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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언저리 Dec 18. 2022

크리에이터와 킬러

<버닝>.2017 - BEGIN AGAIN

*다량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허구로 짜여진 이야기들, 소설이나 영화는 흥미를 보장하는 대신 그 세계가 거기 있다는 가정을 확실히 해야 한다. 진실을 탐구하겠다는 철학가의 자세는 필요 없다. 그 세계관을 겸허히 수용하겠다는 리스너(Listener)로서의 태도가 중요하다. 이창동 감독은 지금 청춘들이 리스너의 자세를 유지하기 어려운 세계에 산다고 말한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뒤섞이는 허구 앞에서 귀를 열고 앉아있기가 불가능한 사람은 발 벗고 뛰어야 한다. 무엇을 위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종수(유아인 분)는 그런 인물이다. 그는 소설가 지망생이지만 소설을 쓰지 못한다. 세상이 수수께끼 같고 의문 투성이인데 그 의문을 자기 예술에 투영시키지 못한다. 필자는 한편으로 그런 종수가 안타깝다. 창작은 질문에서 시작될 수 있다. 하나의 정답만 갖고 온전한 창작물을 만들 수는 없다고 믿는다. 예술이라는 행위를 통해 질문을 하고 답을 얻을 수 있다. 문제는 종수 개인의 혹은 집안 사정이 그의 창작 생활에 자꾸만 훼방을 놓는다. 의문의 전화가 계속 오고 아빠는 감옥에 갈 위기고 집안 생계는 자기 몫이다. 창작을 할 여건이 안 된다. 사교성이 없어 친구도 없고 만나는 사람마다 어정쩡한 태도로 일관해 다른 사람들을 당황시키기 일쑤다. 몸 안에는 풀지 못한 질문과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이는데 그걸 풀어낼 해방구가 없다. 더 중요한 점은 창작자가 아닌 리스너로서의 태도다. 종수는 이야기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보다 진실과 허구로 분리시키려 한다. 벤(스티븐 연 분)의 이야기와 혜미(전종서 분)의 이야기가 진짜인지 아닌지 자기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열심히 뛴다. 탐색하고 수색하고 질문한다. 한없이 무기력해 보이던 종수가 열심히 뛰는 순간은 그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을 때다. 그는 창작자 이전에 리스너로서의 태도를 갖지 못한 수색자(SEARCHER)다. 예술을 수용해야 할 작품이 아닌 풀어야 할 수수께끼로 간주하고 파헤치려 든다. 그는 자기 주변을 둘러싼 삶과 예술을 동일시한다.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판토마임을 배우는 혜미는 종수에게 말한다.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귤이 없다는 걸 잊어'야 한다는 판토마임의 본질은 곧 리스너가 갖춰야 할 태도다. 그런 세계가 현실에는 없지만 소설책을 펴는 순간,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 그 사실을 잊어야 한다. 혜미는 그 태도를 판토마임으로 배우는 중이다. 다른 말로 그녀는 허구를 허구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한다.

  혜미는 칼라하리 사막에 사는 두 종류의 굶주린 자(헝거)에 대해 말한다.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 전자는 그냥 배고픈 사람이고 후자는 삶의 의미에 굶주린 사람이다. 그레이트 헝거를 만나기 위해 혜미는 아프리카 여행을 계획 중이다. 관객은 그녀가 그레이트 헝거를 만났는지, 아니 애초에 아프리카로 떠났는지도 알 수 없다. <버닝>은 혜미의 시점으로 전개된 적이 없다. 그녀에 관한 모든 정보는 불확실하다. 하나 확실한 건 그녀가 종수의 집 앞마당에서 부시맨의 춤을 출 정도로 삶의 의미를 갈구한다는 점이다.

  의미에 목말랐다는 혜미는 결국 종수와 같은 궤에 있나. 아주 그렇진 않다. 혜미는 종수보다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어린 시절 우물에 빠진 자신을 종수가 구해줬다는 얘기는 사실인지 알 수 없다. 우물이 거기 있었는지 없었는지 의견도 분분하다. 다만 의지박약이었던 종수를 자극시킬 정도로 이야기가 매력적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스토리텔러의 자질이 있다는 점에서 혜미는 종수보다 뛰어난 소설가지만 그녀 역시 종수처럼 삶의 의미를 파헤치려는 욕구로 충만하다. 판토마임이 이러면 무슨 소용일까. 삶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춘 그녀는 그 뜻을 거른다. 춤을 춘 혜미는 영화 중반부 이후로 모습을 감춘다.

