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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원의 초고들 Sep 23. 2023

버스 문이 닫히는 소리만 들린다

순간적으로 하얀 입김이 버스 문밖으로 우르르 흘러넘친다. 흐릿한 입김이 하나둘 사라지고, 반짝임이 하나 없는 검고 광활한 공간을 마주한다. S7 Airlines가 쓰인, 나는 이제 구면이라 익숙한 연두색 비행기 앞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인다. S7은 Siberia Airlines의 준말이다. 7은 시베리아 항공이 처음 운항했던 도시의 수다. 지금은 러시아 국내뿐 아니라 해외까지 운항한다. 이르쿠츠크에서 서울까지 직항으로 네시간이면 충분하다. 러시아라지만 생각보다 멀지 않은 도시다. 그래서 나는 첫 학기가 끝나고 설날을 맞이하기 위해 한국으로 부리나케 간다. 모자부터 목도리 그리고 두꺼운 외투까지 따뜻하게 차려입은 모두가 작은 연두색 문을 향해 계단을 오른다.


2019년 2월 3일부터 6일까지가 올해 대한민국의 설날이다. 러시아의 설날, 즉 Новый Год [노븨 고드]는 양력 1월 1일부터 열흘간 진행된다. 러시아에서 가장 큰 축제이자 명절이다. 운이 좋지 않아도 최소 일주일을 쉰다. 그래서 한 달 전 12월 초 동네 슈퍼마켓에서는 작은 초콜릿부터 큰 트리까지 새해를 위한 상품이 가득하다. 이르쿠츠크 시청 앞 광장에는 거대한 얼음 미끄럼틀이 아이들을 위해, 아파트 5층은 넘을 듯한 높이에 반짝이는 별이 달린 트리가 모두를 위해 설치된다. 마지막으로 12월 31일 열 시가 되면 광장 주위에는 네 개의 회색 보안 검색대와 펜스가 둥글게 줄을 이룬다. 삐-소리 없이 통과한 사람은 경찰에게 소지품을 보여주고, 광장의 비어있는 공간을 하나씩 채운다.


시리(Siri)가 오늘 기온은 -30도라고 했다. 그런데 평소보다 밝게 비추는 가로등 때문인지, 광장을 알알이 꾸미는 전구 때문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그런지 그다지 춥지 않다. 광장 주변 통제된 도로에는 매연 대신 사람들 입김이 가득하다. 오늘만큼은 시청 뒤쪽에 있는 안가라강까지 멈추지 않고 걸어갈 수 있다. 반짝이는 트리 앞에서 사진을 만족할 만큼 찍고, 사람들은 안가라강 쪽으로 걸어 나간다. 나는 어느 무리 중 하나가 아닌 채 혼자 나가는데, 옆에서 누군가 인사를 한다.   


“С Новым Годом![쓰 노븸 고담]”


나는 ‘사람이 워낙 많으니 아는 사람도 있겠지’ 아니면 ‘아까 사진 찍어 드린 분인가?’ 흐르는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왼쪽으로 30도 돌렸다.


한겨울이면 세상에서 가장 깊은 호수인 이르쿠츠크의 바이칼은 얼어붙는다. 그런데 이르쿠츠크에서 흐르는 안가라 강은 겨울에, 체감 온도 -48도에도 얼어붙지 않는다. 이유는 바이칼 호수에 연결된 336개의 강 중에서 유일하게 안가라강만 바이칼에서부터 흘러나온다. 그만큼 유속이 빠르고 멈춤이 없다. 그리고 나는 안가라 강 앞에서 잠깐 멈춰 섰다. ‘누구세요?’ 처음 보는 사람이다. 누군지도 모르는 ‘러시아인’이 인사한다. 나는 얼어붙을 뻔한 침을 꿀꺽 삼키고 대답한다. “С Новым Годом”. 그러자 이번엔 오른쪽에서 걷던 또 다른 러시아인이 인사한다.    


“С Новым Годом!”. 

“네네, С Новым Годом ^_^”.



악수를 서너 번 하니 우리는 이름 없는 무리가 됐다. 바냐, 나스쨔, 사샤, 알료나, 발레라, 게세르 그리고 진본. 군인처럼 줄을 맞추지 않았지만, 함께 걸어간다. 그 와중에 이르쿠츠크에서 사는 한국인에게 집중 질문 타격이 쏟아진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열두 시가 된 하늘에서 폭죽이 펑펑 터진다. 빨간색부터 보라색까지 다양한 색이다. 새해 안녕을 다시 한번 서로에게 폭죽보다 뜨겁게 전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날이 날인지라 버스는 둘째치고 택시도 잡히지 않는다. 같은 방향을 가진 사람끼리 걸어가기로 한다. 나는 알료나, 게세르 그리고 사샤와 함께 돌아간다. 폭죽놀이는 끝났지만, 우리는 한 달에 한 번씩 만나기로 했다.


연두색 비행기는 무사히 인천 땅을 밟는다. 오랜만에 본 친구들의 질문은 대부분 비슷하다. “러시아인 어때? 차갑지 않아?”, “스킨헤드 안 만났어?”, “사람들 로봇 같지? 아니 로봇보다 더 차갑나?”. 여러 색을 가진 폭죽이 터진 그날 밤 이후, 나는 러시아에서 살면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인사했다. 그러면 모두 따뜻한 답변을 나눠줬다. 어떨 때는 들뜬 얼굴로 “니하오”라며 성급히 인사하는 사람도 있지만, 알고 보면 “인사하고 싶지만, 아는 아시아 인사말이 이것뿐이다”며 미안해했다. 나는 대신 “안녕”이라는 인사말을 알려줬다. 러시아 사람은 차갑지 않냐는 친구의 질문에 적절한 답볍을 못 한 채, 다시 인천공항으로 출발한다. 공항버스 계단을 올라 “안녕하세요”라고 한다. 그런데 버스 문이 닫히는 소리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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