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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더밍 Jun 11. 2020

당신의 선택은


  4통의 부재중 전화가 화면에 보였다. 쿵쿵 울리는 음악과 낮고 어두운 조명에 사람들의 어수선함까지 더해진 술집에서는 친구의 직장 뒷담화가 한참 이어지던 중이었다. 나는 술집 분위기에 더해 가쁜 숨을 몰아쉬고 눈을 키우며 성난 목소리로 말도 안된다, 역시 또라이였다, 등의 열띤 답변으로 친구의 꽉 막힌 속을 긁어주고 있었다.


  자꾸만 울리는 핸드폰에 친구는 하던 말을 멈추고 도대체 뭐냐고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 시간에 계속 전화가 울리는 거냐고. 한참을 부글거렸던 나는 들뜨는 가슴에 침을 꼴깍 삼키며, 그러게 도대체 무슨 일인 줄 모르겠다 오늘은 나도 못참겠다고 답을 한 뒤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버님 저 지혜에요. 무슨 일 생겼나요? 부재중 전화가 4통이나 와있어서요."

  "녀석아. 네가 전화를 안받으니 그렇게 많이 했지. 왜이렇게 전화를 안받니? 전화 좀 자주 하거라"

  "......(심호흡) 후. 지금 친구랑 저녁먹고 있어서 핸드폰 확인을 안했어요. 무슨일이세요?"

  "일은 무슨 일, 그냥 전화한거지."

  "아, 네. 별일 없구요. 지금 친구랑 있으니 길게 통화는 어렵겠네요."

  "아 그러면 나중에 친구랑 헤어지고 집 가는길에 전화하거라."

  "......네....?"


  맥없이 끊긴 전화를 보며 슬렁슬렁 눈치를 보던 친구는 맥주를 꿀꺽 삼켰다. 시댁이냐는 물음에 시댁은 무슨 시댁, 준용이네 아빠지 뭐, 라고 답하며 찬물을 꾸역꾸역 마셨다. 이어지는 짧은 침묵을 깨고 나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콩콩콩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토해내는 가쁜 숨을 숨기지 못한채 대화가 이어졌다.


"저 지혠데요. 무슨 할말이 있길래 집 가는 길에 전화하라고 하시는거에요?"

"허허. 며느리니까 당연히 아버지한테 전화를 해야지."

"...... 제 아버지 아니신데요? 제 부모님께도 안하는 전화를 제가 왜 자주 해야해요? 그동안 꾹꾹 참다가 오늘 전화하시는거 보고 도저히 못 참겠어서 말씀드릴게요. 이렇게 습관적으로 전화하는것도, 전화하길 바라는것도 너무 부담스럽고 싫어요. 자꾸 딸 이라고 하시는데 저는 딸 아니고 남이고요. 단지 당신 아들이랑 결혼한 사람일뿐이고요. 손님이에요. 그렇게 생각하시고 저한테 이렇게 불쑥불쑥 뭔가를 바라시거나 하지 마세요. 정말 너무 스트레스에요."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너는 며느리니까 당연히 네가 연락도 하고 우리랑 잘 지내야지!"

"아니라고요. 앞으로 이렇게 연락하지 마세요. 이런 일들 때문에 준용이랑 너무 힘들었고 너무 많이 싸웠어요. 이제 각자 집은 알아서 각자 잘 챙길테니 앞으로 저한테 연락하지 마시고 준용이랑 소통하세요. 이만 전화 끊습니다."


  술잔을 기울이던 친구가 대단하다며 괜찮냐고 물었다. 홧김이었지만 속이 다 후련하다며 쫄리면 지는거야, 라고 답했다. 친구는 내가 맞장구치며 꽉 막힌 속을 긁어줬던 것처럼 요즘 세상에 저런 조선인이 아직도 있냐며 한국사회의 지리멸렬함에 대해 꼬집고 비틀어 내 마음을 꽉 짜주었다. 껄껄 웃으며 나는 보란듯이 준용이의 아빠, 엄마, 누나의 핸드폰번호를 차단하고 연락처를 삭제, 카카오톡도 차단버튼을 꾹 눌러 그들이 내게 갑자기 나타날 수 없게 작별했다.


  이렇게까지 해도 괜찮은걸까. 스스로 반문하며 내가 너무 심했나 하는 의문이 생기다가도 더이상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보며 나는 안도했다. 그렇게 일상에 안개처럼 자욱하던 '며느리' 라는 족쇄는 잠겼다 풀어졌다를 반복하며 시간과 함께 흩어 사라졌다. 이제 내게 '며느리' 라는 단어는 어떤 응어리로 남아 종종 인사하지만 그저 그 뿐이다. 그저 하나의 단어일 뿐 내게는 더이상 별 영향력이 없는 존재의 이름. 한 때의 씁쓸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괴로워하는 주변의 며느리들을 보면서, 딸이 못된 며느리라며 사돈에게 부끄러워 얼굴을 못 들겠다는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시 나의 선택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나와 너무 다른 사람을 마주하고서 차단과 관계의 종결을 택했던 나의 선택은 과연 옳았던 걸까, 라고.


하지만 역시나 시간을 두고 생각해봐도 갑자기 무신경한 시부모로 바뀌면서 아들과 함께 살아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나의 해피엔딩도, 홀짝 홀짝 술을 받아먹으며 싹싹하게 달라붙는 살가운 며느리로 남는 그들의 해피엔딩도 현실에는 없다. 엄연히 그들과 나는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이다. 나는 그들을 존중하지만 존중의 의미로 내게 그들과 같아지길 강요하는 일을 받아들일 수 없다.


  다름을 놓고 은근슬쩍 이루어지는 비웃음과 모멸감과 폭력들을 본다. 개인, 가족, 직장, 사회에서 갑들은 앞에서는 자신의 말이 옳다며 설득과 이해를 포장한 강요를 하고 을들은 꼰대질 말라며 뒤에서 수군거린다. 느리게 변해가는 사회에서 매번 투사처럼 싸울수도, 차단하고 도망갈 수도 없는 나는 살아가는 간극들 앞에서 자꾸만 울컥한다.


  과거는 간극을 앞에두고 을의 희생이 미덕처럼 번지는 사회였다. 지금까지도 곳곳에서 과거를 살아가고 있는 갑들이 판치고 있다.


  나는 여자로, 젊은이로, 신입사원으로, 며느리로 이름을 바꿔가며 존재할때면 사람과의 간극들 속에 무너질때가 잦았다. 산다는 것이 그 간극을 극복하고 받아들이는 일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버틸 것인가, 도망칠 것인가. 싸울 것인가, 받아들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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