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 베프>의 은밀한 매력
<이마 베프>.1996 - BEGIN AGAIN
*다량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1.
<이마 베프>를 본 중간에 우리는 알 수 있다. 아, 이 영화는 단순히 카메라 뒷편에서 영화를 위해 헌신하는 스태프들의 이야기가 아니구나. 많은 분들의 수식대로 <이마 베프>는 '영화에 관한 영화'지, 영화 예술의 뒷면을 신랄하게 보여주는 리얼리즘 영화라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마 베프>의 카메라가 찍고 있는 쇼트들은 어딘가 모르게 은밀해서 영화를 들여다보는 일이 어떤 쾌감을 불러낼 때가 있다. 이 쾌감은 분명 엿보는 데서 온다. 우린 영화를 본다. 영화를 엿본다는 말은 영화의 이용 방식을 부정하는 표현 같다. 그럼에도 엿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 엿본다는 단어를 이번 글에서는 사용할 수 밖에 없다.
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 간에는 그 대상의 허용이 있어야 한다. 그 대상이 자기가 잠시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대상의 탈이 씌워졌다는 사실도 모른 채 어떤 이는 대상화된다. 엿보는 행위를 당하는 자의 불쾌감은 그 무지에서 비롯된다. 스크린 속 인물의 의도된 무지는 관객을 보는 주체로서 자유롭게 한다. 인물이 전라 상태에 있거나 몹쓸 짓을 해도 관객은 스크린 속 그의 행위를 뻔뻔하게 본다. 뻔뻔한 행동을 지켜보는 뻔뻔한 시선, 그리고 태도.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1895)이 개봉되던 해 달려오는 기차를 피해 도망치던 관객들과 지금의 관객은 영화를 보는 자세가 다르다. 영화는 관객을 안심시켜야 할 의무를 가지고 20세기를 살아남았다 . 영화와 관객 간에 맺은 무언의 약속은 스크린을 보는 동안 그 보는 행위 자체에 어떤 죄책감이나 불안을 심어주지 않는 것이다.
2.
1915년에 루이 푀이야드가 만든 <뱀파이어>를 감독 르네(장 피에르 레오)는 제목만 바꿔 리메이크 할 생각이다. 그는 처음부터 매기(장만옥)를 이 영화의 주연으로 점찍고 많은 반대에 부딪히면서도 꿋꿋이 그녀를 캐스팅한다. 프랑스어를 모르는 매기는 르네의 전작 중 몇 편을 자막도 없이 보고 그와 작업하기로 한다. 이유는 단지 그가 찍은 이미지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간혹 스크린 속 배우와 대사, 자막을 보느라 그 영화의 이미지를 놓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매기는 그 속박에서 자유로운 관객이었다. 이것이 그녀가 퇴물이 된 감독과의 협업을 택한 이유다. 르네에 대한 믿음은 그가 만들어낸 이미지에 대한 믿음이다. 르네가 이 영화를 무성이 아닌 유성으로 찍었다면 르네와 그녀의 만남은 성사됐을까?
르네는 매기가 나온 무협영화를 보고 그녀를 캐스팅한다. 배우로서의 매력과 신비가 있다는 게 이유다. 사실 르네의 말은 거짓말 아닐까. 사운드와 대본이 필요치 않은 무성영화에서 중국인 배우를 선택했다는 그 호기로움은 어쩌면 이미지 그 자체로 평가받겠다는 르네의 도전이라고 볼 수는 없나. 영화가 이미지의 예술이라는 사실은 그 자리에서 사운드와 대사, (할 수 있다면 유명) 배우를 걷어내야 알 수 있다. 르네는 자신을 향한 비난이 영화의 이미지가 아닌 그 부수적인 장치에 기인한다 생각해 무성영화를 시도했을 수도 있다. 이 시도는 위험하다. 유성에서 무성으로의 퇴행이 우려되지만 아무튼 르네는 이 계획을 안고 돌진한다. 이 용기는 어쩌면 이미지만 보고 그를 선택했다는 매기가 불어넣었을 것이다.
3.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가장 세련되야 할 예술인 영화가 소설에 패배했다고 주장한다. 소설은 독자가 직접 인물을 캐스팅하고 머릿속에서 공간을 그리지만 영화는 그러지 못한다. 관객은 찍어놓은 장면을 들여다보고 나오면 된다. 소설을 읽으면 그에 걸맞은 이미지가 생산되고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이미지 속 세계는 우리가 발 붙인 현실과 엇비슷하다. 그렇다면 같은 예술 분야인 영화를 보고 관객은 무엇을 떠올리나. 그럴 수가 있나? 영화는 그 자체로 이미지에 상응하는 세계를 찍는다. 소설은 빈 종이에서 시작되고 음악은 빈 악보에서 시작되지만 영화는 빈 공간을 가지지 못한 유일한 예술이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매기는 르네와 작업한다. 궁금한 점은 르네의 이전 작품에서 그녀가 무엇을 봤느냐다. 알 수 없다. 그녀의 생각은커녕 이전에 그녀가 본 영화도 모른다. <이마 베프>는 지금 찍고 있는 영화만 보여준다. 그의 이전 작품은 보여주지 않는다(이 사실을 알았다면 영화를 재감상하기를 추천한다). 우리는 그의 다른 영화를 볼 수 없어 매기가 봤다는 그 이미지에 무지하다. 따라서 르네가 지금 찍고 있는 <<이마 베프>>에 집중해야 한다. 매기만 봤을 르네의 이미지가 가진 마력을 지금 영화를 보는 우리도 느낄 수 있는 기회는 여기 있다.
