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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프 Oct 03. 2021

결국, 이제 와서

영화 "더 레슬러"(The Wrestler)










#.  그와 마주 봤던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그에 대한 기억은 늘 그 '뒷모습'으로만 남아 있죠.  낮엔 주로 돌아누워 자는 뒷모습이었어요.  밤낮이 뒤바뀐 일을 했습니다.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기도 했거니와,  그다지 먼저 살갑게 말을 붙여오는 스타일도 아니었죠.  다른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 무렵이면 예의 그 뒷모습을 보이며 일을 하러 나갔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일 나가고 없는 아침 무렵 다시 돌아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다 잠자리에 들곤 했습니다.  벽을 보고 돌아누운 그 모습 그대로.


#.  인생의 중요한 기로에서마다 여지없이 바보 같은 선택을 했어요.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가고,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을 만났죠.  스스로가 해결해야 할 일들을 외면하며 회피했었고 다른 이들의 아픔과 눈물에 눈을 돌렸습니다.  일어난 모든 일들에서 혼자 몸을 빼버리고 결국엔 어느 날...  그냥 신기루처럼 사라졌어요.


#.  수많은 세월이 지났습니다.  이젠 누구도 그의 선택을 기다리지 않아요.  견딜 수 있는 상처의 임계치를 넘게 되면 미움보다 더 차가운 외면만이 남게 됩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더 흐르면 그런 감정의 티끌조차 희미해져 버리죠.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누구의 잘못인 건지 하는 것들조차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저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었던 걸로 다 소멸해버리고 마는 겁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2008년작 <더 레슬러>(원제: The Wrestler)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어느 한 프로레슬러의 뒷모습을 쭉 따라갑니다.  이 남자의 이름은 랜디 더 램(미키 루크).  나이로 보나 기량으로 보나 절정의 순간은 이미 한참이나 지난 노년의 레슬러죠.  1980년대에는 꽤 이름을 날렸던 모양이지만 이제 그로부터 30여 년의 세월이 지났어요.  온몸 구석구석 상처와 흉터 투성이인데다 그의 심장은 이제 이 격렬한 운동을 버티지 못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마을 회관에서나 열릴법한 이벤트 매치를 전전하며 푼돈을 벌고, 경기가 없는 평일엔 마트 일용직으로 열심히 투잡을 뛰어도 밀린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고물 트럭에서 쪽잠을 자야 하죠.  그렇게 근근이 벌어봐야 그 돈은 어차피 다음 경기를 위한 싸구려 약 값과 병원비로 몽땅 다 날아갑니다.


  영화가 한참 진행되는 중반까지도 가족 한 명 등장하지 않아요.  경기장에서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 오는 옛 동료들과 올드팬들을 제외하면 영화 내내 그는 혼자입니다.  꽤 오랜 선수 생활을 했고, 한때는 분명 스타로까지 등극해 화려한 날을 보낸 듯합니다만...  지금 그의 모습은 늙어 힘겨워진 퇴물 프로 레슬러 딱 그뿐이에요.  링 밖 그의 모습은 약병을 달고 사는 그냥 덩치 큰 노인에 가깝습니다.  그 노년의 모습이 여유롭거나 평온해 보이지도 않죠.  제대로 몸 누일 곳 하나 없을 정도로 살림살이는 내내 곤궁하고, 심장병으로 쓰러져 사경을 헤매도 곁엔 손잡아 줄 가족 하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더 경기에 '집착'해요.  먹고살아야 하기도 하겠지만 그에게 이 프로 레슬링은 그 밥벌이 이상의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그저 철저히 다 짜인 '쇼'에 불과하다는 이 링 위에서의 거친 몸싸움들이 더 참담하게 느껴지게 되죠.  점점 더 묘한 감정이 들어요.  찢어지고 피가 터져 잔뜩 부은 그의 얼굴이 오히려 그에게도, 지켜보는 우리에게도 오히려 더 편안하게 느껴질 테니 말입니다.





           










  홀로 쓸쓸한 노년을 보내는 어느 프로 레슬러.  그에게 처해진 비루한 현실.  관계가 단절되어버린 딸이 등장하고 썸인 듯 아닌 듯 마음을 주고받는 한 여성도 간간이 그의 곁을 맴돕니다.  충분히 눈길을 끄는 설정이긴 하지만 또 어찌 보면 전형적이죠.  이미 언젠가 어디선가 비슷한 이야기들로 적잖이 접해본 듯한 기시감이 들 수도 있잖아요.  힘든 현실 속에서도 스포츠에 대한 '열정'으로 멋진 승부 끝에 자신의 존재 가치를 다시 증명하는 이야기.  유일한 혈육인 딸과는 화해하고, 로맨틱한 상대와의 늦은 사랑도 다시 수줍게 꽃 피우는 인간 승리의 드라마가 될 겁니다.  역경을 딛고 이루는 값진 재기와 화해, 그리고 도전과 성취.  때론 그 정도가 지나쳐 신파로 흐른다 해도 우리 삶 자체가 종종 뻔한 신파이기도 해서... 그 나름의 카타르시스를 주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이 작품 <더 레슬러>는 그런 여타의 전형적 스포츠 드라마와는 결이 다릅니다.  프로 레슬러가 주인공이고 시합 장면이 계속 등장하지만 스포츠 영화라고 구분 짓는 거 자체가 무의미하죠.  그저 짜고 치는 고스톱 같았던 프로 레슬링이 막상 선수들 입장에선 굉장히 위험한 거란 걸 체감하게 만드는 경기 자체의 리얼한 연출은 꽤 눈길이 가요.  그 '리얼함'이 지나치게 생생해서 스포츠 영화 특유의 박진감이나 쾌감이 느껴진다기보단 보면 볼수록 그 처연함에 점점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진즉에 그 일선에서 벗어나 여유롭고 풍요로운 노후를 누려야 할 법한 중년의 선수들이 힘겹게 링 바닥에 내려 꽂히는 모습들이 그저 스포츠의 한 장면으로만 그치지 않는 느낌이죠.  카메라는 그중에서도 바로 이 주인공 랜디 더 램(미키 루크)의 뒷모습을 집요하게 따라가며 그의 인생 전체를 조망하게 하는 겁니다.  철저히 중립적인 시선으로.  그에 대한 어떤 가치판단도 내보이지 않아요.  그가 대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섣불리 단정 지어 보여주진 않습니다.  슬로비디오로 보여주는 뽀샤시한 회상 장면 하나 일절 없어요.  차가운 현실만을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보여주죠.


