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에 처음 만들어졌고 이후 같은 제목으로 1954년, 그리고 1976년에 리메이크되었던 작품이죠. 특히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출연했던 1976년작은 <스타탄생>이란 제목으로 국내 팬들에겐 꽤 각별히 기억되고 있어요. 유명 배우이자 가수인 노먼이 우연히 무명 여가수 에스터를 만나 그녀를 스타로 키워가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렇게 동화처럼 만나 뾰로롱 사랑에 빠지고 나란히 톱스타가 되어 잘먹고 잘살았다는 신데렐라 이야기로 마무리되었으면 좋았겠지만,지난 80여 년 동안 네 번이나 만들어진 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새드엔딩이었죠.
정상에 있는 남자는 사실 알코올과 약에 푹 쩔어 있습니다. 그를 통해 우연히 큰 무대에 서게 된 여자는 점점 새로운 스타로 비상하게 되죠. 여자가 그렇게 빛나는 별이 되어갈수록 남자는 점점 빛이 바래 추락해가요. 운명처럼 서로를 흔들어 놓지만 결국 함께 갈 수 없는 연인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주인공들의 직업이라든가 세부 디테일에서 살짝 차이들이 있지만 오리지널이라 할 수 있는 1937년 작품과 1954년, 1976년 작품 모두 이 서사의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거죠.
배우 브래들리 쿠퍼가 감독 연출 데뷔작으로 선택한 이 작품 <스타 이즈 본>(2018년)은 어땠을까요. 큰 줄기는 주인공들이 뮤지션으로 바뀌었던 1976년작의 리메이크에 가깝습니다. 환호성 속에서 공연을 하는 유명 가수 잭슨 메인(브래들리 쿠퍼)의 모습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동시에 그가 심각한 알코올 중독에 빠져 있는 불안정한 상태란 걸 비추며 시작되죠. 공연이 끝나자마자 또 술 마실 곳을 찾아 헤매던 그는 어느 드랙퀸 바에서 무명가수 앨리(레이디 가가)를 만나게 돼요. 술에 취한 이 톱스타의 느닷없는 들이댐에 앨리는 당연히 미심쩍어하죠. 한데 잭슨은 그녀를 자신의 공연에 초대합니다. 얼핏 들었던 그녀의 노래를 다시 편곡해 깜짝 이벤트로 듀엣을 부르는 그 장면은 전형적이고 신파적이지만, 또 동시에 '매혹적'이죠. '음악'을 공통분모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 두 남녀. 이후의 흐름은 역시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습니다. 두 사람의 처지는 반전되고 각자의 운명도 갈라져 가죠. 그리고 피할 수 없는 파국.
나에게 말해봐
공허함을 채우려다 지치진 않니
그렇게 악착같이 버티는 게
이젠 힘들진 않니
We 're far from the shallow now
원래 이 작품은 2011년 즈음에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연출을 맡기로 하고, 여주인공 앨리 역에 비욘세가 내정되어 있었다고 하죠. 담담히 절제된 분위기 속에서도 섬세한 감정들을 묵직이 담아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스타일을 감안해보면 그렇게 진행이 되었어도 꽤 괜찮은 작품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 분위기의 <스타탄생>. 머릿속에 딱 떠올려지네요. 한데 이런저런 이유로 이 작품은 그 애초의 계획이 무산되고 바통이 '신인 감독' 브래들리 쿠퍼에게로 넘어왔죠. 그리고 그는 화려한 퍼포먼스 가수로 알려진 레이디 가가를 수수한 이미지의 여주인공 앨리 역으로 강력히 천거했습니다.
2017년부터 제작에 들어간 <스타탄생>의 이 세 번째 리메이크 작품은 이듬해 2018년 8월, 이전작들을 기억하는 전 세계 영화팬들의 큰 기대 속에 그 모습을 드러냈었어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야기의 큰 줄기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만남은 우연적이고 사랑은 급작스럽고 보기에 따라서 결말은... 뜬금없기도 하죠. 통속적이고 신파적으로 보이는 일부 설정들을 애써 피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자체를 새롭게 바꾸거나 뒤틀어버리는 모험을 걸진 않습니다만 대신에 영화는, 인물들의 세세한 감정선들에 더 깊이 카메라를 집중시켜요. 한데 그 시선들이 생각보다 굉장히 차분히 절제되어 있다는 느낌입니다. 감정을 직접 폭발적으로 표출시키자면 눈물 콧물 다 뽑아내서 서로 분노하고 오열하며 패악을 칠만한 장면들로 만들어질 여지가 실은 적지 않죠. 술과 약의 힘을 빌리지 않곤 정상 생활이 점점 불가능해 보이는 잭슨 메인(브래들리 쿠퍼)의 모습은 앨리(레이디 가가)가 더 큰 명성과 인기를 얻어가는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더 위태로워 보입니다. 예상되는 일반적인 흐름대로라면 그는 그녀의 모습에 시기하고 질투하며 온갖 찌질한 모습을 보이겠죠. 그를 내내 지켜보는 그녀는 버티다 지쳐갈 거예요. 그러다 그녀를 흔드는 새로운 스윗 가이가 나타나고, 두 사람의 감정싸움은 점점 더 파국으로 흐르는 걸까요? 이미 수없이 봐왔던 그런 패턴으로?
