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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프 Dec 18. 2021

다시, 영업을 재개합니다.

영화 "행복 목욕탕"







      '수증기처럼 주인이 증발했습니다.

       한동안, 목욕물을 데우지 못합니다.'


                                        - 행복 목욕탕 -






  욕조에 따뜻한 물을 찰랑찰랑 채우고 멍하니 앉아 있는 걸 좋아합니다.  어릴 땐 뜨거운 물이 싫어서 아버지가 목욕하러 가자고 할 때마다 도망치고 싶을 정도였어요.  물론 지금도 몸이 데일 정도로 뜨거운 물은 꺼립니다.  손을 넣어 저어서 따뜻하다, 그 정도의 느낌이면 괜찮죠.  딱 그 온도쯤.  


  앉아서 멍 때리기 좋은 시간은 아침 일찍, 아니면 아예 식구들이 잠든 깊은 한밤중입니다.  그 시간쯤이면 거리의 자동차 소리들, 각종 소음들도 잦아들고 모두 다 잠들었을 시간이라 꽤 조용하거든요.  물이 거의 다 채워질 때쯤 적당한 책 한두 권을 들고 욕실로 가 옷을 벗은 뒤 조용히 미끄러져 물속에 스르륵 몸을 담급니다.  책은 읽기도 하지만, 옆에 그냥 놔둘 때도 많죠.  꼭 읽진 않아도 돼요.  멍 때리러 들어온 거니까.  머리에서 코까지만 물 밖으로 내놓고,  팔짱 끼고 몸은 최대한 쭉 뻗은 채로 30분에서 길게는 한 시간 가까이 그렇게 멍하니 뒤로 기대어 있곤 합니다.  가끔은 자다 일어난 집사람이 혀를 끌끌 차고 가거나 슬며시 찾아 들어온 고양이들이 앞발로 물을 몇 번 치며 놀다 가긴 하지만 고맙게도, 식구들 누구도 그 시간을 방해하진 않아요.  알아서 그러려니 해줍니다.


  특히 짙은 상념들로 몸과 마음이 지치는 날엔 집에 돌아오는 길 내내 따뜻한 물이 채워진 그 욕조를 유독 더 떠올리기도 해요.  그렇게 오자마자 곧바로 물을 받아 욕조행.  고요한 욕실, 수증기 자욱한 그 특유의 습기와 물 내음.  내 몸 움직임에 따라 살짝살짝 출렁이는 그 물결을 조용히 느끼고 있다 보면... 뭐랄까요, 마치 누군가 등 뒤에서 따뜻하게 감싸 안아 토닥여주는 그런 느낌도 들죠.  물이 한참 뒤 식어서 서늘한 느낌이 들 때쯤, 일어나 샤워 후 물기를 닦으면 머릿속을 맴돌던 오만가지 잡념들이 몸 밖으로 다 빠져나간 듯합니다.  물론 겨울엔 하루에도 아침저녁으로 두 번씩이나 그러고 앉아 있을 때도 있으니 쌓여가는 수도요금과 필연적인 피부 건조증으로 집사람의 눈치를 봐야 할 때가 있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담배는 오래전에 끊었어도, 이건 못 끊겠는걸.   









  자, 일본 개봉 원제목은 <물을 끓이는 정도의 뜨거운 사랑>.  그리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물을 데우는 엄마의 뜨거운 사랑>이란 제목으로 알려졌던 이 <행복 목욕탕>, 어쩌면 그런 느낌의 영화일지도 모르겠어요.  걸치고 있던 '껍데기'를 벗어두고 따뜻하게 데워진 목욕물 속에서 몸과 마음에 쌓인 기름기들을 조금씩 조금씩 수챗구멍으로 흘려 내보내는 그런 느낌.  그 목욕물처럼 포근한... 나의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영화.  제게는 분명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포스터 속 화목해 보이는 네 식구의 가족사진, 제목부터 달달해 보이는 이 <행복 목욕탕>은 어떤 이야기일까요.  이렇게 노골적으로 '행복'이란 단어를 전면에 내세우는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두 가지 양상을 보입니다.  흰 바지 입은 아빠와 분홍빛 플레어스커트를 입은 엄마가 환하게 웃고 있고, 잔디 마당 넓은 집에 아이들이 꺄르륵 웃으며 커다란 강아지와 뛰어노는 전형적인 그런 모습.  말 그대로 '행복함' 그 자체를 통해 행복을 이야기하는 작품들이 있어요.  반면에 또 다른  작품들은 그 정반대의 양상으로 '행복'을 말하기도 하죠.  행복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아픔이나 슬픔을 지켜보면서 그들이 가지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그 결핍된 '행복'에 대해서 다시 떠올려보게 만드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 <행복 목욕탕>은 어떤가요.  가업인 대중목욕탕을 둘러싼 유쾌한 가족 코미디쯤일 거란 예상과는 달리,  실은 전혀 '행복하지 못한' 가족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어요.  게다가 우리가 흔히 신파, 막장이라고 말하는 대부분의 설정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불륜, 가출, 방치, 가정불화, 학교폭력, 불치병, 그리고 출생의 비밀에 이르기까지...  

