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모습이 참 인상적인 후배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동료들과 우르르 어울려 '그 영화'를 함께 보러 가기 전에 저렇게 말했던 기억이 나요. 그때 다들 함께 극장에서 봤던 영화는 슈퍼맨이 등장하는 <맨 오브 스틸>. 당연하게도, 슈퍼맨뿐 아니라 다른 많은 악당들이 너도나도 하늘을 다 휙휙 날아다니던 작품이었습니다. 파괴지왕 잭 스나이더 감독 영화답게 도시 전체를 박살 내는 타격감 넘치는 액션씬들이 즐비했죠.
하지만 그것만이 다는 아니었어요. '신과 같은 능력의 외계인이 어느 날 갑자기 우리 눈앞에 나타났을 때, 우리가 그를 바라보는 관점은 어떨까'라는 그 스토리텔링이 개인적으로는 의외로 진중하고 의미 있게 와닿았습니다. 생각 외로 영화가 가볍지만은 않아서 더 마음에 들었죠. 한데 영화가 끝난 후 은근히 신경이 쓰이더군요. 별 감흥 없는 표정으로 영화를 보고 쌩 나가는 그 시크했던 후배의 표정을 슬쩍슬쩍 돌아보기도 했습니다. 왜 그렇게 눈치가 보였던지 지금 생각해도 좀 의아할 정도였어요.
' X - Men ' 시리즈 메인 캐릭터, 로건
지난 20여 년간, 배우 휴 잭맨의 마블 캐릭터 '울버린'이 메인으로 등장했던 <X-MEN> 시리즈 작품들 역시도 제목에서부터 아예 '맨'이라는 글자가 떡하니 박혀 있어요. 복수형인 'MEN'이라 'MAN'들이 아예 떼거지. 하늘을 나는 캐릭터들도 우글우글합니다. 눈에서 레이저를 쏘거나 비와 폭풍을 부르는 캐릭터들도 있죠. 심지어순간이동이나 염력을 구사하는 '돌연변이'들이 득시글거리다 보니 아마 그 시크했던 후배에게는... 지금까지도 무시당하는 작품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번씩 케이블 TV에서 특집으로 시리즈 전편 몰아보기 방영될 때가 있는데요, 그 단편적인 장면들에서 쫄쫄이 가죽 옷을 맞춰 입은 이 '돌연변이'들이 휘황찬란하게 싸우고 있는 모습들만을 얼핏 지켜본다면, 뭐 그런 느낌도 무리는 아닐 거예요.
하지만 미국 내 흑인 인권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1960년대에 태어난 이 <X-MEN> 코믹북의 세계관에 우리 현실의 사회현상들을 대입해보면 꽤 의미 있는 그림이 그려집니다. 남다른 외모와 특성들로 인해 '보통 사람'들로부터 공포와 증오, 억압과 멸시의 대상이 되는 영화 속 '돌연변이'라는 존재들은 인종, 종교, 성별 등 다양한 이유로 불평등과 차별에 시달리는 현실의 많은 '소수계급'들을 상징하고 있기도 하니까요.
더욱 흥미로운 점은 그 억압과 불평등, 차별들에 어떤 관점으로 맞서야 하는가가 이 <X-MEN>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화두가 된다는 점이었어요. 원작 코믹스가 나오기 시작했던 1960년대는 흑인 인권 해방 운동이란 같은 목표를 두고 온건파인 마틴 루터 킹 목사와, 강경파인 말콤X가 서로 다른 관점과 방법론을 주창하던 시기였습니다. 비유적으로 그려진 코믹스와 실사 영화 시리즈 속 상황도 그러했죠. '돌연변이'들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온건파인 찰스 자비에 교수와 강경파인 매그니토가 같은 목적 하에서 서로 다른 접근법을 주장해요. 선과 악, 혹은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닌... 같은 목적을 향한 다른 방법론의 문제.
오리지널 <X-MEN> 3부작과 프리퀄인 <퍼스트 클래스>, <데이즈 오브 퓨쳐 패스트>, <아포칼립스> 3부작, 그리고 스핀오프인 <울버린> 시리즈까지. 수많은 '맨'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사라지지만 그중에서도 17년 역사의 이 <X-MEN> 시리즈 대표 아이콘이자 메인 캐릭터는... 양 손에서 아다만티움 칼날이 튀어나오는 야수 '울버린'이었습니다. 지금 소개하려는 이 작품 <로건>은 오랫동안 배우 휴 잭맨이 연기한 그 '울버린'이 등장하는 마지막 작품이에요. 그것도 당혹스러울 정도로 가슴 아픈 그런 처연한 모습으로 말이죠.
