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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프 Sep 01. 2021

그런 날들도, 그리 나쁘진 않아요

영화 "굿모닝 에브리원"









          "기회만 주신다면

           매일 차비만 주셔도

           열심히 일을 배우겠습니다.

           시켜만 주십시오."





  15분간의 면접이 끝나기 직전에, 혹시 하고 싶은 말이 없냐고 한 면접관이 제게 물었습니다.  딱 저렇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대답 했었어요.  그다지 특별하거나 인상적인 말은 아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엔, 그 순간엔, 얘기한 그대로 진심이었죠.  누구나 그랬듯이 꽤 절박할 때였습니다.  4학년 1학기에 학과 추천서를 받아 원서를 내려고 했던 곳들은 모두 전멸이었어요.  IMF 외환사태 직후라 거의 모든 기업체들의 취업 공고가 끊어져 버렸을 때였으니까.  신규채용은 고사하고 많은 기업체들이 줄줄이 도산해서 인원을 몰아내고 감축하기 바쁠 때였습니다.  


  집에다 대학원 진학이나 유학 같은 '호사'는 입도 뻥긋하지 못할 분위기여서 취업 못하고 그대로 졸업을 맞는다는 건 악몽에 가까웠어요.  게다가 학생 신분이라 그 당시 4년간 연애 중이었던 집사람의 부모님께 결혼 얘기조차 꺼내보지 못하고 있단 사실에 더욱 조바심이 들 수밖에 없었던 거죠.  초조하게 여름 방학을 그냥 보내고 가을이 되면서 정말 문턱이 닳도록 학과 사무실과 취업 게시판을 들락거렸습니다.  

그러던 10월 중순 즈음, 가고 싶었던 분야와 가장 '근접'한 회사의 구인공고 하나가 드디어 학과 게시판에 붙은걸 확인했어요. 앞뒤 잴 거 없이 학과 추천서를 받아 그 회사에 서류를 제출했고 서류 통과 후 면접.  그 면접 당일에... 정말 뽑아만 준다면, 차비만 기꺼이 받고서도 회사 생활을 하겠다는 포부를 그렇게 애원하듯 이야기했었던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요?  면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멍 때리고 있다가 그 회사로부터 전화를 받았고, 바로 며칠 뒤부터 나올 수 있겠냐고 합격 통보를 들었습니다.  그 전화받자마자 당시 집사람한테 우리 결혼할 수 있겠다고 기쁨의 삐삐를 쳤었죠.  학교에 취업 확인서를 제출하고 아직 학기 중이었던 11월 초부터 정식 출근을 시작했어요.  물론 진짜로 '차비'만 받은 건 아니었죠.  IMF 때부터 마치 유행처럼 굳어졌던 임시직, 계약직, 수습직, 인턴... 그 명칭이 무엇이든 간에 입사 후 1년간 월 70만 원으로 수습기간을 보냈습니다.  1년 후 근무평가로 정직원 전환 발령.  


  당장 결혼을 앞둔 상황에 월 70만 원 정도를 받는 20대 인턴 직원에 불과했지만 생각해보면, 그 하루하루가 그땐 꽤 '가슴 벅차게' 느껴졌던 거 같아요.  여기저기 이미 접해본 알바 경험들과는 별개로  확실히 '회사'라는 건 뭔가 달라 보였습니다.  모든 것들이 다 생소했지만 또 신기했죠.  만나보는 사람들은 보기에 모두 선하고 친절하며 각자 서로를 진정으로 아끼는 듯했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여얼얼얼얼얼얼얼쩡 노오오오오오오오력을 다해 일하다 보면 제대로 평가받으며 성장하리란 기대에 차 있었나 봅니다.  파릇파릇한 신입답게 말이죠.  

 




                  

매일 가자미 눈으로 째려보고



그러다 종종 뒷담화로 까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행복한 표정으로



화장실에서 남몰래 자책 정도는, 누구나 하잖아요?






  다이애나 피터프로인드의 베스트셀러 원작을 바탕으로 <노팅힐>(1999년)의 감독 로저 미첼이 연출했던 이 영화 <굿모닝 에브리원>은, 지방 방송국 PD인 베키 풀러(레이첼 맥아담스)가 딸리는 학벌과 스펙으로 인해 느닷없이 해고당하는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천신만고 끝에 연락을 해 온 뉴욕 방송국의 취업 면접에서  차비만 받겠다고  애원에 가까운 읍소를 한 끝에 드디어 눈물겨운 재취업에 성공하게 되죠.  

