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차별주의자/김지혜/창비
★★★★★
책을 접한 건 군대를 별 탈 없이 전역해 민간인과 군인의 모습이 혼재된, 흔히도 많은 한국 남자들이 겪는 ‘군생활을 무사히 마친 나’에 대한 자부심이 사회에 나와서도 남아있는 시기였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참신한 제목은 나를 곧장 도서관으로 이끌었다. ‘사회문제를 다룬 학회를 운영했는데 이 책을 안 읽어볼 순 없지, 얼마나 노골적인 차별주의자들의 이야기려나?’라고 자신만만하게 책장을 넘겼다.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져왔고 앞으로도 가질 것이라는 내 도덕적 우월감은 프롤로그부터 산산조각나기 시작했다. 사회문제와 인권, 차별에 관해 연구했고 나보다도 사회문제에 훨씬 전문가인 저자가 “결정장애”라는 말을 쓰면서 겪은 에피소드를 보고 나는 책장을 덮을 수 가 없었고 이내 책에 빠져들었다. 책의 내용은 이렇다. 사회에서 차별이라는 것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이러한 구조가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어떻게 만드는지를 분석한다. 그리고 이런 차별이 존재하지만 계속해서 지워지고 있는 사회에 대해서, 마지막으로는 이러한 사회에서 차별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때야 하는지에 대해 다룬다.
차별이라는 주제는 민감하다. 한국 사회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20살이 넘어서 뉴스와 인터넷에서 가장 많이 다루고 가장 첨예하게 논쟁이 오고 갔던 건 공정과, 평등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러한 공정과 평등을 이야기하는 곳에서는 항상 공기와 같은 차별이 숨 쉬고 있었다. 저자는 이런 민감한 차별의 이야기를 알기 쉽게 사례를 통해 설명한다. 왜 이것이 차별인지에 관해 얘기할 때 마다 내가 일상적으로 했던 언행들을 되짚는 과정은 유쾌하지 않았다. 나름 자기객관화를 잘 한다고 자부하고 있던 내게 일상적으로 행했던 ‘차별’들은 나를 부정해야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내 기억의 방에 들어가 보니 친구들과 점심 메뉴를 고민할 때 수 없이 말했던 “아 결정 장애라 힘드네.” pc방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초등학생들을 보며 “급식충들은 따로 자리를 만들어줘야 돼.”, 아침에 올라온 난민에 관한 자극적인 인터넷 클립을 보고 난 후 “난민문제는, 음...난 솔직히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어느 정도는 이해해.”라고 답한 나의 모습이 있었다.
그냥 차별이 나쁘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사례와 능력주의의 논리, 성소수자 축제 이야기 등과 같이 익숙한 내용도 있었지만 이 내용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나의 ‘차별’과 ‘평등’에 대한 관심이 선택적이고 편협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밖에는 되지 않았다. 특히, 책에서 언급한 ‘교차성’의 영역이 인상 깊었다. 흑인이면서 이성애자인 남자는 흑인이 아니라면 주류가 되고, 이성애자이면서 백인인 여성에게 성차별을 빼면 주류가 되지만 여성이고 흑인이면서 동성애자라면 어떤가? 에 대한 물음은 내가 차별에 관해 정말 일차원적인 고찰 밖에는 하지 않았다는 것을 꼬집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사례부분을 읽을 때는 “공부하자, 그리고 늘 겸손하자.”라는 생각이 머리에 계속 멤돌고 있었다.
책장을 덮고 나서 한동안 도서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친절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주위사람들의 평가, 경청을 잘하는 자세, 책을 좋아하는 사람, 사회적인 문제에 공감할 줄 아는 사람. 이러한 토대 위엔 알량한 도덕적 우월감이 있었다. 차별이란 것에 대해 고찰하지 않고 그저 “여러분 차별을 하지 맙시다.”라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노력하는 내가 말이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일상적으로 한 내 언행은 상대방도 그것이 차별인지 모르고 넘어 갔을 테다. 앞으로도 ‘차별’에 관해 의식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습관적인 차별행위들은 크게 바뀌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을 위해 도움을 주고 싶다’ 라는 가치관을 가진 내게 ‘진정성 없는 고찰과 의식적인 노력 없이’는 힘들 것이라는 교훈을 주었다.
당연한 것은 공기와 같았다
한국, 서울 출생, 남자, 비장애인, 이성애자, 서울소재 4년제 대학, 군필. 나를 묶을 수 있는 키워드다.
살아오면서 존재의 특성으로 나를 부정당하는 경험은 거의 없었다. 차별이란 말은 솔직히 내겐 신문, 뉴스를 통해 듣는 이야기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이유에서였을까? 고등학교 3학년 이후 기울어버린 가세 때문에 대학생 내내 아르바이트를 달고 살았고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휴학을 했던 경험은 나를 “차별”이라는 주제보다는 거시적인 ‘사회구조’나 ‘계급’ 에 관한 관심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저자는 사회 구조와 차별의 영역은 결코 병렬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내가 봐왔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면해왔던 남의 일이 자신의 일이 되었을 때가 되서야 공감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나역시 그런 사람이었고 내가 대학생 때 연대를 위해 다양한 거리의 집회에 참여했던 이유는 이러한 ‘외면의 태도’를 피하고 싶어서였다. 세월호 집회 때는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고, 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이동권 시위에서는 장애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문제를 내가 해결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잊지 않고 기억해야겠다는 몸부림이었다.
우리와 우리의 교집합에서 만나자
“참 좋은데, 참 어렵네.” 내 가장 친한 친구이자 소울메이트인 친구가 이 책을 읽고 말한 소감이다.
나 역시 그 말에 백번 공감했다. 초등학교 교사인 그 친구는 교사가 되니까 좋은 점이 책모임이나 사회문제를 다루는 커뮤니티가 있다는 것이었다. 인권모임에서 활동하는 그 친구는 이 책이 인권교육을 할 때 정말 좋은 교재로 쓰일 것 같고 책모임에서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겠다고 했다. 저자는 ‘우리’라는 말이 ‘그들’을 전제할 때 배타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그 친구의 인권모임은 그 친구의 ‘우리’가 될 것이다. 나는 나의 ‘우리’를 만들어 나가고 싶다. 언젠가 그의 ‘우리’와 나의 ‘우리’가 만나서 ‘우리들’이 되길, 그리고 우리들의 연대가 ‘환대의 우리들’을 만들어 나가길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