<X-MEN> 스핀오프 <울버린>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었던 이 <로건>은 제목에서부터 이미 느껴지듯 슈퍼 히어로 '울버린'의 이야기라기보단 삶의 황혼기에 들어선 한 인간으로서의 '로건'에 초점을 맞춘 영화였어요. 찰스 자비에 교수와 함께 수많은 돌연변이들을 이끌며 맹수처럼 수많은 전투를 넘나들었던 그 '울버린'의 모습은 이제 없습니다.
불로불사의 힐링팩터 능력으로 언제나 젊고 강한 근육질의 그가 영화 첫 장면에서부터 주름이 가득한 나이 든 얼굴로 연신 기침을 해대고 절뚝이며 걷는 모습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낯설죠.
자유의지를 가진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받기 위해 투쟁했던 수많은 X-MEN들은 다 죽거나 사라졌고, 이제는 병약하고 초라한 치매 노인에 불과한 찰스 자비에 교수를 돌보기 위해 마지막 재산을 탈탈 털어 장만한 듯한 콜 리무진 차량 운전기사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시답잖은 인간들을 위한 시답잖은 뒤치다꺼리들로 하루하루 그렇게 간신히.
이 당시 개봉 전부터 이 '울버린'의 이야기, 아니 인간 '로건'의 마지막 이야기가 전형적인 마블 히어로 영회의 공식을 따르던 전작들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일 거란 정보를 미리 접하긴 했었죠. 막상 그랬는데도 늙고 병들어 초췌한 모습의 울버린이 등장하던 그 첫 장면에서부터 가슴이 시렸습니다. 그 둔한 몸을 이끌고 이제 그가 힘겹게 싸우는 대상들은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거창한 빌런들이 아니라 유일한 밥벌이인 콜 리무진 차량 타이어를 훔치려는 동네 양아치들에 불과해요.
그 '돌연변이' 능력의 대가로 그가 얻었던 건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이 죽거나 불행해지는 모습들에서 받았던 깊은 상처뿐이었습니다. 시리즈 내내 거의 행복해 본 적이 없는 이 캐릭터가 왜 이렇게까지 말년이 비참하게 그려지는지에 대한 의문이 계속 들 정도였어요. 히어로 무비 세계관속에 있으면서도 전혀 히어로 무비 같지 않습니다. 굉장히 이질적인 작품이에요. 병마와 생활고에 잔뜩 찌든 모습의 늙은 '로건'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게 되기도 하죠. 인생의 어느 순간 황혼기에 이르렀을 때 병들고 고독할 수밖에 없는 우리 보통의 모습들이 그 힘겨운 걸음걸음에 그대로 투영되는 느낌. 가슴이 저밉니다.그에게 그나마 한줄기 남은 희망이 이제 혼자서 대소변도 처리하지 못해 오늘내일하는 치매 노인 찰스 자비에 교수란 사실이 더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어요.
이쯤 되면 점점 궁금해집니다. 이 영화가 대체 보여주려는 게 뭘까. 지난 17년간 X뺑이 치고도 불행했던 어느 늙은 슈퍼 히어로가 끝내 비참한 말년을 보내다 세상을 원망하며 하직하는 모습? 그게 아니면, 언젠가 행복해지겠지라고 평생 뼈 빠지게 일하다 결국 어느 날 허망하게 눈감게 되는 어쩌면 영화 밖 우리의 실제 모습들? 그러니까 대체 뭘 보여주려는 거냐고.
그가 웃는다
그 아이도 웃었어
그러니 당신도 웃어요
" 로건,
이런 게 인생이라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가정, 안전한 곳...
잠시 쉬면서 느껴 보게나.
