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레이프 May 26. 2021

전설 속,그 남자

영화 "첫키스만 50번째"






미안해,  나 금사빠야




달걀 같은 이 남자의 매력은




역시 유머와 말빨






  대학교 4학년 1학기쯤, 친한 과 친구 하나가 그때 타고 있던 차 한 대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폐차를 할까 하다가 혹시 제게 생각이 있느냐고 묻더군요.  그때 그 차는... 당시 대우 자동차에서 나왔던 국민 경차 '티코' 였어요.  친구도 누군가 타던걸 사서 오래 몰고 다녔고, 그때 아버지 타시던 다른 차를 받을 거라   금수저   어떻게 할지 고민 중이었던 겁니다.  장난 삼아 얼마에 나한테 팔거냐 물었더니 현금 30만원이면 되겠다네요.  물론 그때 제 한 달 식비 포함 용돈이 15만원 정도였고 취업도 안 한 학생 신분이니 그것도 적은 돈이 절대 아니었죠.  


  한해 먼저 졸업해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던 당시 여친, 집사람에게 넌지시 얘기를 꺼내 봤습니다.  며칠간 머리 맞대고 둘이 함께 계산기를 막 두드렸어요.  회사 마치고 집사람이 우리 학교로 찾아올 때 드는 비용, 혹은 제가 학교 마치고 집사람 회사로 찾아가는 비용, 둘이 데이트하며 지하철이나 택시를 타는 비용, 거기다 데이트 후에 집사람 집 앞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비용 등등의 교통비들로 봐서 충분히 차값 30만원은 뽑겠다며 서로에게 최면과 암시를 걸고 있었습니다.  결국 방학 때 했던 알바비 꼬불쳐 뒀던 거랑 용돈 보태서 그 낡은 차를 샀고, 보험금이나 기타 세금 등등은 집사람이 자신의 월급에서 보탰을 거예요.  


  인생의 첫 차, 남자의 첫 차였던 그 '빨간 티코'는...  그렇게 제게 왔었던 거죠.    






야, 타

                   





  실은 친구에게 받자마자 정비소에서 체크를 받아보니 연료계통에 문제가 있대서 순식간에 수리비 30만원이 더 나갔었습니다.  그래도 계속 미세하게 기름이 새는지 차 안에 항상 기름 냄새가 번졌어요.  파워핸들이 아니라서 저 작은 차 핸들 돌리는 것도 뭔 중장비 차량처럼 뻑뻑하고 힘들었죠.  차 유리도 문 안쪽에 달린 레버를 열심히 붙잡고 돌려줘야 했습니다.  그나마 운전석 쪽 유리는 그 레버까지 고장 나서 제가 그 창 유리를 직접 손으로 잡고 절반 정도는 들어 올리거나 끄잡아 내려줘야 했죠.  

그럼에도 그때 우리는 저 낡은 30만원짜리 경차로 꽤 행복했었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첫차'였으니까요.  문이 쉽게 따져서 뒷유리 쪽에 진열해둔 많은 인형들을 두 번이나 몽땅 털렸었고, 어느 주차장에서든 항상 천덕꾸러기 신세였지만 더 자주, 더 멀리, 더 오래 데이트를 할 수 있어서 그저 좋았던 거죠.  무엇보다 운전석과 조수석이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좁아서... 그래서 으슥한 데서 서로 뽀뽀하기에는 오히려 더 좋다고 사람들이 그러기도 하잖아요?    저는 잘 모르지만     


  그때 아마 남들이 보기엔 엄청 우습고 오글거려 보였을지 모르지만 종종 제가 장난 삼아 황급히 운전석에서 먼저 내려 집사람이 내리기 전에 두 손으로 문을 열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탈 땐 문을 열면서 다른 한손으론 집사람 머리를 살짝 보호하듯 받쳐주기도 했어요.  물론 집사람도 그때 좀 우습고 민망했을 테지만 분명 또, 살짝 싫지 않은 표정이긴 했습니다.  한데 장난 반, 진심 반.  그렇게 한두 번씩 문 열고 닫아주는 것도 점점 시들해졌던 거 같아요.  

굳이 따지자면 그것만이 아니었죠.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당연해서, 머쓱해서, 귀찮아서, 소홀해져서... 점점 무덤덤해지고 무심해져 가는 것들이 실은 한두 개가 아니었던 겁니다.          





