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꺼 손대지 마요, 엄마 아빠
아 됐어, 뭔 상관이냐
그럼 좀 어때서
저기 다리 건너 신과 요괴들의 세계
이른 아침, 꽉 막혀 있는 차량 행렬 사이에 끼어 바다 위 대교를 넘어갑니다. 그 대교를 넘으면 현실의 나는 신과 요괴가 사는 세계로 들어가죠. 그곳, 마녀 유바바가 운영하고 있는 3층짜리 건물에 들어서면 내 이름은 사라져요. 20여 년 전쯤 마녀 유바바와 그렇게 계약을 맺었습니다. 거기선 이름 없이 그냥 몇 년에 한 번씩 바뀌곤 하는 '직함'으로만 불려요. 처음엔 어색했지만 지금은 그게 더 익숙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들어서게 되면, 몸 위에 남들에겐 보이지 않는 껍데기를 뒤집어써야 하죠. 나의 진짜 얼굴과 표정, 눈빛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예요. 그곳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걸 꽤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깨달았죠. 모든 걸 다 말하고 보여주고 표현하면 안 됩니다. 되도록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게 좋아요. 그곳은... 생각보다 무서운 곳이거든요.
그 보이지 않는 껍데기가 단지 신과 요괴들을 모실 때만 필요한 건 아닙니다. 첨엔 어리바리해서 몰랐지만 한참 뒤에야 알 수 있었죠. 함께 일하는 다른 동료들 역시 어느 정도씩 자신을 가려주는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걸. 그곳의 영업이 끝나고 많은 신과 요괴들이 자리를 비우게 되면, 우리는 하나둘씩 그 껍데기를 벗어두고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자신이 있던 세계로 돌아와요. 그 다리를 건너오면 원래의 이름도 다시 찾게 되죠. 매일매일. 그렇게 한 달이 지날 때마다 마녀 유바바는 우리들 손 위에 일정량의 사금을 꼬박꼬박 떨어뜨려 줍니다.
가끔씩은 강물의 신이라든가, 큰 손님이 오셔서 건물 전체가 들썩일 때도 있어요. 그럴 땐 마녀 유바바가 꽤나 흥분하며 기뻐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신과 요괴들 모두 그렇게 개운해진 표정으로 돌아가지만 때론 건물을 뒤집어엎거나, 심하면 우리 중 누군가를 확 잡아먹어버리기도 하니까 조심해야 하죠. 가끔씩은 티도 나지 않게 들어왔다가 순식간에 무섭게 변해버리는 가오나시도 있어요. 가오나시는 옆의 존재들을 똑같이 가오나시로 변하게도 합니다. 찾아오는 신과 요괴들이 가오나시가 되기도 하지만, 함께 일하고 있는 우리들 중 하나가 어느 날 폭주해서 자신이 누군지 망각해버리면... 이내 서로를 잡아먹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그 보이지 않는 껍데기가 늘 지켜준다고 믿었습니다. 그걸 뒤집어쓰고, 어떤 일을 겪든 그곳에서 딱 요구되는 모습대로만 조심히 몸을 낮춰 지내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해내지 못하면, 일을 뺏기게 됩니다. 일을 맡지 못한다는 건 그곳에선 존재 가치가 없다는 것과 같아서 곧 소멸되어버리고 말 거예요. 그리 되면 나뿐만 아니라 내 사랑하는 가족들까지도 나쁜 마법에 걸려 영영 돼지로 변해 버릴지도 모르죠. 생각만 해도 무서운 일이잖아요.
근데 요즘 가끔씩 걱정이 좀 될 때가 있습니다. 전에는 그 보이지 않는 껍데기를 꼬박꼬박 그곳에 잘 벗어두고 왔는데... 지금은 그걸 벗는 걸 깜빡깜빡할 때가 있다 말이죠. 그 바다 위 대교를 차를 몰아 돌아오면 나는 원래의 나로 돌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데 그러질 못할 때가 있어요. 돌아와야 할 나의 모습이 껍데기 속의 모습인지 아니면 그 껍데기 자체인지 헷갈려지는 게 두려워요. 내가 누구였더라, 내 꿈은 무엇이었더라,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떤 인생을 살고 싶었나를 잊어버리고 말까 봐 두려워질 때가 있죠.
