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아이들과 <키다리 아저씨>를 읽고 만나는 날.
워낙 유명한 작품이긴 하지만 유독 이 책으로 수업하는 날을 기다렸던 이유는 단 하나! 본격 연애감정이 나오는 책 처음이기 때문이다.
(어머님들 죄송해요 제가 가끔은 사심담아 수업을 합니다)
<플랜더스의 개>에서 잠깐 등장하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넬로는 연애하기에는 척박한 환경이었기에 그 복잡미묘 멜랑꼴리 아련아련한 감정들이 드러나려다가 말고 사라졌더랬지.
우리 꼬맹이들의 연애세포는 얼마나 컸을까, 과연 우리 아가야들이 이 오묘한 감정선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기대감과 궁금증을 안고 아이들과 함께 <키다리 아저씨>를 만나게 되었다.
"키다리 아저씨는 왜 자신이 저비 도련님인 것을 밝히지 않았나요?"
"밝혀지면 허무할 것 같아서? 몰카 같은거 했을때 알려지면 허무하잖아요!"
"저 이거 엄마한테 물어봤어요! 제루샤가 시를 잘 써서 후원을 했다고 했잖아요. 글쓰기 실력을 버리기 아까워서 편지를 쓰라고 안밝힌거라고... 편지를 계속 쓰게 해서 글쓰기 실력을 더 늘리게 해주고 싶어서 그런거 같아요."
"그건 엄마 생각이고 네 생각은 어때?"
"저도 비슷한데... 근데 책이 그렇게 빨리 알려지면 너무 스포 같잖아요. 미리 알려주면 허무해져서 안읽게 될 것 같아서 더 읽고 싶게 하기 위해서 밝히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럼 키다리 아저씨가 저비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부분을 책에서 찾을 수 있을까?"
"아! 그림 보면 저비 도련님 그림자가 키다리 아저씨처럼 엄청 길어요!!"
그... 그림? 음... 그래... 그림...
직접 알려줄 수는 없고 입은 근질근질하고
나만 아는 썸의 단서들을 어떻게 알려줘야 하나.
키다리 아저씨인 저비를 저비라 부르지 못하는 이 슬픈 상황.
왜 말을 못해!저 사람이 키다리 아저씨다, 주디가 사랑하는 저비가 키다리 아저씨다, 왜 말을 못하냐고!!
<키다리 아저씨>는 고아원에서 자란 제루샤가 익명의 후원자를 만나 대학을 다니게 되며 후원자에게 쓰는 편지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이 후원자는 존 스미스라는, 우리나라로 치면 홍길동 같은 이름을 던져주며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말고 답장도 기다리지 말고 고맙단 이야기도 하지 말고 대학생활을 적은 편지를 정기적으로 보내달라고 한다.
제루샤에게 후원하게 된 계기가 그녀의 시 한편이었다는 설정은 수려한 문체들과 표현력들로 가득한 편지에 대해 수긍하게 만든다. 고아원을 벗어난 세상에 처음 발을 내딛은 새내기의 설레임을 지나 룸메의 삼촌인 저비를 만나며 이 책은 재미를 더해간다.
책을 읽어가며 독자는 어느 순간 어?어? 혹시??를 외치게 되고 어느 순간에는 역시!! 를 외치며 확신하게 된다.
저비야, 너구나 키다리 아저씨!
이어지는 편지글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앞으로 구르고 뒤로 구르고 옆으로 구르며 봐도 이건 저비의 질투네, 주디(제루샤가 스스로 만든 이름)랑 데이트 하고 싶어서 꼼수 부렸네, 저거저거 자기 맘대로 안되니까 짜증내네, 연애+결혼 n년차 아줌마 눈에는 꽁냥거리는 썸이 훤히 다 보인다. 이 세상 어느 추리소설보다 긴장감 넘치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헤아리고 말과 행동을 곱씹고 여러 상황을 대입해보며 과정을 추리하게 되는, 썸. 얘네 지금 그거 하는 중이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귀여운 아가야들 눈에 그게 보일리가 없다. 이 책의 진정한 묘미는 내 눈에는 훤히 다 보이는 그 애정전선, 본인들만 쌍방인걸 모르는 애타는 애정전선인데 그게 안보이는거다. 허허. 이걸 다 설명해줘야 하나. 그때부터 내 고민은 시작된다. 이걸 어떻게 본인이 발견한 것 마냥 살살 꼬드겨서 찾아가게 만든다지? 이거 모르고 끝나면 <키다리 아저씨>의 재미는 반쪽인데???
" 아... 맞아 그림에 그렇게 나오긴 한데... 그림 말고 책에 나오는 내용에서 알 수 있는 부분은 없을까?"
"저비 도련님도 키가 크다고 그랬어요!"
"음... 그래... 또 다른 부분에서 알 수 있는 부분을 찾아볼까?"
"어... 록 윌로우 농장? 키다리 아저씨가 가라고 해서 갔는데 농장 사람들이 저비 도련님을 알았어요!"
"맞아, 저비가 어릴때 농장에서 지냈다고 했잖아. 이때 알아챌 수도 있을 뻔 했는데?"
우리 어린이들, 점점 추리능력이 상승하고 있다. 나는 썸을 알아채는 능력치를 알고 싶었더 것 뿐인데 이녀석들, 탐정마냥 추리능력이 상승하고 있다. 그래, 결국 인간관계에서 감정을 알아차리는 방법도 추리능력이 있어야 가능한거니까. 행동의 인과관계 안에서 감정을 찾아내고 적절하게 반응하는 것. 타인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해하는 능력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더 풍성하고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는걸 알아가는 과정인거다.
누군가의 미소 속에 숨겨진 진심이나, 사소한 행동 하나에 담긴 미세한 감정을 알아채는 능력은 단순한 지식과는 다른 힘을 지닌다.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이 작은 공감의 힘이,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세상과 사람들을 마주할 때 한층 더 따뜻하게 다가가는 힘이 되리라 믿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관계는 모두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미묘한 감정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피어나는 법이다. 비록 서로의 마음을 직접 볼 순 없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다가가려는 그 노력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조금 더 아름다워진다. <키다리 아저씨> 속 제루샤와 저비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아이들이 배운 것은 단순한 연애 감정이 아니라, 누군가를 이해하는 과정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그 마음이 우리 삶에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지였다.
아, 물론 썸 감지 스킬은 굉장히 소중한 스펙이다.
우리 친구들은 오늘 고전을 읽으며 엄청난 스펙을 쌓은 겁니다. 쉽게 얻을 수 없는 스펙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