잭슨은 점점 추락하고 반면에 앨리가 톱스타로 커가는 과정에서의 갈등은 이전작들의 흐름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만, 이 작품은 그 이면에 숨겨진 감정들을 '사랑' 그 자체로만 국한시키고 있진 않아 보입니다. 좀 더 폭넓은 삶의 질곡들, 그것으로부터 비롯되어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흔드는 상처들을 함께 품고 있어요. 싸우고 다투며 위기를 맞이하지만 둘의 사랑은 사실 전혀 변함이 없었습니다. 사랑이 흔들리거나 그 사랑이 변해가는 이야기가 아니었죠.
깊이 사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만으로 다 품기 힘든 개인의 깊은 상처와 고통에 관한 이야기란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그 아픔들에 관해 이 작품이 묵묵히 감정들을 담아내는 방식이 저는 개인적으로 참 좋았습니다. 음악영화답게, 감미로운 가사의 노래들이 들려오는 순간엔 마치 마법처럼 들떠 오르게도 만들지만 그 무대 아래서의 두 사람은 작고 사소한 것들, 전해지지 못하는 것들, 차마 말하기 힘든 것들로 실은 아파하고 힘들어하죠. 어쩌면,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삶의 up and down에 관한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형을 닮고 싶었어, 아버지 말고
모든 게 다 당신 탓이에요
그럼 당신들은,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보편적 시각에서 보자면 잭슨 메인(브래들리 쿠퍼)의 마지막 그 결정은, 이기적이었습니다. 남겨진 사람들을 더욱 힘들게 만들 수도 있는 무책임하고 못난 결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자신으로 인해 일어난 일들에 대한 책임감이나 의무감도 저버린 것이었고 결국엔 그토록 벗어나려 했던 불우한 기억들에 결국 스스로를 매몰시키고 만 꼴이잖아요. 뜬금없어 보이는 이 결말부의 급작스러운 전개에 뭔가 모를 찝찝함을 느끼는 관객들도 적지 않았나 봅니다. 얼마 전 우연히 읽게 된 어떤 리뷰에서 이 영화에 대한 신랄한 혹평을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려고 알코올 중독 재활원까지 다녀놓고, 기껏 앨리 기획사 매니저의 몇 마디 비난에 그렇게 '쉽게' 못난 결정을 내리냐는 거였어요. 그런 그의 죽음이 뜬금없고, 느닷없고, 개연성이 없다는 의견을 쭉 읽었습니다. 이 영화에 대해 호감을 느끼지 못하는 관객들의 의견들은 대체로 그렇게 수렴되는 듯해 보였어요.
일리가 있는 의견이기도 해요. 처음 이 작품을 감상했을 때 제 느낌도 살짝 비슷했습니다. 영화는 술과 약에 쩔어있는 잭슨의 과거사가 그렇게 '친절히' 그려지진 않거든요. 스쳐가는 주위 사람들과의 짧은 대사들을 통해 얼기설기 어렴풋이 짐작하게 만들 뿐이에요.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로부터 받은 어린 시절의 상처가 그를 평생 옭아맨 듯한데 그럼에도 영화는 그 흔한 회상 장면 하나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저 불안하고 위태위태한 그의 현재만을 담담히 비출 뿐이에요. '사랑'으로 모든게 치유되는 평범한 로맨스 영화의 법칙을 따르면 좋겠지만... 실은 이 이야기의 원작 자체가 그런 결말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얘기였죠. 오히려 이 작품은 그 흐름 속으로 더 파고 들어가 남자 주인공 잭슨 메인의 감정들에 좀 더 깊게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나서부터 오히려 지난 장면들을 떠올리며 먹먹한 여운이 남겨지는 건 바로 그 때문이죠.
뜬금없고 개연성 없는 죽음이라.
그럼 개연성 있는 죽음이란 어떤 건가요. 모든 죽음은 다 그렇게 뜬금없고 개연성 없어서 슬프고 아픈 거잖아요. 잭슨 메인의 경우를 다시 한번 돌아볼까요. 어린 시절 어머니의 부재와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으로 그에게 남은 가장 큰 트라우마는, 그 기억들 자체라기보단 긴 세월 그로 인해 잭슨이 모든 나쁜 일들을 다 자신의 탓이라고 여기게 만들었다는 점이죠. 오랫동안 그의 곁에서 뒤를 돌봐준 배다른 형과의 관계도 그랬을 겁니다.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혈육이었을 테지만 서로에게서 느껴지는 아버지의 흔적으로 인해 동시에 서로를 은연중에 증오했을 테죠. 아버지로부터 벗어나는 게 평생의 목표였겠지만 술과 약에 의존하는 자신의 모습은 오히려 점점 아버지를 닮아 갑니다. 가장 증오하면서도 한편으로 또 가장 큰 아픔으로 남은 존재. 무너지지 않도록 자존감을 지켜주던 '음악'이라는 그 끈은, 남몰래 서서히 잃어가고 있는 청력으로 인해 점점 끊겨가고 있어요.