그 어느 날도 그 껍데기를 뒤집어쓴 채로 돌아와 멍하니 거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드라마를 잘 안 보는 편인데, 요즘 따라 유독 눈에 들어와 꼬박꼬박 다 챙겨 본 드라마가 두 개 있어요. 특이하게도 완전히 정반대의 극단에 서 있는 드라마들이랍니다. 잘 아실 거예요. 요즘 한참 핫했던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과 tvn의 <갯마을 차차차>. 참 뜬금없게도, 그동안 또 잠시 잊었던 답을 얻는 느낌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드라마가 묘하게 같은 느낌이란 게 참 신기했어요. 결국 그래서 연달아 꺼내 보게 되었죠. 볼 때마다 가슴 아련하고, 설레기도 하면서 또 동시에 묘하게 슬퍼지는 지브리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말입니다.
니가 왜 한심한 놈인 줄 알아?
아직까지 그따위 감상이나 늘어놓으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거라
이름을 되찾지 못하면
니가 어떤 사림이었는지를 잊게 되거든
개봉 당시 일본 내 동원 관객수 2,400만 명. 글로벌 흥행 수입 약 4억 달러. 전 세계 dvd, 블루레이 타이틀 판매량 추산 약 500만 장. 애니메이션으로선 대단히 이례적으로 베를린 국제영화제 최고상인 황금곰상을 수상하고 제75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장편 애니메이션 부문 트로피를 거머쥐었던 바로 그 작품.
이렇게 거창한 수식어들이 따라붙어야 하는 걸작이지만 막상 이 작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만들어진 계기는 의외로 단순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친구의 10살짜리 딸, 그 꼬마 아이를 위해 만든 작품이었어요. 이미 잘 알고 있다시피 이 작품의 주인공 소녀 센 역시 10살짜리 여자아이죠. 오프닝에서 아빠가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드러누워 시골로 이사한다고 입을 삐죽거리고 툴툴대는 천상 그 또래의 소녀였습니다. 시골로 이사 가던 그 꼬마 여자아이가 우연히 신과 요괴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이야기. 그곳에서 신나고 즐거운 모험을 겪다가...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오게 되는 전형적인 해피엔딩을 보여주겠죠? 그래야 할 거예요. 다름 아닌 지브리 애니메이션인데.
그.러.나. 다시 되짚어보자면 말입니다. 가슴이 시원해질 정도로 드넓은 초원을 지나 들어갔던 '이 세계'는 10살짜리 꼬마 아이에겐 실은 버거울 정도로 무서운 곳이었어요. 들어가자마자 얼마 되지도 않아 다른 이들의 음식에 손을 댄 엄마 아빠는 돼지로 변해 버렸습니다. 어리고 철없는 나를 영원히 받아주고 지켜줄 거라 믿었던 그 방어막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거죠. 대체 무슨 영문인지도 모를 그 아이 혼자서 어둠을 맞았고, 이 세상 존재들이 아닌 귀신과 요괴들이 수도 없이 눈앞을 지나쳐요. 갈 곳도 잘 곳도 의지할 곳도 없습니다. 온몸이 점점 투명하게 변해가죠.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곳에 있는 존재는 소멸되는 법.
웬일인지 따스하게 챙겨주는 남자아이의 도움으로 당장 사라져 버리는 건 면했지만, 이 아름다워 보이는 동화 속 세계는 공짜로 호의와 친절을 베풀진 않습니다. 아무도 이 10살짜리 꼬마 아이의 울음과 응석을 무조건 받아주진 않아요. 살아남아 어쨌든 이 세계의 일원이 되기 위해선 '계약'을 하고 그에 맞는 '일'을 해야 하죠. 가장 소중한 것을 때론 담보로 맡기고 열심히 '일해서' 무난히 이곳의 일원으로 살아남기.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그 끝이 있겠지만 그것이 정확히 언제 어느 때 어떤 형태로 찾아올진 짐작하기 힘들어요. 엄마 아빠는 왜 돼지가 되었을까?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될까? 이게 어떻게 끝나는 걸까? 아무도 그걸 가르쳐 주지 않지만... 그래도 살아가야 하는 겁니다. 꿋꿋하게. 이것이 이 작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10살짜리 주인공 센에게 일어난 일이었어요. 그것도 단 하루 만에.
