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 크로키 시간이 처음으로 재미있다고 느껴지게 만든 남자 모델이 하나 있었다. 크로키실로 가는 미대 건물 복도에서 마주친 남자는 20대 중간쯤으로 보였다. 별로 크지 않은 키, 마르지만 다부진 몸매에 걸친 청자켓과 웨스턴 부츠가 잘 어울려 보였다. 새카맣고 푸석한 머리카락이 머리 꼭대기에 묶여 마른 갈대처럼 퍼져 있었다. 남자는 까맣고 커다란 라디오를 들고 왔다. 크로키가 시작하자 그가 들고 온 7,80년대 유물에서는 더없이 세련되고 감각적인 음악이 쉼 없이 흘러나왔다. 남자는 자신이 선곡해 온 음악에 맞춰서 유유히 자세를 바꿔 나갔다.
음악의 힘이었을까? 남자의 자세는 다양했고 능동적이었으며 때로는 저돌적이기도 했다. 마치 현대 무용을 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감각적 몸놀림이었지만 분명 무용수의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 모델은 크로키실 중앙에 위치한, 약 70 센티미터 정도 높이의 네모난 단상에 올라가서 포즈를 취한다. 그들은 단상 중앙에서 비너스나 다비드와 같은 관능적이고 정적인 포즈를 취한다. 공간에는 스케치북을 긁어대는 드로잉 소리만이 질주한다.
남자는 달랐다. 중앙쯤에 있던 남자가 갑자기 음악에 맞춰서 내가 있던 모서리 쪽으로 순식간에 날아들었다. 나는 아무나 평생 볼 수 없는 각도로 들이닥친 남자의 적나라한 알몸을 코 앞에 놓고 그렸다. 남자의 속눈썹은 진했다. 황소같이 커다랗고 맑은 눈은, 마치 진한 속눈썹이 먹 묻은 붓이 되어 그려놓은 듯했다. 얼굴엔 굵은 보랏빛 여드름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피부를 뿌옇고 어둡게 만드는 여드름 자국이 오히려 그의 눈빛을 더욱 깊고 선명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벗은 몸을 보는 것에 익숙한 미대생이었지만 그 남자에게 익숙해 지기 위해서는 약간의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했다.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그에게서 풍기는 매력과, 남자가 틀어놓은 감각적이 음악이 어우러져서 내 머릿속을 진동하게 했다. '이 남자는 누구일까?'라는 답 없는 주문만 맴돌았다.
크로키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간다. 모델이 자세를 바꾸기 전에 실루엣을 떠야 한다. 1초도 숨을 고를 시간 없이 모두가 숨 죽여서 모델의 몸을 관찰하며 쉼 없이 손을 움직인다. 머릿속에서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이 시간에 쪼인다. 눈으로 본 것이 그려지고 있는 크로키 북으로 시선을 보내는 시간조차도 지나친 낭비처럼 느껴진다. 스케치북을 보지 않고 연필을 쥔 손으로 커다란 원을 그려보면 처음 시작 점과 나중 도착점을 만나게 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크로키 시간, 우리는 눈으로는 모델의 몸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고 손으로는 시작점과 끝점이 만나도록 완성을 해야 한다. 모든 감각을 눈과 손, 그리고 그들을 잇는 신경에 초 집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발이 머리에 가서 붙어 있을 수도 있다. 크로키 시간이 끝나면 항상 전력 질주를 한 기분이었다.
그는 나를 멈춰 서게 했다. 내 눈은 그 남자의 몸을 샅샅이 뒤지며 '이 남자는 누구일까?'의 대답만 찾고 있었다. 남자는 내 시선을 꽉 붙들어 휘어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 같은 눈 속으로 나는 단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건 다행이었다. 나는 그를 몰래 훔쳐보지 않았지만, 나를 보지 못하는 그의 눈은 나를 더더욱 관음 하게 만들었다. 주저하는 손과, 마무리가 되지 않는 나의 크로키를 보며 문득 나는 마리오네트가 된 기분이 들었다. 마리오네트의 끈을 끊어내려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내 눈과 손의 신경을 다시 이어내려고 숨을 골랐다.
고등학교 때 입시 미술학원에 다녔다. 유독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있다. 대학생 아르바이트생이었다. 그림 실력이 대단했고, 항상 음악이 함께 했던 것 같다. 엉망으로 그려놓은 그 어떤 그림도 그 선생님의 터치를 거치면 순식간에 보정되었다. 답이 없을 것 같이 시커멓게 떡칠이 된 막막한 석고 데생 앞에 그는 다리를 가볍게 꼬고 앉곤 했다. 그러고는 섬세한 빛줄기를 순식간에 슥슥 찾아냈다. 그는 사람들의 눈을 정면으로 쳐다보는 대신 큰 눈을 바닥으로 떨구었고, 고개를 들어 석고상을 주시했다.
키가 작았고, 비율적으로 머리가 컸다.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그만의 독특한 예술가적 우수와 매력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선생님의 여자 친구가 대단한 미인이라고 했다. 그가 풍기는 매력정도라면 누구도 사로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툭툭 내던지는 직설적이고 반항적인 말투 속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입시생 아이들을 향한 따듯함이 들어 있었다. 그가 갖고 있는 '매력' 때문이었는지 나는 그를 볼 때, 마치 그의 눈 속을 파헤치듯 관통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선생님과 제자라는 타이틀이 그어놓은 경계선 때문인지 감히 사랑에 빠진다던가 흠모를 할 수는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람들은 그렇게 사랑에 빠지는 것 같다. 사랑에 빠지는 대신 나는 나보다 고작 몇 살 많은 선생님이 풍기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서 그걸 알아내려고 그를 샅샅이 뒤졌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도 그의 얼굴이 사진을 찍어 놓은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난다. 선생님은 속눈썹이 진했다. 황소같이 커다랗고 맑은 눈은, 마치 진한 속눈썹이 먹 묻은 붓이 되어 그려놓은 듯했다. 강렬한 눈빛에는 유순함이 있었다. 얼굴엔 굵은 보랏빛 여드름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피부를 뿌옇고 어둡게 만드는 여드름 자국이 오히려 그의 눈빛을 더욱 깊고 선명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