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일상적으로 오해한다. 자신이 경험했던 사람들에 빗대어, 자신의 숨겨진 옹졸함에 빗대어, 또는 자신이 기대하는 바에 빗대어 상대의 행동이나 말을 멋대로 해석한다. 그게 나쁜 것이냐,라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다. 이는 인간의 본성 같은 것이라 긍정과 부정의 말로 단정 짓는 순간 인간의 존재 자체를 좋고 나쁨으로 단정 짓게 되니.
평생을 마음 한편에 고이 모셔두고 꺼내 볼 책 한 권이 있다. 최은영 작가 단편집 <내게 무해한 사람>. 그중 '모래와 공무' 편을 가장 좋아한다. 주옥같은 문장들이 많아 읽을 때마다 마음이 아리지만 동시에 수치스러움과 연민을 느끼기도 한다. 마치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선미(나비)는 부족함 없이 사랑만 받고 자란 것 같은 모래의 나약함을 단죄한다.
'너처럼 부족함 없이 자란 애가 우리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느냐고. 네가 아무리 사려 깊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네가 뭘 알아, 네가 뭘. 그건 마음이 구겨져 있는 사람 특유의 과시였다'
'모래는 왜 이렇게 나약한 걸까. 그때의 나는 생각했다. 겉으로는 울고 있는 모래를 달래면서도 속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모래를 단죄했다. (...) 세상에 얼마나 많은 진짜 고통이 있는데, 고작 이런 일로 애처럼 울고 있다니'
모래도 자신의 나약함을 알고 있었고 그런 자신을 미워했으며 그렇기에 그녀만의 가면으로 친구들을 대했지만, 모래가 아꼈던 선미는 그녀를 오해했다. 선미의 마음속에는 사랑받지 못했던 자신의 유년 시절과 그 시절을 겪게 한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항상 결석처럼 콕 박혀 있었다. 아물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밝고 여린 모래를 아름답다 여기면서도 열등감을 느꼈다. 모래를 자신과 다른 사람으로 단정 짓고 모래의 나약함을 증오했다. 그 정도쯤이야 울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그 보다 더한 일을 겪은 공무와 나도 이렇게 살아가는데 그런 일로 울어서는 안 된다고.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아. 그렇게 살아서는 안돼, 모래야.
한때는 나도 그런 뒤틀린 마음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친구들은 내가 밝아서 좋다고 하는데 혼자 하교할 때 내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숨기지 못하고 들켜버린 나의 불행을 위로하는 누군가의 위로에 제대로 대꾸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리며 속으로 '너네들이 뭘 알아'라고 웅얼거렸다. 이제는 불행이란 상대적인 것이라 마음이 불행하면 누구나 불행할 수 있는 거라고. 감히 누가 불행의 정도를 따질 수 있겠냐고 큰 소리로 말하지만, 그때는 나를 제외한 세상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 보였다. 적어도 내 주변은 나와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이 없어 보였다. 그렇기에 그 누구에게도 나는 이해받을 수 없고,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을 거라며 나의 뒤틀림에 당위성을 부여했다.
각자 나름의 불행과 행복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의 뒤틀린 마음이 점차 회복되고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사람이라는 존재를 이해하고 수용하게 되니 이제는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사람에 대한 기대를 멀리하게 되었다. 사람이란 존재는 나에게 얼마든지 상처 입힐 수 있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을 오해하는 나를 참지 못했고, 오해했다고 여겼지만 사실이었을 때는 더욱 괴로워했다.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벗어나고 싶어 결국 혼자 있는 나를 택했다. 가끔은 일주일만이라도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꼭꼭 숨어버리고 싶었다.
'외로움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사람에게 연연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상하고 망가지고 비뚤어진다고 생각했으니까. 구질구질하고 비뚤어진 인간이 되느니 차라리 초연하고 외로운 인간이 되는 편을 선택하고 싶었다.'
매일 달성해야 하는 퀘스트가 있는 삶에서 비뚤어진 마음이 무엇 때문인지 채 알지도 못한 채 서둘러 잠을 청하는 일상이 반복되다 보니 누군가를 알아가고, 미워하고, 애정을 주는 일이 귀찮게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은 나를 자꾸 찾아오고, 풀지 못한 감정은 엉켜 있다가 오래된 친구였던 우울을 불러온다. 그럼 나는 생리 주기가 적힌 달력을 보며 '생리 전 증후군'이라는 말로 나를 안심시키려 한다. 우울하면 사람을 찾게 되고 사람을 찾게 되면 결국 실망하게 될 것이며, 실망하지 않더라도 사람에게 의지하려는 나 자신이 싫어질 것임을 알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희망과 위로를 얻는 아이러니를 매번 저지르고 만다.
누군가 나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고 묻는다면 '부처와 같이 열반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누군가가 내 눈을 바라보며 나를 비난하고 흠집 내려한다 해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그저 허허 웃고 마는 사람. 그런 경지를 꿈꾸며 나는 매일의 나를 의심하고 경계하며 다독인다. 그런데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부처의 모습을 바라는 것 자체가 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닐지. 그렇기 때문에 때론 고통스러워지는 것이 아닐까.
나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한 번씩 혼자 여행을 떠난다. 사람에게 의지하면 안 된다는 마음은 아직도 내 속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질 때마다 기대가 무너졌을 때 무력감에 허우적거리던 내 모습이 무서워 꾸역꾸역 혼자 일어선다. 나는 이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이왕 태어났으니 잘 살아보기 위해 나에게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 내 삶의 터전에서는 내가 너무 고생해 나에게 의지할 수 없으니 공간을 바꾸어 나를 환기시키려 한다.
7월에 자주 가던 북스테이를 예약해 두었다. 그곳에서 책 속에 파묻히거나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자유로워할 나를 생각하니 설렌다. 어떤 생각과 마음이 답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답은 없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 이렇기도 저렇기도 한 것이니까. 그래도 이렇게 가끔 엉킨 마음을 풀어 보려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고맙다. 부처가 되진 못해도 뒤틀린 마음이 되살아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으니. 적어도 나는 무엇을 할 때 내가 행복해하는지는 알고 있으니까. 그냥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종종 안겨 주며 살아가다 보면 언젠간 부처와 같이 무던하고 단단한 이가 되어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