우유부단하고 무책임한 남편 가즈히로(오다기리 죠)는 바람나서 집을 나간 지 1년이 넘었고, 소극적인 어린 딸은 왕따로 괴롭힘을 당하고 있어 학교 가기가 늘 죽기보다 싫습니다.  힘든 목욕탕 영업을 접고 제과점 아르바이트로 홀로 생계를 잇던 엄마 후타바(미야자와 리에)는 말기 췌장암으로 덜컥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되죠.  그렇게 영화가 시작돼요.  맞습니다, 영화 시작부터 어쩌면 한없이 점점 가라앉는듯한 그런 느낌.


  한데 겹겹이 파도처럼 몰려오는 그 불행들의 연속에 아주 잠시, 혼자 눈물 흘리던 후타바가 뭔가 결심한 듯 가볍게 미소 지으며 훌훌 털고 일어나요.  그리곤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해놓아야 할 일들을 '씩씩하게' 이루어 가려고 하죠.  지겹도록 진부해 보이는 설정들에서 시작되는 그녀의 이 '버킷 리스트'들이 특별하게 와닿기 시작하는 건 바로 이 시점에서부터에요.  이제부터 본격적인 신파의 끝을 보게 되리란 예상을 보란 듯이 깨버리고... 영화는 오히려 너무나도  지나치게  차분하고 담백하게 그녀가 만들어가는 '따뜻한' 변화들을 가만히 지켜보게 합니다.  지켜보는 관객들의 감정선도 마치 서서히 데워지는 목욕물처럼 그렇게 작품 속 온도와 맞춰지게 되죠.  아주 차근차근, 서서히.






     




     







  영화가 끝을 향해 달려갈 즈음.  

  병세가 악화 되어 종일 호스피스 병원에 누워있어야 할 정도가 되어서야 아내이자 엄마인 후타바의 지나온 삶의 윤곽이 그려집니다.  어쩌면 평생 그녀가 진정으로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을까 싶어서, 어쩌면 이 영화의 제목은 그 가당치도 않은 <행복 목욕탕>이 아니라 차라리 <혐오스러운 후타바의 일생>으로 바꿨어야 했다 싶을 정도니까요.  그녀 인생의 어느 시점, 어느 누구에게라도 격한 비난을 퍼붓고, 분노를 토해내고, 머리채를 잡아 뜯으며 패악질을 했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겁니다.  

근데 죽음을 목전에 둔 그녀도, 그런 그녀의 모습들을 담아내는 이 작품의 목소리도 그런 일반적인 흐름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어요.  오히려 더 담담하고 차분해지죠.  시간을 두고 영화를 여러 번 다시 감상해보면서 그런 그녀의 심리에 좀 더 집중해봤습니다.  상식에서 벗어난 그 비정상적 관계들마저 모두 끌어안으며 그들이 이 험한 세상에서 진짜 가족으로 뭉쳐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준 그 '초인적' 살신성인의 원동력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엄마니까? 아니면 가족이란 게 원래 그런 거니까? 그냥 다 당연히?     


  엄밀히 따져서 그녀의 가족들은 일반적 혈연으로 묶인 그런 가족이 아닙니다.  피를 나눈 내 새끼라서 맹목적으로 헌신하는 그런 사랑과도 좀 다르죠.  '모성은 위대하다'라는 일반적 관점만으로 이 작품을 판단하는 건 내내 일방적으로 기구하기만 했던 후타바를 여전히 '객체'로만 보는 셈이에요.  '여자니까, 엄마니까 그럴 수 있다'라는 생각은... 오히려 '여자라면, 엄마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라는 잘못된 고정관념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곧잘 잊고 살지만, 아낌없이 주는 나무인 것만 같은 우리의 현실 속 '엄마'들도 당연히 행복하고 싶은 주체적 존재들이잖아요.  희생만 하는 기계가 아니라.  


