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친하게 지내는 한 부부가 있습니다. 나이대도 우리 부부와 비슷해요. 제가 영화 이야기들을 쓰는 걸 알고 계실뿐더러 항상 응원해주시는 분들이기도 하니 아마 이 글도 곧 읽어보시겠죠.거대한 외계 비행물체의 모습으로 시작했던 이 SF영화 <컨택트>의 리뷰에 두 분의 이야기를 익명으로 담아도 되겠는지 미리 여쭸습니다. 이미 두분도 이 영화를 봤어요. 그리고 왜 제가 이 작품의 리뷰에 그 이야기를 담으려 하는지도 아시죠. 특별하지만 또 그리 특별하지도 않을 수 있는 그 이야기들에 대해서.
두 사람 각자 만나서 결혼하기까지의 이야기들은 그 시절을 지내온 다른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예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엇비슷하게 이리저리 부침을 겪으며 살았답니다. 그러다 대학 시절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리 여유롭지 못한 상황으로 결혼해 함께 살기 시작했죠. 쥐꼬리만큼의 월급쟁이로 각자 성실히 직장에 다니면서 한푼두푼 결혼 때 대출금도 다 갚아 나가고 살림을 늘려가는 재미로 지냈습니다. 자리 좀 잡고 아이를 갖느라 첫 출산도 30대 중반으로 늦어졌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첫딸도 태어났고 곧바로 귀여운 아들도 이어서 낳게 되었어요. 소박하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작은 행복들, 늘 그렇듯이 그 부부가 바라는 대로 모든 일들이 그렇게 조금씩 다 이루어질거라 생각했었죠.
세상을 다 가진듯한 행복을 안겨주던 그 첫딸이 이름도 생소했던 '아스퍼거 증후군'이란 얘기를 들은 건 다섯 살 무렵이었어요. 네, 우리가 보통 하나로 묶어서 생각하게 되는 바로 그것 '자폐증'에 가깝습니다. 흔히 <레인맨>의 더스틴 호프만이나 한국영화 <말아톤>에서의 조승우 모습이 떠오르지만, 명확하게 음성이냐 양성이냐로 판명되는 일반적인 병세와는 달리 이 마음의 병은 사람에 따라 정말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요. 보이는 행동 특성들에 따라 중하다고 보일 수도 있고 그냥 좀 성격적으로 유별나다고 느껴질 정도로만 경미하게 보이기도 하죠. 유심히 들여다보면 신경증이나 불안, 편집증이나 집착 등의 형태로 본인도 모르는 새에 그 성향들 중 한두 가지를 조금씩 품고 살아가는 이들도 적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감정적 파고들을 지나 어느 순간에서부터 그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면... 많은 부분들이 이전과는 달라지게 돼요. 경제적인 여건이 닿는 한 해볼 수 있는 모든 상담이나 치료, 교육들도 해보게 됩니다. 허무맹랑할 정도로 낙관적인 이야기들로 마음의 위안을 얻기도 하고 때론 비관적인 이야기들로 바닥까지 우울해지기도 하죠. 그리고 의외로 이른바 첨단 영역일듯한 현대 의학이 이 마음의 병에 있어서만큼은 이렇게 아직 원시적일까 싶을 정도로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걸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이 부부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게 이제 십대 중반이 된 첫딸이 남들과 무리 없이 소통하며 평범한 어른으로 커가는 거라면... 그럴 수 있을지 없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예요. 모든 게 불확실해 보입니다. 걱정과 불안의 늪에 빠지려면 그 가족들 누구라도 언제든 그 속으로 끝도 없이 떨어져 버릴 수도 있을 테니까요. 과거, 현재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먼 미래 그 어디든 한쪽으로만 매몰되어 버린다면 순식간에 견디기 힘들어질 수도 있죠. 한데 이 부부는 그로 인해 모든 것들을 되도록 더 넓게, 더 포괄적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온 듯합니다. 남모를 생채기를 남겼을 지난 시간들과, 떠올리면 불안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두 자녀 각각의 미래들을 바로 지금이 순간들과 한데 묶어 그저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거죠. 이 '남다른' 누나를 마치 오빠처럼 따뜻이 감싸주는 남동생 이야기를 할 때보다, 오히려 이 부부는 여전히 아이 같은 순진함을 지닌 채 어른이 되어가는 첫딸의 이야기를 할 때 더 환하고 밝은 미소를 짓고 있어요.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이 부부에게 아기 같은 큰 딸은 그렇게... 더욱더 '선물' 같은 존재일 겁니다.