                                                                                             


그녀는 매일 똑같은 날을 살아요




걔한테 혹시 상처 주면




아주 그냥 조사버린다




그럼 까짓 거,  매일 나한테 반하게 만들지 뭐






  하와이 동물원에서 수의사로 일하고 있는 헨리(아담 샌들러)에겐 만고불변의 연애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하와이에 살고 있는 여자와는 절대 연애하지 않는다는 거였죠.  가볍게 만나고 서로 부담 없이 즐긴 후 뒤도 안돌아보고 쿨하게 빠이빠이 할 수 있는 여행객들이 그에겐 딱 맞았어요.  눈이 돌아갈 정도의 미남이라든가 근육남이 결코 아님에도, 서글서글한 말빨과 유쾌함이 하와이가 주는 묘한 '설렘'과 어우러져 그의 연애 성공률은 지금까지 꽤나 타율이 높았던 모양입니다.  저 꼭 달걀같이 생긴 평범한 인상의 남자가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싶지만 따지자면, 우리의 작업남 헨리는 이른바 단기연애의 초절정 고수인 셈이죠.  


  영화 속에서 그리 자세히 묘사되진 않지만 생각해보면 아마 그럴 겁니다.  따분했던 일상에 찌들다 이곳 하와이를 들뜬 마음으로 찾은 여성들에게 찐 토박이로서 우연을 가장한 인상적인 '첫 만남'을 만들 거예요.  그리고는 그 며칠 동안 상대가 이곳에서 꿈꾸는 가장 '극적인' 순간들을 차곡차곡 실현시켜주겠죠.  자신의 페이스대로 끌고 갈 그 '결정적인' 순간이 오기까지 어쩌면 여행기간 내도록 만큼은 상대 여성들에게 하늘의 별까지도 따다 줄 수 있어 보일 정도로 아마 최선을 다했을 겁니다.  이렇게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것보단 오히려 깔끔한 마무리를 짓는 게 더 어려운 일로 보이지만... 헨리에겐 그것도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인가 봐요.


  근데 어느 날 이런 헨리의 눈에 들어온 특이한 여자가 한 명 있습니다.  그림 같은 휴양지나 관광지에서가 아니라 길 가다 우연히 들린 로컬 레스토랑의 한 테이블에서였어요.  평범한 분홍 반팔 티에 펑퍼짐한 흰색 바지 차림으로 어디 동네 마트에 장이라도 보러 나온듯한 그런 인상의 여자.  더구나 헨리의 연애 철칙과는 맞지 않게... 하와이 거주민이었죠.  더 특이한 건 이 루시(드류 베리모어)라는 여성이 단기기억상실증 환자라는 사실입니다.  그 얘기를 전해 들은 헨리의 절친은 그렇게 얘기하네요.  "차라리 잘 된 거 아냐? 그게 딱 니가 원하는 거잖아"라고 말이죠.  맞습니다.  질질 끌고 갈 필요 없는 쿨한 기적 만남.  그게 평소 헨리가 그토록 원하는 이성관이자 연애관이었잖아요.  하루 멋지게 공주처럼 떠받들어주고 다음날이면 서로 책임지거나 고민할 거 없이 떠나가도 욕할 필요 없는 그런 관계.  

한데 정작 문제는 말이에요, 우리 헨리가 달라져버렸다는 겁니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인해서 매일 똑같은 날을 살아야 하는 바람에 '내일'이 없어져버린 이 여자에게 정말로, 빠져버린 거죠.






   

그녀를 매일 사랑에 빠지게 만들

  



헨리의 50가지 그림자




저거 죽일까요?,            아니, 쫌만 더 지켜보고






 

  과장된 슬랩스틱보단  은근히 능청스러운 표정과 대사들로 어필하는 아담 샌들러는 이 하와이 토박이 바람둥이 헨리의 이미지에 참 잘 맞아떨어집니다.  연기 스펙트럼이 넓은 드류 베리모어와의 연기 합도 꽤 잘 들어맞죠.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단기기억상실증으로 매일 똑같은 날을 사는 루시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애쓰는 헨리와 주변 사람들의 모습들이 중점적으로 그려져요.  전형적이고 상투적인 설정과 대사들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등장하는 주조연 캐릭터들 모두가 기본적으로 착하고 순한 사람들입니다.  악한 캐릭터가 없고, 슬픈 장면들에서도 예의 유머와 유쾌함으로 이어지는 밝고 경쾌한 영화라... 개봉한 지 16여 년이 지난 '고전' 영화임에도 이미 다 알고 보는 그 장면들조차도 마치 보석처럼 빛나는 그런 느낌이죠.