  길 가는 이들이 먼저 알아볼 정도로  한때는 스타였던 사람.  노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자신이 해 온 레슬링이라는 일 자체에 대한 열정은 아직 뜨거워요.  동료들과의 관계로 보건대 그다지 나쁜 사람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집도 절도 가족도 없이 힘에 부치는 링 위의 시합을 계속해야만 하는 인생.  그런 그에게 감정이입이 되어갈수록 점점 더 궁금해지죠.  그가 지금 저렇게 살고 있는 이유는 대체 뭘까.  레슬링밖에 모르는 착하고 우직한 사람이라서? 아니며 그냥 지독히도 운 없고 기구한 팔자라서?  그래서 아무 잘못도 없이 저렇게 세상과 가족들로부터 일방적으로 버림을 받은 건가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당신이




세상에게서 받았다고 생각하는 그 상처들은




결국 당신이 누군가에게




안겼던 상처들 때문인걸




링 위도,  세상도


결국엔 그런 거였으니까.






  스포츠 영화가 아닙니다.  프로레슬링 영화도 아니죠.  한 남자의 삶이 끝내 망가져가는 과정을 그리는 작품입니다.  그의 인생이 이렇게 무너지게 되는 직접적인 이유가 그가 하필 퇴물 프로레슬러이기 때문인 건 아니에요.  그것 또한 원인이 아니라 따지면 결과인 셈이죠.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수많은 직업 중 하나였을뿐 평범한 회사원 램지 더 램, 장사꾼 램지 더 램, 판매원 램지 더 램, 그 어떤 직업이었든 똑같이 만들어질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들 삶이 말미에 이를수록 진정 행복해지는 길이 무얼까를 이 남자 램지 더 램의 초라한 모습들을 통해 넌지시 반추하게 해요.  "나를 상처 주는 건 링이 아니라 링 밖의 세상이다"라는 그 마지막 코멘트가 얼핏 심금을 울리는 듯 하지만... 여전히 그는, 자신이 운명의 일방적인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 같아 더 안타깝습니다.


  레슬링에 대한 그 뜨거운 열정과는 별개로, 그는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소중한 것들을 수많은 형태로 외면하고 방관했을 거예요.  그 자체를 딱히 인식조차 못했을 겁니다.  천신만고 끝에 얻으려 했던 딸과의 화해를, 낯선 여자와 더러운 화장실에서 갖는 짐승 같은 섹스로 허망하게 날려버리는 그 단 한 장면이 주는 의미는 그래서 굉장히 무겁게 다가와요.  상투적인 회상 장면들 하나 없이도 그가 지난 세월 동안 자신의 소중한 이들을 어떻게 대했을지 그제야 자연스레 떠올려집니다.  

아무도 그를 피해자로 만들지 않았을 겁니다.  아무도 그를 멱살 잡아 불행의 구렁텅이로 억지로 밀진 않았을 거예요.  결국 그 자신이었을지 모르죠.  자신의 남루한 현실이 필연적인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결과의 원인은 과거 스스로의 잘못된 '선택'들에서 결국 기인한 것이에요.  상처는 상처를 이어 낳습니다.  마치 부메랑처럼 그것은... 자신에게 돌아오기도 하죠.


  안타깝지만 동시에 또 안타깝지 않습니다.  깊은 연민의 시선이 가지만 또 동시에 냉정한 눈으로 다시 바라보게 되죠.  자신의 유일한 '구원'인 프로레슬링 경기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그 엔딩씬들이 새삼 더 처연하게 다가오지만, 나는 여전히 그가 이기적으로 보입니다.  헝클어진 것들을 다시 풀어내는 건 바로 다름 아닌 스스로의 몫이에요.  그가 끝내 진짜 소중한 걸 되찾고 싶었다면 그는 거기서 '링'보다 '사람'을 택했어야 합니다.  충분하다고 생각한거라면 그건 여전히 자신의 기준에서일뿐이었죠.  아니, 충분치 않았어요.  그렇게 지나온 긴 세월의 무게만큼 끊임없이 더 끊임없이, 계속 더 문을 두드려야 했습니다.

그렇게 끝내 매듭짓지 못하고 놓아버리는거라면...  

힘겹게 올라가 공중으로 몸을 날렸던 그 마지막 점프도

결국엔 소중한 이들에게 안기는 또 하나의 더 큰 상처에 불과할테니까요.












#. 그는 이제 나의 기억보다

훨씬 더 주름이 많고 머리도 휑하고

살이 빠져 작아 보입니다.

벽처럼 드높았던 그 차가운 뒷모습마저도

작아 보여요.

결국

이제 와서.

     











*  위 이미지들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며

    이미지들의 모든 저작권은 해당 제작사에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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