넌 내게로 오겠지
한 아기가 태어납니다. 인형처럼 예쁘고 귀여운 소녀로 커가죠. 한데 열다섯 살쯤 갑자기 손쓰기 힘든 희귀병에 걸려요. 끝내 그 딸아이를 떠나보내고 병원 복도에서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는 주인공 루이스(에이미 아담스)의 뒷모습으로 영화는 시작됩니다.
곧이어 강변이 훤히 보이는 큰 유리 통창문 집. 세월이 지나 홀로인듯한 언어학자 루이스는 어느 날 정부로부터 불현듯 지구 곳곳에 도착한 외계인들과의 '접촉'을 의뢰받게 되죠. 직경 500미터 크기의 거대한 외계 비행물체에 보이는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은... 이제는 굉장히 익숙한 외계 SF영화의 전형적인 클리셰일 겁니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앞에 나타난 '그들'은 여지없이 세계의 랜드마크 명승지들만 딱딱 골라 박살내며 싸움을 시작할 것이고, 인류는 처음엔 무기력하게 당하다 여러 방법들을 통해 그들을 제압하겠죠. 혹은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 당하게 될지도 모를 끔찍한 결과들을 우린 팝콘을 씹으며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게 될 테니까.
얼핏 이 작품 <컨택트>(원제: Arrival)의 전반부는 그 패턴을 그대로 따르는 듯합니다. TV뉴스로 생중계하는듯한 극사실적 조우를 통해 서로 진의를 모르는 이종 간의 접촉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긴장감과 두려움, 심지어는 어떤 경외감마저 느끼게 만들어요. 인사치레 같은 접촉들이 두어 번 진행되고 나면, 도식적인 SF영화의 흐름에 따라 어느 쪽이든 곧 의도를 드러내며 시원한 액션이 펼쳐져야 하겠지만 오히려 이 작품은 그 반대의 노선을 취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당신은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가 여기 마주한 목적은 무엇인가'. 그 단순해 보이는 질문과 대답을 위해 서로의 언어를 치열하게 분석하고 해석하는 과정들에 거의 영화 전체를 할애하고 있죠. 관점을 다르게 보자면 말입니다, 시원하고 경쾌한 SF액션영화를 기대했던 관객들에게 이 작품은... 실은 재앙이나 마찬가지인 영화일 수도 있어요.
이 예사롭지 않은 SF영화 <컨택트>는, 역시 예사롭지 않은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각색해 만들어졌습니다. 1967년생 대만계 미국인으로 현존 최고의 SF소설작가 테드 창(Ted Chiang)의 단편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중 한편을 기초로 하고 있죠. 출판과 동시에 전 세계 15개국에 번역 출간되고 지금까지 23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SF소설이 받을 수 있는 모든 상들을 다 휩쓸어버린 괴물 같은 책이었어요. 브라운 대학 컴퓨터 과학 전공자답게 풍부한 과학적 이론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동시에 언어학, 사회학, 역사학, 철학 등 다양한 인문학적 사상들을 함께 담고 있어서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영화화가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습니다.
80페이지 남짓했던 이 단편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도 그랬어요. 외계인들과의 '소통'을 그리는 이 이야기 속에 '한 사람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들은 그가 쓰는 언어체계와 관련이 있다'는 사피어-워프 가설, 시간 개념에 따른 변분원리, 선형적이고 목적론적인 사고, 빛의 최단최소 거리를 규명하는 페르마의 원리 등과 같은 복잡한 언어학과 물리학 이론들이 디테일하게 묘사되어 있죠. 게다가 작중화자인 언어학자 루이스의 개인적 삶이 그 서사 속에 선문답처럼 함께 뒤섞여 있어서 애초에 실사화해도 이게 어떤 영화로 만들어질지 굉장히 미지수였을 겁니다. 한데 이 어려운걸, 프랑스계 캐나다 출신 감독인 드니 빌뇌브가 '뚝딱' 해낸 거죠.