  물론 세월이 지나 다시 차근히 뜯어보는 이 작품에서도 새삼 이전과 다르게 눈길이 가는 부분들은 있습니다.  예전엔 당연히 주인공 두 사람이 꽁냥꽁냥 하는 모습들만 기억에 남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두 사람을 위해서 '보이지 않게' 애쓰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이 더 눈에 띄더란 말이죠.  루시가 자신의 기억상실증을 눈치채고 충격을 받는 일이 없도록 모든 것들을 원위치로 돌려놓는 가족들의 진땀 나는 노력들이 새삼 더 눈에 들어와요.  물론 단 하루 만에 그녀와 매일 사랑에 빠져야 하는 단기연애의 고수 헨리 역시도 남달라 보이죠.  그들의 애타는 노력들이 영화 속에서도 매일 성공하진 못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무너진 삶과 그로 인해 함께 무너진 주변인들의 삶을 알게 되곤 굉장히 슬퍼하고 좌절하는 루시의 모습이 부각될 때도 있어요.  


  이런 측면들에 더 초점을 맞추게 된다면 실은 굉장히 다른 색깔의 영화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작품 <첫키스만 50번째>는 이런 민감한 디테일들을 결코 가볍게 다루지 않으면서도 시종일관 따뜻한 유머와 익살들을 놓치지 않습니다.  언제 어느 때 그냥 어느 장면이든 틀어놓고 봐도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로맨스 영화의 공식을 따르고 있음에도 또 의외로 굉장히 '현실적인' 엔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작품이기도 하죠.  

물론 이 '현실적'이라는 표현이 개과천선한 극 중 헨리 같은 남자,  매일매일을 똑같이 사랑에 빠진 첫날처럼 만들어주는 그런 남자를 지칭하는 건 결코 아니에요.  현실적일 수가 있나요 그런 남자가, 무슨 전설 속의 유니콘이라면 모르겠지만.






전설 속 유니콘




우리 사랑은 안녕한가요




오빠야랑 조개구이 묵으러 가까




청사포에 맛있는 데 많거덩







  이렇게 오랜만에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유독 가슴에 콕 와닿는 대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물론 로맨스 코미디답게 알콩달콩 닭살 돋는 대사들도 다 아련했지만 이번엔 좀 색다른 대사 하나가 귀에 쏙, 아니 가슴에 콕 박히더군요.  루시(드류 베리모어)가 스스로 단기 기억상실증임을 인지한 후 어느 날 그녀의 다른 지인들에게 헨리(아담 샌들러)를 소개하는 장면이었어요.  그때 자기 남편과 함께 헨리를 처음 본 어느 지인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머, 이 분이 매일 루시를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는 그분인가요? 너무 대단해요, 우리 남편은... 이제 차 탈 때 문도 한번 안 열어주는데."


문도 한번 안 열어주는데.

문도 한번 안 열어주는데.

문도 한번 안 열어주는데...


아 네 그러고 보니 말입니다, 처음 함께 돈 모아 장만했던 그 30만 원짜리 빨간 티코를 타던 시절엔... 비록 좀 장난스러웠다 해도 집사람이 타고 내릴 때 종종 두 손으로 공손히 차 문을 열어주곤 했었죠.  손 한 번 더 잡아 보려고, 뽀뽀 한번 더 하고 싶어서, 막차 한번 끊겨 보려고, 그래서 이 사람이 영원히 내 사람이었으면 하고 수많은 밤을 골똘히 고민하던 때가 분명히 제게도 있었습니다.  차 문 안 열어준다고 세상이 멸망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서서히 하나둘씩 모든 일들이 '당연한' 일들로 여겨져 무심해지면 결국엔 가장 기본적인 것들조차 서서히 소홀해진다는 걸 항상 지나고 나서야 안다는 게 문제였던 거죠.  

말하자면 이 영화 <첫키스만 50번째>는 단기연애의 고수였던 바람둥이 헨리가 장기 연애의 초고수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단기연애의 포인트는 바로 '순간의 강렬한 임팩트' 일지 모릅니다.  그럼 대체 이른바 장기 연애의 초고수가 되려면 뭐가 가장 중요한 걸까요?  뭐 딱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수많은 비결들이 있겠지만 적어도 영화 속 헨리가 매일 기억이 리셋되는 루시를 그렇게 성공적으로 '꼬실 수' 있었던 건 그녀를 이미 '당연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차 문을 굳이 열어주지 않아도 당연한 사람이 아니라, 매일 뛰어가 차 문을 열어줄 만한 그런 사람으로 매일 그녀를 바라보기 때문인 거죠.


  그래서 말입니다, 사실 이젠 정말 많이 쭈글시럽지만 아주 조심스럽게, 다시 해보려고 해요.  마트 장 보러 가서 세상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두 손으로 차 문 열어주기.  

혹시 또 모르잖아요?  

계속 그러다 보면...

언젠가 저도 전설의 유니콘이 되어서 갈기를 휘날리며 훨훨 뛰어다니게 될지.       















* 위 이미지들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며

   이미지들에 대한 모든 저작권은 해당 제작사에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보, 그냥 없던 걸로 할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