이 작품은, 땜빵용 PD로 투입된 주인공 베키가 폐지 직전의 프로그램 <데이브레이크>를 천신만고 끝에 되살리고 그 속에서 달달한 사랑도 만나게 되는 어쩌면 전형적인 로맨스 코미디 장르라고 할 수 있어요.  캐릭터들의 이면을 깊이 분석해야 한다거나 함축된 메시지들을 찾아야 하는 그런 부담들은 필요 없습니다.  미운 오리 새끼 같았던 주인공이 남다른 여얼정노오력으로 주위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 삶에서 유의미한 성취들을 이뤄가는 모습을 편안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유쾌한 작품이죠.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로맨스는 그저 양념일 뿐,  마치 전쟁터 같은 일터의 속살들을 담은 일종의 치열한 직장생활 서에 가까워요.  생각해보면 '회사 생활'이란 건 늘 그랬습니다.  항상 누가 짠 각본처럼 외부 환경은 불리하게만 돌아가고,  인원이나 예산은 피 말리듯 빠듯하죠.  시한이나 마감은 늘 촉박하고, 결정이나 선택은 급작스러우며, 예측 안 되는 돌발상황들에 피가 바짝 마르는 그 와중에... 이해타산을 달리하는 타인들과의 불편한 관계까지 바윗돌처럼 어깨를 짓누르곤 하니까요.


  이른바 멋진 '실장님'들이 등장하는 드라마들을 통해 상상하곤 했던 그 오피스 라이프의 모습들이 현실에선 거의 판타지에 가깝다는 걸 다시 인지하고 이 작품을 보게 된다면,  주인공 베키의'직장 생활'들이 오히려 더 리얼하게 느껴질 겁니다.  <퀸카로 살아남는 법>, <노트북>, <어바웃 타임>등의 작품들을 통해 발랄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이미지로 떠오르곤 했던 레이첼 맥아담스의 모습은 오히려 이 영화 속에선 살짝 결이 다른 매력으로 다가오기도 해요.  정신없이 뛰어다니느라 정리되지 못한 앞머리, 일하는 와중에 잔뜩 주름지고 툭 삐져나온 블라우스, 몰아치는 스트레스로 퀭한 눈동자, 깊은 한숨, 그리고 가끔씩 아무도 없는 곳에서 벽에 머리를 부딪치며 혼자 자책하는 그 모습들까지.  

실은 형태와 장소만 다를 뿐, 가만히 들여다보면 실제 우리의 모습들이기도 하잖아요?





            

지지고 볶는 일도,  혼자선 못하죠



박수받으려면



손뼉 쳐 줄 사람들이 곁에 있어야 하니까






  네,  영화의 전체적 흐름은 익히 예상되는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흥미로운 에피소드들로 눈길을 끌었던 전반부와 중반을 지나고, 이야기가 마무리 지어져야 하는 후반부로 가면서 살짝 도식적이고도 전형적인 전개로 이어지긴 하죠.  정해진 기한까지 목표 시청률에 도달하지 못하면 공중분해 될뻔했던 비인기 프로그램 <데이브레이크>는 신입 PD 베키(레이첼 맥아담스)의 살신성인에 가까운 노력들로 인해 공전의 히트를 치게 됩니다.  이런 과정들을 거치며 훈남 연인과의 사랑은 더 깊어지고, 이 기적 같은 성공을 지켜본 대형 방송국의 내로라하는 간판 프로그램에서 스카우트 제의까지 들어오게 되는 지극히 '알흠다운' 결말.  

누군가의 성공에 뒤따르는 시기와 질투,  셋 이상만 모이면 벌어지는 살벌한 줄타기와 뒷담화들을 생각해보면 이 예쁜 신데렐라 스토리가 마치 판타지처럼 '순진'하게도 느껴지지만... 이 작품의 진짜 결말은 의외로 베키의 '성공' 그 자체에만 가치를 두진 않아요.


  더 큰 성공의 무대로 가기 위해 현재의 프로그램 <데이브레이크>를 박차고 나갔어도 아무도 그녀를 원망하거나 욕할 순 없습니다.  주인공 베키 스스로도 뭐 어떤 의무감이나 책임감, 혹은 죄책감 같은걸 느낄 필요가 없죠.   좀 더 현실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갈 수 있을 때 더 좋은 곳으로 가지 않았던 것을 먼 훗날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녀는 쉼 없이 달려온 그 '성공'의 목전에서 불현듯 자신의 곁을 말없이 채워주고 있던 '사람'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 값싼 감정으로 인해 스스로 굴러들어 온 복을 뻥 차 버리게 되는건지는 10년, 20년이 더 지나야 결정지어질 문제겠죠.  <데이브레이크>로 돌아온 그녀가 여전히 각자의 자리에서 정신없이 일하고 있는 이름 모를 스태프들 한 명 한 명을 조용히 바라다보며 미소 짓는 바로 그 장면은... 그래서 이 작품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 아닐까 싶어요.  샤방샤방 신데렐라 스토리를 일궈내는 주인공 베키의 성공담만이 유독 이 이야기에서 부각되고 있을까요?  그녀가 주인공이라서?   