그가 누군가요, 2010년 <그을린 사랑>으로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랐었고 2013년 <프리즈너스>로 할리우드에 데뷔한 후 2015년작 <시카리오:암살자의 도시>로 일약 촉망받는 천재 감독 중 하나로 자리 잡은 연출자였습니다. 분쟁지역 전쟁터, 마약이 넘쳐나는 멕시코 국경 언저리, 혹은 세기말적 먼 미래 그 어떤 풍경들 속에서도드니 빌뇌브 감독이 그려내는 이야기들은 고요하고 느리게 인물들의 내면에 초점을 맞췄죠. 이렇게 절제된 호흡 속에서 오히려 극도의 긴장과 몰입감을 이끌어내는 그 걸출한 연출력은 이 작품 <컨택트>에서도 여지없이 백 프로 발휘됩니다. 일견 느리고 답답해 보이는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예요. 그렇게 가만히 영화의 미세한 호흡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외계인'이란 그 설정 자체가 결국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서서히 깨닫게 될 겁니다. 전 우주적 스케일로 보였던 이 이야기가 궁극적으로 관객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오히려... 점 하나처럼 작아 보이는 한 인간의 견지에서 바라보는 '삶의 의미', 그 자체였던 거죠.
넌 내게로 올 테니까
우리가 실제로 사용하는 대부분의 언어들은 말입니다, 당연히 시작과 끝이 있어요. 일렬로 쭉 나아가다 마무리되는 '선형적'인 구조이죠. 과거/현재/미래 시제가 구분되고, 원인이 선행되고 결과가 뒤를 이으며 대체로 순차적 사고의 흐름에 따라 문장이 구성될 겁니다. 반면에 영화 속에서 시각적으로 구현되는 외계어의 모습은 비선형적인 '구체형'의 표의문자에 가깝게 그려지고 있어요. 소리 전달보단 의미를 전달하는 표의어에 가까운데, 동그란 원형으로 이루어져 있어 시작과 끝이 따로 없습니다. 한 문장 안에 과거/현재/미래가 다 어우러져 있고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다 그 속에 들어 있어서, 바로 그 문자처럼 그들은 모든 사실을 하나의 관념처럼 덩어리채 인식하는 거죠.
말하자면 그들은 모든 현상들을 한데 묶어 포괄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을 가졌고, 그로 인해 가지고 있는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사고체계를... 자신들의 언어를 습득한 지구인 루이스에게 어떤 방법으로든 전달하려 한다는 게 이 영화의 핵심 줄거리인 거예요. 그래서 결국 이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을 주인공 루이스가 전 우주적 평화와 화합으로 이끌어낸다는 클라이맥스의 전개들은 솔직히 그 자체로만 보면 좀, 낯간지러울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이 길고 긴 지루함의 끝을 그렇게 전형적으로만 마무리 지었다면 이 영화는 아마 이렇게까지 비평가들과 관객들로부터 칭송받지 못했을 테죠.
이 작품의 진가가 드러나는 순간은, 어쩌면 영화의 진행을 끊어먹는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불쑥불쑥 나타났던 어린 딸과의 회상 장면들이 그 '정체'를 드러내는 바로 그 부분에서부터였습니다. 시작과 끝이 실은 원형으로 이어져 있을지도 모르는 우리의 삶, 그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진행형으로 누군가의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면 우리 인생의 의미는 과연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죠. 우리는 흔히 미래를 '불확실'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우린 우리의 종국적인 그 미래를 이미 다 알고 있어요.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은 모두 떠나가고 망각되고 소멸하고 그리고... 무(無)의 상태, 죽음에 이르게 되지 않나요.