여러분들은 우리에게, 여러분들의 이름을 맡겼습니다
난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파
금을 주세요 나으리, 그 금을
자, 너도 갖고 싶지? 가져
난 갖고 싶지 않아요
난
그게 필요 없어요
선천적 기질인지 아니면 후천적 경험들의 영향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현실'을 담아내는 작품들을 특히 좋아합니다. 물론 어떤 방식으로서의 '현실'인지가 문제겠죠. 제겐 그런 듯해요. 말하자면, '차갑고 비정한' 현실을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담아내거나 우회적으로 비틀어버리는 그런 영화들. 아 물론 <반지의 제왕>과 같은 판타지 영화 혹은 <매트릭스>, <스타워즈>와 같은 SF영화 심지어 수많은 슈퍼 히어로 영화들에도 꽤 열광합니다. 하지만 마음이 끝도 없이 시커멓게 내려앉을 때, 세상과 사람들에 지쳐서 몸과 마음이 해파리처럼 흐느적거릴 때 떠오르는 영화들은 늘, 얼음처럼 시리고 차가우며 때론 슬픈 현실을 담은 작품들이었어요. 그 부정적 감정들을 즐기거나 거기서 쾌감을 얻느냐고요? 그럴 리가요. 그 정도의 변태는 아니에요. 그냥, 마치 원 없이 펑펑 울고 난 것처럼 뭔가 정화되고 후련해지는 그런 느낌?
그리고 늘 그 불편하고 꿀꿀한 작품들 속에서 혼자 '무언가'를 찾아보려고 끙끙댑니다. 더 이상 좌절하고 실망할 게 없을 정도로 바닥을 치고 나면 오히려 그때부턴 실낱같은 희망과 기대를 품을 것들만 남거든요. 마치 잔뜩 낀 어두운 구름 사이로 얼핏 스쳐가는 따스한 햇살 한 줄기를 얼굴에 맞는 그런 기분. 원래 세상이 참 개떡 같은데, 그래도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름답고 귀한 것들이 있네?라고 새삼 발견하는 그 오묘한 쾌감이랄까요. 변태 맞구만
자, 그렇게 생각하고 좀 다른 시각으로 이 작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다시 들여다볼까요. 아이들이 만화영화를 좋아하게 될 무렵쯤이면 거의 필수 코스나 다름없을 정도로 차례차례 보여주게 되는 지브리 애니메이션들 속 세계 역시 꿈처럼 완벽하게 '아름다운' 세상만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늘 그 욕심으로 인해 어디선가 자연을 파괴하고 있어요. 그 자연 역시 늘 따뜻하고 자애롭지만은 않죠. 풍요로움의 터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큰 재앙을 내려 인간의 욕심을 심판하는 냉혹하고 두려운 존재로 묘사되기도 해요. 그리고 가까이서 혹은 먼발치에서라도 인간들은 전쟁을 통해 서로를 파괴하고 있기도 합니다. 더욱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 서로 다투고 망가뜨리기도 하죠.
그럼 <이웃집 토토로>는 어땠냐고요? 맞습니다, 더없이 사랑스럽고 예쁜 작품이죠. 순수한 동심을 가진 두 아이가 그들의 눈에만 보이는 사랑스러운 요정들과 어우러지는 한 편의 동화 같은 이야기이지만... 한편으로 두 아이에겐 시골에 와서 따로 요양을 해야 할 정도로 많이 아픈 엄마가 있습니다. 마냥 웃고 떠드는 천진난만한 저 아이들에겐 세상 가장 큰 두려움이자 슬픔이죠. 천년을 넘게 살아온 귀여운 요정들이 밤마다 함께 신나게 뛰어노는 그 세상 속에서도 인간은 또 한편으로 나이 들고, 아프고, 때론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떠나야만 하는 그런 존재이기도 한 거예요. 그 작품 속에서 들판을 달려가던 고양이 버스 장면만큼이나 내게 인상 깊었던 장면은, 고작 다섯살인 여동생 메이가 아픈 엄마 얘기로 닭똥 같은 눈물을 펑펑 흘리던 그 장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궁금했어요. 오래전 극장에서 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처음 볼 때, 센의 부모님이 느닷없이 돼지로 변해 식당 유령들에게 매를 맞는 장면들이 저는 좀 '무서웠거든요.' 그 직후 센에게 닥치는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봐도 그랬어요. 잠시 전만 해도 뾰로통하게 투정을 부리던 10살짜리 소녀에겐 그 모든 일들이 당장 받아들이기 버거울 정도로 낯설고 생경한 일들이죠.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게 더 두렵습니다.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어떻게 하면 되는지 명확히 알 수도 없이 낯선 세상에 던져져요. 우리 세상살이처럼.
