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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어

by 지은이

'사람으로 인해 받은 상처와 고단함을 사람 덕분에 회복하는 아이러니가 바로 인생일까요?'


2022년 5월 31일 스물일곱의 내가 적은 글이다. 이제는 이 문장에 조금은 무뎌진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으로 인해 받은 상처와 고단함은 비로소 둔해져 추억 속으로 남을 문장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너무 성급했나 보다.


좋아하지 않거나 불편하더라도 어떻게든 함께 해야 하는 이 사회는, 나로 하여금 사람이 싫어져 사람이 없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게 만든다. 나에게 호의를 갖고 있든 갖지 않든 상관이 없고, 그저 내 눈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으면 하고 속으로 빌게 된다.


11월 마지막 주에 만난 사람들은 나의 에너지를 남김없이 소진시켰으나, 나는 고장 난 비디오테이프처럼 마냥 늘어지고 싶은 몸뚱이를 꾸역꾸역 일으켜 어떻게든 일을 진행시키게 만들었다. 사람이 싫어. 조금이라도 별로면 평생 보지 않고 싶어. 사람은 끔찍한 존재야. 사람이 사람 없이 살 수 있을까? 그렇게 백 번을 생각하니 주말이 되었다. 주말에는 커피 모임이 있었다. 바리스타와 함께하는 라테 취향 찾기. 그렇게 고대하던 모임이었는데, 사람이 싫어지니 하나도 기대가 되지 않았다.


주말 내내 무표정으로 쳐져 있던 나를 씻기고 옷을 입히고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남영동 쪽 골목길은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그 골목길 어느 한 구석에 있는 작은 카페에서 진행하는 모임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다정하고 편안한 인상의 사장님이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함께 라테를 마시며 사장님의 설명을 듣고, 다시 라테를 마시고 이야기를 하고... 낯선 눈들을 피하지 않고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질문하는 내 모습을 보니 잊고 있었던 내가 생각났다. 사람을 좋아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온몸으로 반응하는 것이 내 장점이었는데.


모임에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이니, 그들과 내가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 늘어났다. 말할 때 나만 보며 이야기하는 분도 계셨다. 누군가가 이야기할 때 눈을 마주치며 온몸으로 경청해 주는 것, 그리고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 질문을 던지는 것. 그것만으로도 상대의 시간과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의 질문과 농담에 웃음을 터트리는 사람들을 보는 게 진심으로 즐거웠다. 눈빛으로 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보내는 이들의 행운을 빌었다.


집에 돌아와 카페 사장님의 계정을 팔로우했다. 카페에서 나눴던 온기가 아직 내 곁에 남아 있었다. 게시글을 확인해 보니 5분 전에 올리신 글이 있었다. '모임의 회고'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글. 질문도 많고 에너지도 좋아서 너무 감사했다며, 주말 오전에 좋은 사람들과 함께해서 행복했다는 이야기.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글을 읽고 있는데, 사장님도 나를 팔로우했다는 알림이 떴다. 아, 이렇게 반가운 인연이 또 한 명 생겼다. 행복하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은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_ 영화 <벌새>


11월 마지막 주는 사람 때문에 삶이 지겨워져 버렸는데, 12월의 시작은 사람 덕분에 삶이 아름다워졌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지 알다가도 모르겠는 날들. 삶의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아 신나다가도, 이내 까먹고 다시 우울해지던 날들. 그래도 어쩔 수없이 난 아직 사람이 좋나 보다.


'나와 함께 있으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라고 20살의 내가 당시 만났던 남자친구에게 말했었지. 그때 그는 나에게 '참 아름답다'라고 말했던가.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아니 이제 그런 걸 바라는 나는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가 나에게 하는 기만이었다. 네가 어떻게 사람을 안 좋아할 수 있어?


아무쪼록 20살의 내가 수줍어하며 건네었던 저 문장은 아직 나에게 유효하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된 하루였다. 아, 살아가는 일이 또다시 신나 버렸다. 앞으로 어떤 인연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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