그래서 극 중 외계인들이 지구인들에게 내보이는 문자인 '외계어'가 모양이 다른 수많은 각각의 원형을 이루는 것도 그런 견지에선 꽤나 의미심장합니다. 인생이란 건, 우리의 언어가 그렇듯이 시작과 끝 하나의 선형적 일직선이라기보단 수많은 순간들이 조금씩 굴절되며 어긋나지만 전체적으로는 다시 돌고돌고돌아서 무(無)의 상태로 회귀하는 그런 제각각의 원형에 가까울 테니까요.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들여다보게 된 주인공 루이스의 '선택'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언제가 되든 종국의 그 '끝'을 결코 피할 수 없는 삶 속에서 우리는 지금 어디에, 무엇에, 그리고 누구에게 어떤 가치를 두며 살아가는지 말이에요. 떠올리면 왈칵하고 눈물부터 쏟아질만한 슬픔들이 늘 그렇듯 함께 하겠지만, 그럼에도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는 이 긴 여정 속의 매 순간순간들이 행복함과 설렘 가득한 그런 따스한 여정이기를 늘 바라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내게 이미 다가온 것들, 그리고 다가올 것들을 팔 벌려 포근히 감싸 안으면서... 우린 그 원을 따라 계속 걸어가고 있는 겁니다.
너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된단다
모든 결과를 알면서도
그 끝을 알면서도
난 모든 걸 기쁘게 받아들일 거야
" 당신 인생을 전부,
처음부터 끝까지 알 수 있다면
그걸 바꾸고 싶어요? "
'메롱'이라며 웃으며 그 부부의 딸이 아빠를 놀렸단 얘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자폐 성향을 가진 아이들은 돌려 말하거나 비유적으로 말하는 걸 굉장히 어려워하거든요. 오로지 직관적으로 말하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강해서 농담이나 거짓말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거짓말을 할 수 없으니 또 반대로 남의 악의적인 거짓말엔 쉽게 속겠죠. 사춘기에 들어선 그 첫딸이 최근에 아빠를 황급히 부르더니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채(그게 농담이란 걸 자각하고) 몇 번이나 혀를 삐죽거리며 '메롱'이라고 하더라며, 그 자체만으로 꽤 행복해했습니다. 다가올 미래의 불안들에 당장 큰 의미를 두지 않고, 큰 딸과 더 먼 미래에 '보호자'가 되어 주어야 할 남동생의 현실적인 미래들에 주안점을 두고 좀 더 구체적이고 디테일한 신경을 기울이고 있죠.
제가 영화 <컨택트>의 결말에서 이 부부를 떠올린 건 그 언젠가 우연히도, 주인공 루이스가 했던 저 질문과 같은 상황에서 두 부부가 제게 해 준 이야기가 선명히 떠올랐기 때문이거든요. 그 모든 상황을 알고 다시 태어나도 그 부부는 지금의 첫딸을 다시 맞고 싶다고 말했었습니다. 오히려 더 빨리 알게 되어서 더 효과적인 대처를 미리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이죠. 두 부부는, 그 아이가 태어나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매 순간순간 전해줄 그 감사와 기쁨의 감정들만을 오롯이 들여다보려 하는 듯해요.
더 나아가 심지어 엄마는 '이 아이가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에게 와서 다행이다'라고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습니다. 물론 맞벌이 수입의 적지 않은 금액들이 딸의 치료와 교육을 위해 계속 나갔고 또 얼마나 더 나가게 될진 알 순 없어요. 한데 그렇기 때문에 형편이 더 어려운 다른 형제자매들의 집에 태어나지 않고 이렇게 최선을 다해볼 수 있는 자신들에게 온걸, 그래서 적어도 부모인 자신들에게만큼은... 여느 아이들처럼 공주처럼 귀한 존재로 커가는 걸 천만다행으로 여기는 듯하니까요.
어쩌면 그저 그런 SF영화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영화의 그 결말 장면들에서 그 부부의 이야기가 함께 떠오르지 않았다면... 주인공 루이스가 마지막에 내린 그 '선택'이 제겐 전혀 이해나 공감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어요. 그 '끝'을 알면서도 그런 결정을 내린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떠나간 그 남자처럼, 그'선택'의 진짜 의미에 대해 저도 고개를 분명히 갸웃거릴 수도 있었겠죠.
한데 말입니다.
압도적 스케일의 비행물체를 타고 나타난 외계 문명과의 접촉을 그린 이 삐까번쩍한 SF영화의 원작소설 제목이 전혀 SF답지 않았다는 사실에 새삼 주목할 필요가 있을 거 같아요. 우리나라에서 붙여진 개봉명 'Contact'도, 영화 원제목이었던 'Arrival'도 진짜 제목이 아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