호의로 다가오는 이도 있지만 대부분이 센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죠. 남이사 아프든 말든 죽든 살든. 이름을 빼앗기고, 그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맡겨지는 일들을 해내야 합니다. 맨 밑바닥 힘들고 궂은일에서부터. 그 첫 감상으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이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를 알고선 더더욱 궁금했습니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친구의 딸, 그 10살짜리 소녀에게 보여주려고 만든 이 작품에서 고집 세고 완고한 그 영감님은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해주고 싶었길래.
아무리 그래도,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내가 함께 있어줄게
내가 널 지켜줄게
어이 치과, 나만 믿으라고
다시 그 대교를 건너 돌아오면, 여긴 바닷마을 공진이거든
여타 지브리 작품들에서 등장했던 침착하고 강인한 여성 주인공들의 모습과는 달리, 이 작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의 센은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어린아이였습니다. 마냥 부모의 품속에서 고이 자라던 평범한 새침데기 소녀. 그러나 극이 진행될수록 전점 처음과는 많이 다른 모습을 보여요. 두려움에 주저앉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지만, 점점 자신을 굳건히 세워 나갑니다. 타인에게 받은 호의와 고마움들에 감사할 줄 알고 점차 그 도움 없이 자신의 몫을 다하려 애쓰게 되죠. 자신보다 약한 이에게 친절히 대하고, 아끼는 사람들을 위해 큰 두려움과 맞서기도 합니다. 돼지로 변한 엄마아빠와, 자신을 돌봐줬던 하쿠를 위해 무섭고 힘들고 짜증스러운 일들을 묵묵히 견뎌내는 모습들을 보이죠.
그래요. 10살짜리 소녀에게 분명히 이 세계는... 생각보다 무섭고 두려운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또 그 모습들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도 했습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듯이 그 세계 또한 누군가는 이름을 빼앗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따스한 손을 내밀어 줍니다. 겉모습만 보고 모두가 멀리했던 역겨운 오물신이 실은 귀한 신령일 수 있듯이 반대로 모두가 팔 벌려 환영했던 존재가 실은 속 빈 허상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도 알게 되죠.
10살, 11살, 12살... 나이를 먹어가며 맞이하게 될 진짜 세상 역시, 센이 '치히로'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그 세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보살핌 속에서 벗어나 낯선 곳에 내던져지듯이 맞을 그 '홀로서기'는 그렇게 똑같이 생경하고 두려울 거예요. 좋았던 것들의 나쁜 모습들을 볼 수도 있고, 마냥 피하고만 싶은 것들에서 뜻밖의 위로를 얻기도 하겠죠. 사람으로 인해 상처 받고 또 동시에 사람으로 인해 삶의 이유를 찾아갈 겁니다. 그렇게 긴 세월 한참을 깨지고 부딪쳐가며 그래도 우리 다들 깨달아 왔잖아요. 그럼에도, '살아간다'라는 것의 의미를.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강연이나 인터뷰를 통해 종종 그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은 비정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보단 '이러했으면 좋겠다'라는 것을 늘 만들고 싶어 한다고 말이죠. 그리고 그런 것 밖에는 만들 수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신을 평하기도 했어요. 어딘가 진짜 존재했으면 하고 꿈꾸는 세계, 진짜로 일어났으면 하는 행복한 일들, 그리고 정말로 존재했으면 하는 착하고 선한 사람들. 그가 우회적으로 그려내 왔던 그 불완전한 세상들 속에서도 그는 늘 '그랬으면 좋을 일들'을 우직하고도 고집스럽게 계속 담아 왔습니다. 그의 작품들 모두가 그랬었죠. 이 작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따스한 손길로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듯해요. 나만 믿으라고, 그리고 너 자신을 계속 믿으라고. 그렇게 나직이 속삭여 말해줍니다. 이제 10살이 되어 세상을 알아가기 시작하는 아이들과 그리고... 한때 10살이었던 우리들 모두에게.
소녀 센과 함께 하쿠의 등에 올라타 파란 밤하늘을 날아오르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라, 계속 뒤집어쓰고 있던 내 껍데기가 어느새 녹아 사라졌어요.
그럼 내일 어쩌냐고요.
대교를 건너 그 세계로 건너가면 또 생길 겁니다. 매일매일 그 껍데기가.
하지만 이젠 잊지 않고 그곳에 꼭 벗어던져두고 와야죠.
언젠가 그 '계약'이 끝나고
맡겨둔 내 '이름'을 온전히 다시 찾을 때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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