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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프 Dec 21. 2021

딸기 스무디 주세요,

제발 좀






 너무 부끄러워서 정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기억들이 은근히 있어요.   자려고 누웠다가 떠오르면, 이불킥 정도가 아니라 지붕 뚫고 올라 저 대기권까지 하이킥을  날리고 싶을 정도의 가억들도 실은 몇 개 있습니다.  

그중에서... 지금도 어디 커피숍 가서 스무디 시켜 먹을 때마다 불현듯 오르는 기억 하나를 풀어볼게요.  한동안은 그 트라우마(?)로 좀 허우적거렸습니다.  아직도 울 집 꼬맹이들은 이걸로 저를 , 종종 놀리거든요.







    몇 년 전쯤.  부산 광복동 롯데백화점 건담 베이스 매장에 건프라를 사러 네 식구가 함께 갔던 날이었어요.  아들램 꺼, 제꺼 건담 하나씩을 기분 좋게 사들고 내려오다 백화점 어느 층인가에 한 커피 매장이 보였습니다.  다리도 좀 아프고 목도 말라서 거기서 뭘 좀 시켜먹고 가기로 했죠.  메뉴판에 다양한 커피류와 스무디 종류들이 보였요.  저는 왠지 찬게 좀 땡겨서 아들램, 딸램과 함께 스무디를 꼭 먹고 싶었습니다.  


  보니까 스무디가 세 종류.  바닐라, 딸기, 블루베리.  집사람은 커피를 마시고 스무디를 따로 두 개 시켜서 꼬맹이들과 셋이서 나눠 먹는 걸로.  세 식구는 테이블에 앉아 있었고 저는 주문을 하러 갔습니다.  여직원 한 분이 살짝 피곤하신 표정으로 인사를 하시고 주문을 받더군요.  제 뒤로 다른 두어 분도 주문을 하러 함께 줄을 섰어요.


"뭐 드시겠어요?"


  메뉴판을 지긋이 몇 초 올려다봤습니다.

"음...  아메리카노 하나, 스무디 두 개 할게요.  

딸기 하나, 스트로베리 하나."


  여직원분, 몇 초간 대답이 없습니다.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

 

  이번엔 아메리카노와 스트로베리 영어 발음을 좀 굴리면서.


"아 네, 아메리카노 하나, 딸기 스무디 하나, 스트로베리 스무디 하나요."


  여직원분, 말이 없이 저를 보며 골똘히 생각하더니 묻습니다.


"그럼, 그 말씀은 커피 한 잔과 딸기 스무디 두 개란 말씀이시죠?"


  아주 살짝, 짜증이 나려고 하더군요.  

내가 분명히 주문을 공손히 또. 박. 또. 박. 했는데,  이 사람이 왜 못 알아듣는 걸까 하고요.


" 아뇨 잘 들으세요.  아메리카노 한 잔에 스무디는 딸기 하나, 그리고 스트로베리 하나라니까요.  그렇게 총 세 개. "

라며 미간을 좀 구기며 대답을 했습니다.  뒤에 줄 서 있는 사람들과 주위 테이블에 들릴 정도로.   


그러자 여직원분이 살짝 한숨을 쉬더니, 저랑 서로 마주 보며 정적이 흐릅니다.  

뭔가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진 느낌.  뒤에 줄 서서 기다리시는 분들도 잠자코 그 대화를 듣고 계셨고요.  아주 잠시지만, 그 직원분의 얼굴에 여러 가지 만감들이 교차하는 듯했어요.  딱 이런 표정으로 저를 보고 계셨죠.  아련한듯한 눈빛으로 지긋이.


뭐 어쩌라고 대체

  




  음, 이건 뭐지 하며 서로 말없이 쳐다보고 있은지 십여 초쯤 지났을까.  순간 갑자기 제 머릿속에 파밧!!! 하고 느낌이 왔습니다.  뭔가 강한 전류가 순간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그 느낌.  심지어 닭살이 돋는 느낌까지 들었죠.   제 눈빛이 급격히 흔들린 걸 간파했는지,


"그럼, 알겠습니다."


라며 그 여직원분은 무표정하게 주문받기를 끝내고 제 카드를 받아 결제를 하시더군요.


  이미 어떻게 수습할 새도 없이 진동기를 받아와 자리에 앉았더니, 식구들은 제 얼굴을 딱 보자마자 배꼽을 잡고 빵빵 터집니다.  이미 제 멘털은 너덜너덜.  주문이 어떻게 마무리된 건지, 뭐가 나올 건지 알 수가 없었어요.   잠시 뒤 진동기가 울려서 시치미 뚝 떼고 음료를 받으러 갔습니다.  아 근데 정말 센스 돋게도, 그 직원분은... 아메리카노 한 잔, 딸기 스무디 하나, 블루베리 스무디 하나씩을 내줬어요!!!   

근데 그게 뒤늦게 더더더, 쪽팔려집니다.


  서로 눈을 안 마주치고 음료 트레이를 주고받았고, 왠지 느낌상 제 뒤에 서서 주문을 받은 분들과 근처 테이블 일행분들도 제가 안 보이게 얼굴을 저쪽으로 애써 돌리고 있던 느낌.  

하........  

휘청거리며 음료 트레이를 들고 우리 테이블에 앉자마자 집사람이 얘기합니다.  


"무쟈게 쪽팔릴 텐데, 바로 들고나갈까?"


 두 번 죽입니다.


"아니아니, 지금 바로 나가는 게 더 쪽팔려.  그냥 빨리 묵자..."


  요즘도 스무디 주문하러 갈 때마다 순간적으로 좀 움찔움찔하게 돼요.  새삼 막 긴장합니다.  딸기, 스트로베리, 딸기, 스트로베리 막 속으로 그러고 있어요.  그러면서 또 매번 스무디는 꼭 먹고 싶고.  






  가만 생각해보면 말입니다.  분명 그때 그 무표정했던 여직원분은... 제게 몇 번이나 정신줄 잡을 '기회'를 주셨어요.  제가 계속 눈치 없이 못 알아먹었을 뿐이지 그때 그분 심정은 아마, 이랬을 듯합니다.


그러니까요...



  네 저도 사실, 아메리카노와 스트로베리 영어 발음을 그렇게 버터 발음으로 막 심하게 굴리지만 않았어도 좀 덜 부끄러웠을거에요.  그날따라 그 영어 발음은 거의 원어민 수준.



  모쪼록 그날 그 여직원 분과 제 뒤에 줄 서셨던 분들, 근처 테이블에 계셨던 모든 분들의 무료하고 따분했던 일상에... 큰 활력소가 되었기를 부디 바랍니다.  

저,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딸기는 뭐다?










그놈의 서트로베리.















* 이미지들은 인용을 위해 출처 없이 가져왔습니다.  문제가 될 시 삭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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