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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이 Dec 18. 2023

내가 사랑하는 것들

류이치 사카모토를 그리워하며 

면접을 보고, 면접 과제를 하고, 다시 이력서를 넣고, 필요한 공부를 하고, 통장 잔고를 확인하고, 실업급여 지급이 종료된 이후를 계획하고, 내가 이 길을 왜 선택했고 어떤 것에 흥미를 느꼈는지 기억하고, 다시 공부하고, 그러다 주저앉으면 다시 일으켜 세우고, 친구들과 어제 본 면접에 대해 얘기하고, 남자친구와 최근 투자에 성공한 전 직장에 대해 얘기하고, 그러다 요 근래 운동을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쯤.


류이치사카모토의 <오퍼스>가 개봉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여느 때처럼 엄지로 SNS 피드를 쉼 없이 올리며 머리로는 다른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갑자기 사카모토의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이제는 너무 귀에 익어버린 <Merry Christmas Mr. Lawrence>가 아니라 <The Sheltering Sky>로. 백발의 머리를 흔들며 입을 굳게 닫고 피아노를 치는 모습. 흑백의 화면 속에서 그의 백발 만이 빛나고 있었다. 


유명인들의 부고가 들려와도 나와는 관계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마음의 동요가 일어난 적이 거의 없었다. 누군가의 생이 끊어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사실은 그들은 나의 지인이 아니기에 대부분이 관심 밖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사카모토는 달랐다. 그의 음악을 접한 뒤로 나는 그가 하루빨리 건강해 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서는 혹시 암이 재발하지는 않을까 몹시 염려되었다. 자신의 몸이 부서져도 작곡하는 일을 멈출 수 없던 그. 비가 오는 날 양동이를 뒤집어쓴 채 양동이에 부딪히는 빗방울의 마찰음을 들으며 영감을 찾던 그. 빙하가 녹으면서 생긴 물줄기의 소리를 들으며 설레는 미소를 짓던 그. 명예와 부를 가져다주기 때문이 아닌, 그저 멈출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기에 한없이 지속하는 무언가를 가진 사람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그들을 우러러보게 된다. 존경스러움과 부러움이 섞인 채로.


그러나 내 걱정과는 무색하게, 결국 암은 그를 지배해 버렸고 이제 더 이상 그의 새로운 음악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의 부고 기사를 봤을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우려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구나. 처음으로 직접 만나보지 않은 사람의 죽음에 슬퍼했고 그가 그리웠다. 작곡을 위한 영감을 찾으며 즐거워하던 그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겠구나, 그의 새로운 영화 음악을 기대하며 개봉일을 기다리는 일은 더 이상 없겠구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의 죽음은 한동안 나의 삶을 쓸쓸하게 만들었다.


그의 마지막 연주를 영화로 개봉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갑자기 오래전 꿈을 다시 꾼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 아니던가.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꿈이고 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현실이었나. 하루하루 정신없이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었기에, 아름다운 것들과 그것들을 접할 때 오는 감동과 감정의 변주를 한동안 뒤로 했었다. 그러다 갑자기 사카모토의 선율이 들려오는 순간 모든 것이 일시정지 되었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것들은 바로 이런 것들이었구나. 그것들이 있어서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는데, 그것들을 뒤로 하니 나다움이 무엇인지 잊어버리고 있었구나.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눈앞에 닥친 일들에 지쳐 세상은 끔찍한 곳이라며 비아냥거리고 있었구나. 사는 것이 즐겁다고 생각했던 날들이 있었다. 앞으로 새롭게 보고 느낄 것들이 기대되어 설레는 마음에 잠들지 못했던 날들이 분명 존재했었다. 


사카모토 음악은 나를 깨웠고, 나는 내가 잃어버렸던 것들을 하나둘씩 되찾기 시작했다. 사카모토 음악이 어떤 신비한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걸 안다. 내가 그의 음악을 무척이나 사랑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를 잃지 않는다는 것은 부단한 되돌아봄과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를 잃지 않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내가 사랑했던 것들을 가까이 두는 것이다.


미래의 나에게 간절히 바라본다. 어떤 고난이 와도 나를 잃어버리는 일은 없기를. 그럴 때마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사카모토의 노래를 듣기를. 또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찾아가기를. 그리고 잠깐이나마 그것들 속에 파묻혀 편히 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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