  후타바는 한 주체로서,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의 가치를 선택했습니다.  부모복, 남편복, 자식복 한번 제대로 누려보지 못하고 쓸쓸히 가야 하는 운명이 억울해서 누구 하나 작정하고 아작을 낸다한들 그녀를 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어요.  하지만 그녀는 길지 않은 삶을, 스스로 선택한 방식으로 가장 가치 있게 만들고 떠나려 합니다.  남겨진 이들의 인생이 그녀의 바람대로 그렇게 의미 있게 변해간다면, 종국적으로는 그녀의 지난 박복했던 삶들도... 훗날 더 깊은 의미로 남겨질 수 있을거란 믿음.  비단 '엄마'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후타바는 더 그렇게 바랬을 거에요.  이 작품을 통해 '차세대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별명이 붙게 된 나카노 료타 감독도 한 인터뷰에서 그렇게 얘기했었죠.  

"이 영화는 삶에 대한 이야기이지,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하는 일은, 무엇보다 결국 나 자신을 위하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뻔한 신파극과 막장 드라마들이 종종 비난받는 이유는 뭘까요.  이 영화 <행복 목욕탕>에서도 그려지는 불륜, 가난, 가출, 방치, 가정불화, 학교폭력, 불치병, 출생의 비밀들이 비현실적인 것이거나 허구의 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이어서?  세상 일어나지 않는 일들을 마치 스릴러처럼 과장하고 있어서?  그래서일까요?  들여다보면 사실 어느 집이나, 어느 누구에게나 남들에겐 말못할 한두 가지씩의 가슴 아픈 '신파'들은 분명 존재합니다.  불편하고 껄끄럽지만 분명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 그 고통들은 늘 함께 있으니까요.

다만 우리가 어지간하면 멀리하고픈 그 신파극과 막장 드라마들은... 그 고통들이 주는 그 파괴적 에너지, 그 자체에만 치중합니다.  물론 그 속의 악인들이 종국에는 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권선징악의 구도로 수습되곤 하지만 그런 귀결까지 가는 동안의 과정들이 그만큼 또 역시 '막장'스럽죠.  극한의 분노, 욕지거리, 멱살잡이, 몸싸움, 패악질, 삿대질, 머리채 뜯기 등등...  네, 딱 떠오르는 그 모습들 그대로예요.  그걸 보며 막상 스트레스가 풀리기는커녕 실은 늘 더 기가 빨려 나가는 느낌이 들곤 합니다.  공허하고, 허무하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이.


  이 작품 <행복 목욕탕> 역시 표면적으론, 까면 깔수록 신파가 가득한 '막장 어벤저스' 스토리에요. 하지만 이들을 담아내는 카메라의 시선들은 지극히 차분하고 담담합니다.  심지어 담백하기까지 해요.  신파적 설정들로 가득한 이 영화를 통해서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선의와 호의들로 채워지는 그 '관계'의 의미를 다시 떠올리게 하죠.  물론 그 '관계'란게 말입니다,  비단 피를 나눈 혈연으로만 국한되어 그려지진 않아요.

그런 맥락 속에서 이 작품의 독특한 감정선을 쭉 따라왔다면  보기에 따라선 살짝 불편하게도 보이는 문제의 그 엔딩 장면 속 가족들의 모습도 충분히 공감이 될 겁니다.  가족들의 사연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그 '행복 목욕탕'에서, 아내이자 엄마였던 후타바에게 보내는 그들만의 '따스한' 진짜 헌사이자 추도였으니까요.  만약 하늘나라란 게 있다면, 그래서 그곳에서 후타바가 그 모습을 내려다본다면 가족들의 그 이상한(?) '추도'에 의아해 했을까요?  아뇨, 오히려 그 정반대일 겁니다.  서서히 데워진 그 물의 온기를 통해 여전히 그녀는, 남겨진 가족들의 맨 몸을 하나하나 등 뒤로부터 따스하게 감싸 안아주고 있는 것과 다름없어 보였죠.  그래요, 생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당신 옆의 누군가가, 말없이 늘 그래왔듯이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 지금은 꿀처럼 달콤한 토요일 밤입니다.  

오늘 밤엔 꼬맹이들이 다 잠들고 나서, 집사람과 함께 욕조에 나란히 앉아 멍을 때려봐도 될 듯 싶어요.  

따뜻한 목욕물을 출렁이게 받아 놓고서 미끄러지듯 그렇게, 스르륵.

떠올리기만 해도

벌써 이렇게,

따. 뜻. 해. 집. 니. 다.









             '다시, 영업을 재개합니다'

                                - 행복 목욕탕 -












* 위 이미지들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며

  이미지들의 모든 저작권은 해당 제작사에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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