갈 버스를 기다렸다. 마침내 아까 탔던 480번 버스가 도착했는데, 인제 보니 버스 옆에 반송-서면-신라대가 적혀있다. 새까만 매연을 내뿜는 이유가 오래된 한국 버스를 수입해서 운행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는 몇 년을 시베리아에서 살아온 청년처럼 익숙하게 뒷문으로 버스에 올라탔고, 얼어붙은 창문을 가만히 바라봤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미리 준비해 둔 25루블을 내고, 버스 앞문으로 내려오면서 기사님께 한마디를 넘겼다. “쓰빠씨, 바!” (씨에 강세를, 바는 잘 들리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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