하지만 관객 앞에 펼쳐진 화면은 거의 르네를 잡지 않는다. 뒤에서 묵묵히 혹은 과격하게 촬영을 돕는 스태프들을 찍는다. 그들은 르네의 무능함을 욕하고, 같은 스태프를 증오하며 촬영 중인 배우를 좋아한다. 이런 감정과 욕망은 모두 입에서 입으로 전파된다. 그들은 카메라를 든 창작자가 아닌 입 밖으로 토해내는 발화자다. 영화 제작을 하면서 르네 감독이 배척한 도구인 발화는 그들의 감정이 쏟아지는 유일한 창구다. 현실은 이미지가 아닌 발화가 기본이고 이미지는 발화에서 떠올려져 거기서부터 이어지는 허구다. 아사야스 감독은 발화로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스태프들을 찍는다.
4.
<이마 베프>가 보여주는 것이 있고 안 보여주는 것이 있다. 우리는 절반만 보고 그 절반을 못 본다. 스태프들이 입 밖으로 내뱉는 그 말이 거짓인지 진짠지 모른다. 사실을 찍으려면 그에 맞는 이미지가 필요한데 영화는 그것을 거부한다. 근데 이미지는 사실일까. 보통의 서사라면 인물의 이면을 보여주려 그 장면을 찍는다. 관객은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안 그러면 영화의 진행을 따라갈 수 없다. 사실상 관객은 영화의 뒤를 밟을 뿐이다. 그것을 따라가면 도달하는 곳은 극장 출구 뿐이다. <이마 베프>는 관객을 다른 곳으로 유도한다. 이미지가 곧 사실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애초에 관객이 열띄게 사실을 찾도록 독려하지도 않는다. <이마 베프>는 차분히 나아갈 뿐이다.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외줄을 타며.
말은 이미지를 생산하고 그 상태로 서서히 굳어간다.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유동적이지만 은밀해서 사람들의 실행 능력 없이도 한 사람의 이미지를 만든다. 그렇다면 이미지는 무엇을 생산하나. 발화와 비슷한 형태로 그것 또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할 수 있다. 그것은 이미지 한 장이 가십거리로 활용됐을 때다. 앞서서 매기는 르네의 영화를 자막도 없이 봤다. 프랑스어에 대한 무지가 새로운 시도를 유도했고 그 덕분에 매기는 르네 영화의 매력을 알았다. 같이 작업하고 싶다는 욕망, 그리고 행동. 영화의 이미지는 매기의 욕망을 낳았고 그것은 작업의 이행으로 굳어갔다. 이미지는 비가시적인 감정을 생산하고 두 발 달린 사람을 일어나서 무언가를 하게 만든다. 여기서 아사야스 감독은 이미지의 무서운 힘을 알고 있다. 가십으로만 쓰이는 이미지들. 진위 여부가 밝혀지면 내버려질 것들은 애초에 찍지 않는다. 중요한 건 진실과 거짓이 아니다. <이마 베프>의 목적은 이미지를 통해 진위가 판정난 후에 관객이 다시 말로 후퇴하는 길을 막는 것이다. 말이 이미지를 생산하면 이미지는 또 다른 무언가를 낳아야 한다.
5.
결말에서 우리는 르네가 만든 영화를 보지만 그것은 편집본이다. 제작 도중 르네가 도망갔기에 그 영화는 완성본이 아니다. 내용은 영화에서 나온 몇 번 안 되는 촬영지에서 찍은 장면이 전부다. 이미 우리가 본 장면만 편집해 효과로 덮었을 뿐이다. 여기까지 영화를 봤으면 <이마 베프>에서 기승전결을 제대로 갖춘 서사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원인 이미지에 따라오는 결과 이미지의 부재. 근데 그것을 누가 원인으로 정했나. 20세기부터 관객들을 앉혀놓기 위해 머리를 굴리던 영화사다. 원인에 따른 결말. 이것은 영화 이전에 소설 이전에 비극이 한 일이다. 그것들을 답습하는 일은 영화의 몫이 아니다. 영화는 가장 최근에 나온 세련된 예술로써 보다 세련된 방식을 가져야 한다. 아사야스 감독은 그러기 위해 우선 영화에서 기본적인 서사의 틀을 뽑아낸다. 연쇄적인 이미지가 하나로 어우러지기보다 분분히 흩어져 있어 언뜻 보면 영화 자체가 하나의 꿈처럼 보인다. 인간이 꾸는 꿈도 서사와 사운드 없이 이미지로만 채워져 있지 않은가.
영화를 엿본다는 두 단어의 조합은 이질적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면서 느껴지는 관음증적인 쾌락의 원인을 말할 때가 됐다. <이마 베프>는 남의 꿈을 훔쳐보고 있는 것 같은 어떤 은밀함을 준다. 마치 프레임 속 프레임인 이중프레임에서 '속 프레임'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꿈을 감상하는 동안 그곳에서 벌어지는 시작도 끝도 없는 욕망과 격한 감정의 겨루기는 오히려 결말까지 도달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더욱 쾌락을 선사한다. 이 영화를 재감상하고 싶다면 그것은 이 꿈으로 재입장하고 싶다는 것이다. 영화에 서사를 빼면 남는 것은 연쇄하는 이미지들의 총체인 꿈이다. 결말에 다다라야 느껴지는 서사의 쾌락과 달리 꿈의 쾌락은 중간중간에 은은히 느껴진다. <이마 베프>가 그렇다. 이 꿈에서 깨면 눈을 뜰 사람은 누구인가. 이 이미지에 매력을 느낀 매기였으면 한다. 또다른 꿈을 만들어낼 감독을 한 명 찾아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