자넨 아직 시간이 있어. "
감독인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이 작품 DVD에 수록된 코멘터리를 통해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영웅으로서의 울버린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로건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관점에서 이 영화를 연출했다고 말이죠. 치열하게 '무언가'를 위해 싸워왔지만 그 모든 것들은 무의미한 과거의 유산에 불과해요. 사랑하거나 아끼는 존재들을 지키지도 남기지도 못한 고단한 삶의 막바지에서 외로움과 고통으로 서서히 시들어 간다는 것. 왜 살아왔고 왜 살아가야 하는가를 제대로 느껴보지도 못한 채로 그렇게 끝을 맞이한다면, 어쩌면 그 모습이... 우리의 진짜 인생이라면.
그래서일까요.마지막 희망마저 깨지고 난 후 그에게 홀연히 나타난 소녀 로라와 함께 떠난 그 길에서의 여정도 그닥 희망적이진 않아 보여요. 하지만 상처 받는 게 두렵고 떠나보내는 게 두려워 관계 맺기를 극도로 거부하고 살아온 그가 과거의 자신과 똑 닮은 소녀 로라를 아주 조금씩 자신의 마음속에 들이는 그 과정들은 그래서 더 깊은 울림을 줍니다. 불로불사의 몸으로 수백 년의 세월을 싸워오면서도 '왜 살아야 하는가'를 느끼지 못했지만 그는 마지막 그 순간 자신이 목숨으로 지켜낸 아이의 눈물 앞에서 그제야 깊이 깨닫게 된 거죠. 특별한 힘 하나 없는 우리 보통 사람들의 인생이야 이 드라마틱하고 굴곡진 삶을 살아온 슈퍼 히어로 울버린에 비할 수야 있겠습니까만은... 왜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야 하나라는 버거움이 종종 어깨를 짓누를 때, 그럴 때 우린 대체 어디서 그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야 하는 건가요.
네, 극장에서 이 영화를 감상하기 전까진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검정 가죽 유니폼 차림으로 양손의 날카로운 칼날을 맹수처럼 휘두르던 그 '울버린'이 이렇게 늙고 지친 인간 '로건'의 모습으로 고단한 삶의 페이소스를 전해줄지 말입니다. 우걱우걱 팝콘 씹으며 보면 그만일 슈퍼 히어로 무비 속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인간의 상실과 죽음, 더 나아가 가볍지 않은 '존재의 이유'를 이렇게 묵직하게 전할진 상상도 못 했던 거죠. 결국 기어이 몇 장면들에서, 극장에 나란히 앉아있던 집사람과 함께 눈물을 살짝 훔치며 이렇게 중얼거렸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아 미친 거 아냐, 이 영화 대체 왜 이러냐... "
슈퍼 히어로 영화임에도 표현의 한계를 넘은 완성도를 위해 제한등급 R등급으로 만들어졌던 이 영화 <로건>은, 2017년 베를린 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초청되어 히어로 무비 최초로 프리미어 상영되었고 제작비 9천7백만 달러에 총수익 6억 1천 5백만 달러를 벌어들여 흥행과 비평에서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제작사인 폭스마저도 기대하지 않았던 19금 병맛 히어로 영화 <데드풀>의 대성공과 더불어, 17년 인기 캐릭터였던 '울버린'과의 기념비적인 작별을 그려낸 이 작품을 통해 뻔하고 도식적이라 치부되던 슈퍼 히어로 영화도 분명 다양한 장르로 확장되고 진화할 테죠.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2020년 2월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사상 최초로 히어로 영화의 캐릭터를 연기했던 배우 호아킨 피닉스가 남우주연상의 주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역대 배트맨 시리즈에서 매번 단골처럼 등장해 낄낄거리던 그 광대 캐릭터 '조커'의 이야기가, 그토록 깊은 인간 내면의 심연을 진중하고 무겁게 담아내게 될 줄은 말이죠.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앞으로도 보게 될 대부분의 슈퍼 히어로 영화들 속에서 그 '맨'들은 여전히 화려한 코스튬 차림으로 중2병스러운 대사를 읊어대고, 계속 하늘을 날아다니기도 할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랬듯이 그 수많은 히어로들에게 여전히 매료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지 그 눈 돌아가는 현란한 시각효과 때문만은 아닐 거예요.
그들이 코믹스와 영화 속에서 가진 그 초능력과 완전무결함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현실 속 보통 사람들의 이 '불완전함'과 맞닿아 있습니다. 떨쳐버릴 수 없는 이 태생적 한계들이 곧 그들이 만들어진 이유인 거죠. 그저 단순한 동경이나 달콤한 현실도피에 그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