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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프 Sep 26. 2021

아 그런 영화가 아니라니까요

영화"드라큘라"(Bram Stoker's Dracula)



후끈후끈






    애인 없던 군 복무 시절.  정기휴가 받아 집으로 가면서 근처 비디오 가게에 먼저 들렀습니다.  일단 살색 가득한 영화 코너에서 가장 새빨간 작품 하나를 눈도장 찍어뒀죠.  하지만 그 살색 영화는 맨 나중에 꺼내서 다른 비디오테이프들 사이에 슬쩍 끼어 카운터에 올려놓을 거예요.  운 나쁘면 카운터 줄 바로 뒤에서 기다리는 다른 여성분이 제가 고른 그 살색 영화를 내려다보며 피식할 수 있으니까.


  한데 그날따라 맨 위에 올려놓고 가림막을 해줄 눈에 띄는 '명작 영화'가 없어요.  비디오점 아저씨께 살짝 여쭤봤습니다.  

"아저씨, 뭐 추천하실만한 거 없나요?

음... 아저씨가 제 표정을 읽으며 뭔가 고민하는 표정이에요.  이윽고 몇 개의 명작 테이프를 가져다 쫙 펼쳐 주십니다.  그중에 이 영화 <드라큘라>(원제: Bram Stoker's Dracula)가 있었어요.  그리고 제 눈을 바라보며 말없이 엄지 척.


  늦은 밤, 군복을 벗어던져 놓고 후줄근한 츄리닝 차림으로 빌려온 비디오테이프들을 일렬로 쌓아 놓습니다.  물론 회심의 살색 영화 하나는 아직 숨겨둔 상태죠.  그건 식구들이 다 잠든 새벽녘에야 꺼내 볼 거거든요.  아저씨가 엄지 척 해주신 '명작 영화' <드라큘라>를 먼저 틀어 봅니다.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굉장히 유명한 감독에 출연 배우들도 빵빵하다는 그 영화.

음... 살짝 지루하네요.  잠시 후 어리바리하게 생긴 젊은 청년이 동유럽의 어느 음산한 고성에 찾아갑니다.  그냥 끌까 말까 고민하던 중,  갑자기 그 드라큐라성의 후덜덜한 미녀 흡혈귀 3인방이 그 청년의 침실에 스르륵 찾아듭니다.  어질어질 후끈후끈.  남자 하나에 여자 흡혈귀 셋이 반 나체로 한참 뒹굴고 있는 와중에,어머니가 과일 먹으라고 문을 발칵 열고 들어오셨어요.



     

바로 이 타이밍에,




  헙.  이거 로맨스물인데요,라고 말하려니 하필 보이는 장면이 바로 저 협동(?) 플레이 장면.  

어버버 하는 순간에 어머니는 말없이 과일 접시를 두고 나가셨습니다.  그러고 나가시자마자 장면 전환.  내내 지루하게 질질 끌다가 한 번씩 기괴하고 무서웠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흡혈귀 영화에서 거의 빠지지 않는 클리세 같은 장면이 연출됩니다.  드라큘라의 희생양이 된 피해자 여성이 흡혈귀가 되어 가는 과정.  

왜 대체 그 상황에선 맨날 하늘하늘하고 다 비치는 슬립들만 걸치는지 이해가 안 되지만 말입니다, 여하튼 그 반나체의 여성이 온몸을 구운 오징어처럼 뒤틀며 고통의 신음 소리를 내지르고 있을 때쯤 또 방문이 벌컥 열렸어요.  어머니께서 이부자리를 봐주신다며 문을 열고 들어오신 겁니다.  뻘쭘한 내 표정과 화면 속에서 계속 꿈틀대는 어느 헐벗은 여성.   


  얼핏 화면을 보신 어머니는 다시 고개를 돌리며 이부자리를 깔아 주십니다.  어, 어 하며 일어서지도 앉지도 못하는 저를 한번 슬쩍 보시더니 문을 닫고 나가시기 전에 드디어 한 말씀을 툭 던지셨어요.


  " 한창때겠지만,

    적당히 쫌

    봐라. "


  

  아니 그게 아니고 엄마,라고 하려다 타이밍을 놓쳤습니다.  어차피 뭔가 막 설명하는 게 더 어색한 상황이잖아요.  좀 억울한 느낌이었지만 별 수 없었습니다.  끝까지 영화 나머지를 다 보긴 했어도 그게 재미있는 건지 없는 건지를 잘 모르겠더군요.  새벽 3시가 넘어갈 무렵 이 날의 하이라이트였던 그 진짜 살색 영화를 꺼내 몇 장면 빠르게 돌려보다가 뭔가 깊은 현타가 왔습니다.  그냥 고이 꺼내 다시 숨겨뒀죠.  


