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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원의 초고들 Sep 23. 2023

대용량을 사서 두고두고 쓰고 싶지 않았다

유리문 구석에 달린 자그마한 종을 울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어머니가 미리 전화를 드렸다고 하던대요..”

“어서오세요. 안경 새로 맞추시는 거 맞죠?”

“네, 여분의 안경이 필요할 거 같아서요.”

“알겠습니다. 전화로 러시아 간다고 들었어요. 공부하러 가세요?”

“네, 공부도 하고 이것저것 해보게요.”

“저도 여러 사업을 해오고 있지만, 보통 처음에는 다 망하더라고요. 제가 첫 번째로 했던 사업은 …”


갑자기 귀에 먼지가 잔뜩 쌓였는지, 이후 안경집 사장님이 하셨던 말씀이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희망을 가지세요~”라고 말하며 나에게 안경을 건네줬다.

“네, 감사합니다.”


‘망할 희망을 가지라는 건가?’ 건네받은 새로운 안경을 쓰고 어지럽지 않은지 방바닥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종을 다시 한번 띠리링 울리며 가게 밖으로 나섰다.




2018년 12월, 시베리아에 와서 김 서린 안경을 하루에 몇 번씩 닦다 보니 어느새 한 달이 지났다. 그리고 깨끗해진 안경알 너머로 생각보다 많은 한국 화장품 판매점이 보였다. 순간 패딩 안쪽 주머니에 핫팩이 있는 것처럼 명치 쪽이 뜨거워졌다. ‘이게 그 망할 희망인가’. 기숙사에 돌아와 뜨거워진 온도 덕에 부푼 가슴을 책상에 대고, 텅 빈 검색창에 글씨를 채웠다. 러시아 화장품 대리점, 러시아 화장품 납품 등등..


‘보통 처음에는 다 망한다’라는 주문은 판매를 위해 만든 홈페이지에 뜨는 화장품 주문수보다 강력하게 움직였다. 안경을 썼지만, 해리포터가 아닌 나는 이 강력하고 무서운 주문을 이겨내지 못했다. 하늘을 날아온 화장품 동료들은 결국 힘도 제대로 써보지 못했다. 전투를 마감하고, 캠프파이어 대신 기숙사 라디에이터를 옆에 두고 다 같이 눌러앉았다. 밀봉된 화장품은 말을 못 했지만, 그래도 기숙사 방 안은 향기로웠다.




2019년 6월, 여행객들을 배웅하기 위해 이르쿠츠크 국제선 출국장 앞에 섰다. 절망과 함께 시작했던 첫 가이드는 이미 오래전이다. 언제였는지 기억해 내려면 힘써야 했다. 당시 떨리던 오른손은 이미 단단해졌고, 능숙하게 여행객들에게 공항 카운터를 가리켰다. “즐거웠어요”, “한국에 오면 연락을 줘요” 등 추운 날씨에도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서로 따뜻한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마트에 들렀다.


어떤 맛을 가진 치약을 살까? 반짝이는 진열대 앞에 서서 가만히 치약을 쳐다봤다. 이놈이다, 저번에 나에게 너무나 쓴맛을 보여준 친구. 그 치약을 뒤로하고, 더 나은 치약을 선택하리라는 희망이 손가락 끝에서 나올 것처럼 다른 치약을 휘휘 뒤적였다. 사실 이번에는 맛보다는 양이 더 중요했다. 대용량을 사서 두고두고 쓰고 싶지 않았다. 마침내 손바닥보다 조금 더 작은 친구를 데리고 계산대로 갔다.


세면대에 안경을 벗어두고 세수를 마쳤다. 양치하려고 치약을 손에 쥐었는데, 문득 ‘희망은 치약 같은 소모품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사용하고 버리는, 오래 가지고 있으면 비효율적이게 되는 그런 용품 말이다.  이번 치약 맛은 괜찮기를 바라면서 칫솔에 살살 희망을 발랐다. 단단한 나의 이를 문지르고, 물을 한가득 머금었다. 마지막으로 입 안을 들쑥날쑥 유영하던 물을 내뱉었다. ‘시원하네, 조금 쓰긴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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