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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과 친구

by 지은이

익숙하지 않은 환경과 답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 적응하려고 애써 노력하니 어딘가 텅 비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공허함은 내가 인생의 동반자로 여겨야 할 친구라는 사실을 29년의 인생에서 여실히 깨달은 바 있지만, 그럼에도 이 친구를 마주할 때면 여전히 어색하다. 오래된 이 친구가 낯설어 언제 봐도 따뜻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대학교 때 만난 이 친구는 내가 어떤 길을 선택해도 나를 믿고 지지해 줄 수 있는 사람이자, 험난한 이 세상에서 특유의 유연함과 여유로움을 잃지 않는 보물 같은 존재이다. '어야~'라고 반갑게 맞이해 주는 이 친구가 보고 싶어 냅다 전주로 가는 버스표를 예매했다.


서울에 놀러 온 그녀를 위해 항상 내가 맛있는 곳, 좋아할 만한 곳을 찾아 데려갔었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나를 끌고 이곳저곳을 데려갔다. 누구한테나 적당한 친절을 베풀지만, 누구한테나 무관심한 이 친구가 내가 좋아할 만한 곳이라며 전주에서 임실, 임실에서 서천, 서천에서 다시 전주로 운전을 하는데 '나 죽을 때까지 이 친구한테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가 좋아할 만한 것을 고민하고, 그 반응을 섬세히 살피는 행위는 마음이 벅찰 정도로 소중한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네가 좋아할 만한 무언가'를 말하는 이들은 자꾸 나의 충성심을 유발한다. 그들이 있어서 내가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 귀한 마음을 가진 그녀에게 언제나 그랬듯 고마웠고, 동시에 나의 마음이 그녀에게 제대로 전달되고 있을까 염려스러웠다.


다행히도 이번 여행에서는 그녀에게 내 마음이 전달된 듯했다. 그녀가 선정한 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하고 난 다음, 이번엔 내가 그녀가 좋아할 만한 곳이라며 서학동의 게스트하우스로 데려갔다. 늦은 밤, 서학동의 한 골목에 주차한 우리는 삐걱거리는 대문을 열고 귀여운 타일들이 깔린 돌길을 지나 옥탑방으로 올라갔다. 3평도 안 되는 방에 오래된 책들이 책꽂이에 가득 꽂혀있었다. 그녀는 방을 보고 90년대 드라마 속의 가난한 여주인공이 고시생활을 할 것 같다고 했다. 이 게스트하우스의 주인 분은 화가로, 게스트하우스에 묵는 손님들에게 서비스로 초상화를 그려 준다고 했다. 우리는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옥탑방을 내려와 거실로 향했고, 자리를 잡고 화가의 얼굴을 마주 보며 초상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거실의 한 벽은 화가가 그린 초상화들과 물감, 이젤, 팔레트 등 각종 미술용품으로 가득 차 있었고, 다른 벽은 문학동네의 창간호가 꽂혀 있을 정도의 빛바랜 책들로 빽빽이 채워져 있었다. 화가가 사용하시는 도구들은 모두 낡아 있었는데, 심지어 그의 필통은 고등학생 때부터 사용한 것으로 무려 40년이 된 것이라고 했다. 내가 신기해 자꾸 만져보니 웃으시면서 '문학동네 창간호는 못 드리지만 필통은 드릴 수 있어요'라고 하셨다.


밤은 이미 깊어 화가와 나, 나의 친구 세 명이서 두런두런 떠드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숙소를 예약하기 전 분명히 이 공간을 친구가 좋아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역시나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세상 모든 감동을 끌어모은 표정을 지은 채 '영화 속에 들어온 것 같아요' 라며 연신 탄성을 내뱉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익숙하고 순수하여 웃었다. 초상화 그리기가 끝나고, 각자의 얼굴이 그려진 종이 하나를 들고 보일러가 뜨끈하게 데운 옥탑방으로 들어왔다. 씻고 이불에 누웠는데, 그녀가 '나 낭만을 잊고 살았던 것 같아'라고 말을 걸어왔다.


'기숙사에서 새벽에 쭈그리고 앉아 프랑스 영화를 보고, 카페에 앉아 노래를 들으며 소설책을 읽는 너의 모습이 처음에는 이질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너는 정말 낭만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 인생에 낭만을 잃지 않고 살기란 어려운 일인데 넌 언제나 낭만을 추구하더라. 그런 네가 내 친구라 너무 행복해. 너와 함께 하면 나도 낭만을 잃지 않고 살 수 있을 것 같아. 요즘 참 힘들었는데, 인생이라는 것이 다시 아름다운 것이라는 걸 느껴.'


나에게 그녀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고, 그녀에게 나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서로를 왜 좋아하는지에 대해 뜬금없이, 꽤 자주 이야기한다. '너는 이래서 좋고 난 네가 이래서 대단하다고 생각해' 가식 없이, 날것의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살면서 몇이나 될까. 등이 지져지는 듯 뜨끈한 옥탑방에 누워, 기왓장에 떨어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말로 온기를 나누던 그 시간이 그립다. 그녀의 곁에 항상 내가 있음을 떠올리기를. 바쁜 일상에 휘둘려 내가 혹여 그녀를 무심하게 대하더라도, 또는 그 반대가 되어도 서로가 서로에게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이 글을 쓰며 한 글자마다 그녀와의 시간을 그린 덕분에 그녀가 다시 보고파진 나는, 그녀에게 '사랑해'라는 메시지를 보내본다. 그럼 그녀는 뜬금없는 애정 문자에도 '왜' 인지 묻지 않은 채 '나도 사랑해'의 메시지로 답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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