  당시엔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누군지, 게리 올드만이나 안소니 홉킨스, 심지어 키아누 리브스가 누구인지도 구별을 못했습니다.  솔직히 재미있는지도 몰랐어요.  한데 그 기괴하고 음산하면서도 강렬한 색감들은 꽤 인상적이었죠.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대놓고 헐벗었던 그 살색 영화보다도 이 작품의 그 그로테스크한 섹슈얼리티가 더 강렬하게 남았었습니다.  맞아요, 그때 어머니께 '들켰던' 그 두 장면이 유독 머릿속에 한동안 똭 각인되더란 말이죠.  이후 한동안 부대에 복귀해서도 그 장면들 생각이 났어요.  그때 신작이라며 함께 빌렸던 영화들은 대체 뭐였는지 지금 기억도 나질 않습니다.  


  어쨌든 휴가 복귀 전날, 다 보지 못한 그 살색 영화와 함께 대여했던 비디오테이프들을 모두 싸들고 반납하러 갔어요.  어, 내일 부대 복귀 하는거냐며 아저씨가 재빨리 테이프들을 카운터 밑으로 수거하셨죠.  말없이 미소 지어 드렸습니다.  아저씨도 말없이 미소 지으시더군요.  그리고 진심을 다해 돌려드렸어요.  

가게문을 열고 나오면서 뒤돌아 미소 지으며, 아저씨께 엄지 척을 해드렸습니다.      







드라큘라 캐릭터 모델.  15세기 루마니아 영주 블러드 드라쿨레아.    



내 헤어 스타일에 대해서 어디 입만 뻥긋해봐






  이미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이 영화의 원작이 된 괴기소설 '드라큘라'는 아일랜드의 소설가 브람 스토커가 1897년 초판 발행하여 지금은 흡혈귀 문학의 고전 문학으로 추앙받고 있는 작품이죠.  루마니아 왈라키아 공국의 영주 신분으로 나라를 지켜낸 전쟁영웅이었지만 포로들을 긴 꼬챙이에 꽂아 죽이는 잔인한 형벌을 즐기기로 악명 높았던 실존 인물 블러드 드라쿨레아를 모델로 창조해 낸 캐릭터가 바로 흡혈귀 '드라큘라' 였어요.  십자가와 마늘, 성수를 두려워하고 늑대나 박쥐 등으로 변신하며 낮에는 흙이 담긴 관 속에서 잠을 자야 하는 등 흡혈귀의 전형적 이미지들이 바로 이 브람 스토커의 소설 속에서 만들어졌었습니다.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영화뿐 아니라 연극, 뮤지컬 등 다양한 대중매체들을 통해 나타나는 흡혈귀들의 이미지는 바로 이 소설 속 전통적 특징들에서 다시 변형되거나 재해석되는 흐름을 보여왔죠.  꽤 시간이 지난 작품이긴 합니다만 이 작품 역시도 되짚어 보면 그러한 측면이 있었어요.  <대부> 시리즈, <컨버세이션>, <지옥의 묵시록>등의 작품들로 70년대 미국 영화계의 거장으로 불렸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1992년에 연출했던 이 <드라큘라>는... 'Bram Stoker's Dracula'라는 원제목에서도 느껴지듯이 현재까지 가장 원작 소설에 충실하다고 평가받고 있는 고전 걸작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의미가 분명 있었죠.  그저 피에 탐닉하는 끔찍한 크리쳐로만 그려지던 이전의 드라큘라 캐릭터와는 좀 다른 색깔로 그려졌습니다.






자살한 자의 영혼은 구원받을 수 없지




이것이 내가 니들을 위해 싸운 대가라고?




그럼 나는 빛을 버리겠다






  일기, 편지, 전보, 신문기사들을 나열해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서간체 소설의 형태를 갖췄던 원작처럼 이 작품 역시도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내레이션들로 극을 끌어갔습니다.  하지만 메인 캐릭터라 할 수 있는 드라큘라 백작에 대한 감정적 측면에서 영화는 원작과는 좀 다른 접근법을 보여주죠.  원작 속에선 가해자와 희생자의 관계에 불과했던 드라큘라(게리 올드만)와 미나(위노나 라이더)가 이 이야기 속에선 시공간을 뛰어넘는 연인의 관계로 설정되어 있어요.   


  영화는 오프닝에서부터 '그가 어떤 사람이었나'를 보여줍니다.  국가와 교회를 지켜내기 위해 처절히 전쟁터에서 싸워 승리했지만 자신의 거짓 전사 소식에 절망한 아내가 투신자살을 해버리죠.  그의 깊은 헌신과 공헌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 분노와 절망 속에서 신을 저주하며 스스로 흡혈귀가 되는 모습이 그려져요.  