  아뇨, 모두가 1등이 되지 못하고 또 모두가 다 성공하진 못해도 매일 그 '전쟁터' 같은 일터로 꿋꿋이 출근해 자신의 직분을 다하는 모든 이들이 이미 주인공 베키 풀러와 다름없습니다.  이 이야기에서의 주인공은 그녀일 테지만 그녀의 주위 누구의 삶에든 그 속으로 카메라를 옮겨 들어가면 어떨까요.  비단 영화 속 그들뿐 아니라... 따지자면 우리들 모두, 다 제각각 드라마틱한 영화 몇 편씩은 쉽사리 쏟아져 나올꺼에요.  꼴랑 두세 시간 이 정도 러닝타임 정도로?  어림도 없죠.   한 50시간 짜리 대하 드라마 한편 정도라면 모를까.






365일 중 그래도 하루 이틀 정도는



사약 같은 커피가 꿀처럼 느껴질 때도 있을 거예요



월급날이다






  돌아보니 말입니다, 우릴 정작 황폐하게 만드는 건 그 징글징글한 업무와 스트레스 자체라기보단 어쩌면 꿈꾸고 바라는 대로 되지 않은 지금의 모습이 보잘것없게만 느껴지게 하는 그 '자괴감'과 같은 감정들이었을지 몰라요.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결국 성과와 수익을 내야 하는 '회사'라는 공동체는 때론 구성원들의 채워지지 않는 그 자괴감, 피해의식, 시기심들을 자극하고 그것들을 자양분 삼아 돌아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그것들에 결국 매몰되어 버리기도 하죠.  또 누군가는 그 자체만을 스스로 맹목적으로 쫓기도 할 겁니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성공'이란 그 가치는 뭘 얻고 획득했느냐가 아니라, 어딜 바라보고 또 누구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는 것이었어요.  그런 관점에서 들여다보면 로맨스 코미디 영화의 전형적인 결론으로 보이는 주인공 베키의 그 '선택'이 의외로 좀 더 깊어 보이기도 했었죠.  

이 뻔해 보이는 영화 <굿모닝 에브리원>은 말입니다, 한때 꽤 잘 나갔던 노선배, 한참 성공을 위해 달리는 신입 후배, 그리고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몫을 해내고 있는 이름 모를 많은 이들의 모습을 통해 '더불어 일한다는 것', 더 나아가 '더불어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새삼 떠올려보게 합니다.  뭐 보기에 따라선 핑크빛 블링블링 판타지라 할지라도... 감상하는 내내 기분 좋은 유쾌함이 가득한 그런 영화인건 사실이니까요.


  차비만 받아도 좋다고 했던 그 포부를, 20여 년 전 그때 선배들이 어떻게 바라봤을지 그땐 몰랐었습니다.  알턱이 없었죠.  만약 지금 들어오는 까마득한 신입 후배가 눈빛을 반짝이며 똑같이 그렇게 얘기하는 걸 엿듣게 되면 이제 제 표정이 어떨진 잘 모르겠어요.  썩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냐, 말이 씨가 된다고.  차비만 받겠다고 했더니 정말 차비 같은 월급을 계속 받게 되거든'이라고 충고하며 냉정히 현실자각 시켜야 할까요.

근데 아마 그것도, 섣부른 오지랖일 겁니다.  성공과 행복의 기준,  그 가치들의 무게는 꼭 이 짬밥과 비례하진 않았거든요.  밥맛 떨어지는 그 처세술들이나 화려한 줄타기 요령들을 무용담 삼아 침 튀기며 들려주느니 그냥 입은 얌전히 닫고 지갑이나 열심히 벌려서, 얼음 둥둥 떠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나 한잔씩 툭 무심히 건네렵니다.  

스스로 잘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 대체 내가 길을 잃은 건 아닌지,

수없는 의구심들이 몰아치곤 하겠지만

그렇게 보내는 매일매일도

사실 생각보단 말입니다,

그리 나쁘진 않을 테니까 말이에요.
















* 위 이미지들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며

  이미지들의 모든 저작권은 해당 제작사에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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