벤은 어떤 인물인가. 앞의 두 사람과 다르게 개츠비처럼 살아가는 부잣집 남자다. 그는 '재미만 있으면 뭐든지 다' 한다. 농담을 즐기고 대마초를 피운다. 앞에서 언급한 리스너로서의 태도를 벤은 가졌다. 그는 삶의 의미 따윈 중요치 않고 오직 재미만을 추구한다. 소설로 치자면 그는 장르소설이다. 종수의 집 앞마당에서 벤은 비닐하우스를 가끔 태운다고 하는데 이 말은 불확실하다. 종수는 그 말을 믿고 동네 주변에 있는 비닐하우스들을 샅샅이 뒤진다. 잿더미는커녕 그을린 흔적도 없는데 벤은 비닐하우스를 태웠다고 한다. 그가 이 말을 한 때는 혜미가 자취를 감춘 때와 비슷하다. 혜미는 어디로 갔을까. 벤이 태우겠다는 비닐하우스는 혜미였나.


종수에게 혜미는 어떤 존재인가. 그는 사라진 혜미를 왜 그리 열심히 찾나. 학창시절 둘은 친하지도 않았고 성인이 돼서 우연히 만나 술 한 잔 하고 정사를 벌인 게 전부다. 스쳐갈 법한 인연인 그녀를 찾는 데 열중하는 그에게 혜미는 어떤 사람인가. 같이 이야기를 만들면서 삶의 의미도 찾아나갈 동반자다. 종수에게 혜미는 결국 그런 사람이다. 현실과 허구가 뒤범벅인 세상에서 같은 목적과 같은 욕구를 가진 사람은 혜미 뿐이었다. 진실을 파헤치는 동시에 허구(이야기)를 만들어갈 동료. 벤은 혜미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하고 다른 여자를 만난다. 종수에게는 혜미 뿐이다. 종수에게는 하나의 결핍과 또 하나의 수수께끼가 생겼다. 혜미가 사라졌고, 그녀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여기서 종수는 혜미를 상상하는 쪽으로 노선을 튼다. '거기 없다'가 아닌 '거기 있다'의 자세. 아버지는 감옥에 갔고, 하나 남은 소는 팔아버렸다. 벤의 일상은 그대로이고 종수의 일상은 더 빈곤해졌다. 종수에게 남은 건 이제 상상력뿐이다. 그에겐 '거기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여유가 없다. 혜미가 '거기 있다'는 상상력으로 자기 결핍을 채워야 하는 처지다. 근데 그 상상은 소설 한 권을 완성시킬 만큼 고상하지 않다.


벤은 그저 이야기를 메타포 형식으로 풀어냈을 뿐이지만,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인 종수는 그것을 해결하는데 온 정신을 집중한다. 아무것도 못하고 일상은 더욱 꼬여버린 그는 벤을 죽이고 만다. 벤을 살해한 동기는 무엇인가. 계급적 열등감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앞서 적은 문장대로 종수가 예술을 자기 삶에 동일시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이유일 수도 있겠다. 허구를 허구로만 받아들이는 여유의 부재는 한 인간의 상상력만으로 채울 수 없다. 결국 문제는 수수께끼 같은 세상에서 탈출하는 방법이다. 수수께끼에 대한 정답의 발견이 아니다. 아니, 세상에 대한 수수께끼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벤은 이 세상에서 한참 궤를 벗어난 인물이다. 거기다 종수에게 새로운 수수께끼를 던지는 인물이다. 종수가 느끼는 세상에 대한 의문은 누가 제공했나. 알 수 없다. 종수도 관객도 감독도 모른다. 다만 종수에게 새로운 수수께끼를 제공한 이가 벤이라는 건 안다. 이야기를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못한 종수는 그 메타포이자 수수께끼의 제공자인 벤을 죽이고 도망간다. 그는 세상에 대한 비가시적인 의문은 내버려두고 애꿏은 이야기꾼을 죽인 셈이다.


종수는 결국 이 세상이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다고 여전히 믿는 사람이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그는 세상에 대한 수수께끼가 '거기 있다'고 믿는 창작자다. 그런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 사는 인물이다. 왜 그럴까. <버닝>은 원인이 결국 '계급'에 있다고 말한다. 풍족한 사람은 세상에 대한 의문 없이 자기 세계를 편히 짓고 살지만 빈곤한 사람은 이 세상이 의문으로 쌓여 있다고 스스로 믿고 산다. 종수와 벤은 아예 다른 소설 속에 사는 인물이다. 다만 서로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여유의 차이가 있다. 서로가 창작자지만 계급에 따라 누구는 예술을 현실로 보고 누구는 예술 그대로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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