주검으로 누워있는 아내의 곁에서 스스로 어둠의 존재가 되던 그 오프닝에서부터,  피를 빠는 악귀로만 묘사되었던 소설 속 이미지와는 달리 이 작품 속 드라큘라는 사랑의 상실에 절망하고 긴 세월 고통받다 결국엔 구원받는 '한 남자'의 모습으로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음산한 고성에서 죽도록 식겁하고 심지어 약혼자까지 빼앗길 뻔했던 영국인 변호사 조나단 하커(키아누 리브스)에겐 한여름 밤의 끔찍한 악몽에 불과하지만... 저 괴상한 헤어 스타일의 남자 드라큘라의 관점에선 다른 장르의 이야기가 되어 버리죠.  400여 년간 어둠 속에서 스스로 저주받은 존재로 지내오다가 어느 날 갑자기 환생한 옛 연인을 무심히 마주쳐버린 한 남자의 애절한 핏빛 순애보랄까요.


  물론 당시 목석같은 발연기로 감정 없는 저 흡혈귀보다도 더 공포(?)스러웠던 키아누 리브스로 인해 더 그래 보였을진 모릅니다만,  드라큘라 역할을 맡았던 배우 게리 올드만의 열연은 지금의 기준으로도 가히 명불허전입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전쟁영웅의 모습에서부터 뱀처럼 음험한 음모가, 기품 넘치는 중년 신사의 모습에다 눈뜨고 봐주기 힘들 정도로 혐오스러운 괴물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무엇보다 새삼 더 가슴 아련하게 와닿는 이 작품 속 드라큘라의 모습은 그저 보통 사람의 모습으로 매번 등장할 때였어요.  놓쳐버린 사랑에 죽고 사는 평범한 한 인간 남자의 모습.  팔색조처럼 그 모든 연기들을 모두 직접 소화한 게리 올드만의 열연들이 이 피칠갑 캐릭터를. 훨씬 더 입체적으로 와닿게 만들었던 거죠.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시간의 대양을 건너왔소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시간의 대양을 건너왔소."

  배우 게리 올드만이 이 작품을 선택하게 만들었던 결정적인 대사였다고 해요.  기억도 이젠 잘 나지 않을 만큼 오래전에 이미 본 영화지만 지금은 좀 다른 영화로 보입니다.  창백한 얼굴로 면도칼에 묻은 피를 몰래 핥으며 황홀하게 몸을 떨던 그 기억 속 드라큘라가 저렇듯 달콤한 사랑의 밀어를 돌아온 옛 연인에게 감미롭게 속삭였었다니.   영화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그 기괴한 고딕 호러 스타일과 강렬한 분장, 의상들로 인해서 기억 속 이 작품에 대한 이미지들은 사실 그만큼 그로테스크한 잔상들이 대부분이었죠.  그 문제의 흡혈귀 미녀 3인방 장면을 포함해서.  


  하지만 사실 이 영화의 진정한 명장면은 기품 있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드라큘라가 400여 년 만에 다시 만난 연인에게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막상 그녀가 자신을 닮지 않기를 갈등하며 번민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같은 흡혈귀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피를 마시는 그 연인을 내려다보며 배우 게리 올드만이 보여주던 그 짧은 찰나의 복잡 미묘한 표정과 뜨거운 눈물.  그리고 신을 저주하며 악귀가 되었던 바로 그 장소에서 평온한 인간의 얼굴로 되돌아와 그 '사랑'으로 구원받게 되는 그 장면들에 이르기까지.  


솔직히 오래전 그날,  살색영화 보기 전 시간 때우기용으로 겨우겨우 엔딩까지 지켜보면서 '거 참 드럽게 안 죽네'라며 중얼거렸었지만 지금은 그 장면에서 계속 그 노래 가사가 겹쳐졌어요.  한 남자가 있어. 널 너무 사랑한. 한 남자가 있어. 사랑해 말도 못 하는.  

네, 김종국의 '한 남자'를 그 장면 삽입곡으로 겹쳐 깔아줘도 잘 어울리겠단 생각이 새삼 들었습니다.  저 이상한 헤어 스타일하고 있던 친구, 이제 보니 사랑의 상실에 지독히도 고통스러워했던 가련한 '한 남자'이자 '로맨티시스트' 였던 거죠.  그래요 이 영화, 공포영화가 아니었어요.  실은 첫 데이트에 굉장히 잘 어울릴만한, 가슴 저미는 한 편의 로맨스 영화였던 겁니다.  상대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더더욱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는 영화기도 하죠.


  이제야 그때 비디오 가게 아저씨가 내미셨던 그 엄지 척의 진짜 의미를 알았어요.  그분의 그 엷은 미소는... 구운 오징어처럼, 아니 활어처럼 살아 꿈틀대는 짜릿한 에로티시즘이 아니라 400년 시간의 대양을 넘어서는 숭고하고 알흠다운 진짜 사랑의 모습을 전하려 하셨던 겁니다.  걸어 다니는 호르몬 덩어리나 마찬가지였던 그때의 저는 차마 깨닫지 못했었나 봐요.  현자나 다름없으셨던 비디오 가게 아저씨의 그 깊은 안목과 통찰을.


그러니까 엄마.  

이거는,

그런 영화가 아니라니깐요.  진짜로.


















그래도 모니카 벨루치는, 어질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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