그런 와중에 앨리를 만났습니다. 평생 어머니의 부재 속에서 살아왔던 잭슨은, 당차고 심지가 굳은 앨리에게서 연인으로서의 애정뿐 아니라 어머니에게 느껴지는 일종의 따스한 모성을 느끼기도 했을 거예요. 그녀의 존재 자체가, 어느새 자신이 계속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었을 테죠.
그. 런. 데.
앨리가 가장 행복한 순간에 그 '사고'를 쳤던 거죠. 자신에 대한 극도의 모멸감으로 모든 것들이 툭 끊겨버리기 직전, 누군가의 그 가벼운 비난이 결국 트리거가 되어 버린 거예요. 그래요, 그 비난의 당사자로서도 모든 상황들을 지켜봐 온 관객의 입장에서도 그 비난은... 누군가를 죽게 만들 만큼의 나쁜 말 자체는 아니었잖아요. 한데 잭슨에겐 달랐을 겁니다.
'쓸모없는 놈'이라고 욕을 퍼붓던 아버지와 어느새 똑같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절망감, 그래서 결국엔 자신도 앨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쓸모없는 놈'이 되어버리고 말 거란 깊은 절망감이 결국 그를 집어삼켰을 거예요. 그가 버텨낼 수 있는 아픔의 임계점을 넘어버린 겁니다. 그녀 곁에 계속 남으려고 하는 게 오히려 더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거라는 결론을 내렸을 테죠. 그게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아무도 모르게, 그는 벼랑 끝에 간신히 서 있었습니다. 단 한 번 가벼운 밀침만으로도, 천 길 아래로 떨어지고 마는 그런 삶의 극단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거죠. 사실은.
당신 노랠 불러봐요, 앨리
Always Remember Us This Way
네, 영화가 끝나고나서부터 오히려 점점 더 먹먹해집니다. 비극적 상황이 보이는데도 더욱 영화가 담담히 절제되는 느낌이라 그래서 더 짙은 연민의 심정이 몰려들어요. 그래 봤자 끝내 자신만 편해지는 '이기적인' 결정이었는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마지막 심정이 어땠을지를 쉽게 속단할 순 없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135분간 쭉, 몇 번이나 지켜봤음에도 내가 본 건 잭슨 메인의 지극히 '일부'일 테죠. 가장 사랑했던 앨리 역시 그의 모든 것들을 알고 이해하며 공감하진 못해요. 그 아버지에게 똑같이 상처 받으며 평생을 애증으로 지내왔을 그의 배다른 형도, 잭슨의 모든 걸 다 알진 못했으니까. 한데 그건 잭슨 메인 스스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만 힘든 짐을 짊어졌다고 생각하고 긴 세월 스스로를 망가뜨려 왔지만 그 역시 자신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타인들의 마음을 다 읽진 못한 거죠. 자신과는 또 다르게, 앨리가 생각보다 참 강인한 사람이란 걸 잭슨이 제대로 알았더라면 어쩌면 이 이야기의 결말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그것과는 완전히 다를 수도 있었을 거예요.
화려한 음악과 무대와 환호성들이 가득한 음악영화의 외피를 띠고 있지만 실은 이 작품 역시 굴곡 가득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린 모두 나 자신과 타인들을 잘 알고 있다고 판단하지만 실은 그렇지 못하잖아요. 생각보다 서로를 알지 못한다고 느껴질 때가 더 많았습니다. 섣불리 판단하고 속단해요. '그런 건 별거 아냐', '겨우 그 정도로'라는 말을 의의로 참 쉽게 주고받기도 하죠. 희망이 없던 앨리를 일어나게 만들어준 것도 잭슨의 단 몇 마디에서부터였습니다. 그런 잭슨을 결국 무너지게 만든 트리거도 결과적으론 누군가의 단 몇 마디에서였죠. 누군가를 북돋우는 것도, 밀어 무너뜨리는 것도 어쩌면 생각보다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비롯될 수 있을 겁니다. 뜬금없고, 느닷없고, 개연성 없는 인생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없을 거예요. 깊이 들여다보려 하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죠. 평범해 보이는 세상 그 누구라도 어쩌면 우주와 같은 넓이의 아픔을 제각각 가슴 속에 품고 살아가고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