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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개비 Oct 22. 2022

간월재 돌탑

친일 매국노와 빨갱이

[알고 가면 더 재미있는 간월재(왕방재)]


간월재에는 간월재를 오르셨던 분들은 다들 아실만한 직한 돌탑이 우뚝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누구라도 기대서서 사진 한 장쯤은 찍었을 법한 돌탑의 바로 앞에는 자그마한 간월재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은빛 억새가 넘실대는 계절, 주말이면 어김없이 그 작은 표지석과 인증샷을 찍으려는 수많은 인파가 늘어선다.

십여 년 전에는 다른 표지석이 있었는데, 몇 해 전에 교체되어 지금은 '간월재' 이름과 '해발 900m'표시 외에 뒷면에는 이렇다 하게 특별히 기재된 내용이 없다.

영남알프스 9봉인증 이벤트 이후로는, 평일에도 이렇게 까지 한가한 간월재돌탑을 만나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현재의 것보다 앞전에 서 있었던 간월재 표지석 뒷면에는 여러 행적을 통해 친일 활동이 입증되고, 바뀌는 정권마다  '처세의 달인'이라 불리며 정권 찬양가를 노래했던 '노산 이은상' 시인의 <조국강산>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었다. 사실은 지금도 돌탑 앞 땅속 깊지 않은 곳에는 노산의 시가 새겨진 표지석이 그대로 묻히어 수많은 이들의 발길에 짓밟히고 있는 중이다.


<조국강산> 노산 이은상

겨레여 우리에겐 조국이 있다.
내 사랑 바칠 곳은 오직 여기뿐.
심장의 더운 피가 식을 때까지
즐거이 이 강산을 노래 부르자.

아름다운 언양 너른 들과 멀리 울산 앞 동해바다를  굽어보면 절로 감탄이 쏟아지는 곳이니 노산의 '조국 찬가, 강산 찬양'  어울리긴 했지만, 간월재에서 진짜 조국강산을 위해 소신을 불태우고 민족에 대한 사랑을 바쳤던 사람은 산골마을 함양출신인 '남도부(본명은  하준수)'라는 빨치산이었다.


하준수!

그는 일제 식민지 하에서는 무장 독립운동가였고, 해방 후에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경호실장 제의를 받았을 정도로 대단한 체력과 용맹을 지녔던 산악전투의 달인이었다.

"적의 적은 동지"라는 순진한 셈법이 그를 빨갱이라는 올가미에 빠져 들게 하였는데, 그는 해방 후 친일파와 그들을 비호하는 이승만 정권, 그리고 그들의 뒷배를 봐주던 미군정이 싫어 스스로 몽양 이끌던 민족주의 계열의 공산주의자가 다.


신불산 태봉에 본부를 설치한 하준수가 지리산 빨치산들과 연락을 주고받기 위해 산 길을 통해 지리산을 찾아가는데 고작 3일이 걸렸다 하니, 지금이라면 히말라야 14좌를 서너 번은 오르내렸을 진짜 산악계의 고수일지도 모르겠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빨치산 토벌을 위해 영남알프스에 수시로 폭격을 감행했고, 화염방사기로 산정의 산천초목을 불태웠다. 그 동족상잔의 아픔이 이제는 전국 최고의 억새 평전을 만들었으니 사자평 21만 평, 간월재 5만 평, 신불산과 영축산에 걸친 8만 평의 은빛 억새밭은 실로  거대한 신념의 투쟁터였다. 지금도 가지산 석남사 등산코스의 들머리인 석남사 주차장에서는 빨치산 토벌 전적비를 만날 수 있으며 신불산 곳곳에 빨치산들의 웅거 흔적이 남아 있다.

간월재에서 바라 본 신불산 서봉

인민군 중장 계급을 부여받았던 '남도부 하준수'는 결국, 1955년 서울에서 체포되어 전향을 거부하고 총살되었으며, 한국 현대사에서 '하준수'라는 이름 석 자는 금지어가 되어 버렸다. 단지 "남부를 노도와 같이 해방시켜 부산까지 접수하라"는 의미로 김일성이 지어주었다는 이름 '남도부'만이 그를 기억하게 할 뿐이다.


해방과 동족상잔의 피를 흘린 지 70년이 지났지만, 36년 동안 韓민족을 말살하려던 일본 제국주의를 옹호하고 찬양하행위 여전히 반공이란 명분으로 용인되고, 3년 간 동족에게 총부리를 겨눈 반일 공산주의 자들의 명분은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친일 매국노를 수용한 미군정 하에서 어쩔 수 없이 공산주의 노선을 택했던 하준수나 김원봉, 이현상을 무조건 손가락질 하기에 친일 매국노들이 해방 전후에 걸쳐 저지른 죄과는 너무나 크다.


하준수의 고향 함양군 병곡면 도천마을 역시 한국전쟁 때 좌, 우익 양쪽으로부터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당했다. 하지만, 좌우 어느 쪽으로부터 피해를 입었든 관계없이 그의 고향마을에서 하준수와 그 집안을 나쁘게 말하는 이는 없다고 한다. 부잣집 아들 출신 좌익이긴 했지만, 해방 후에는 곳간을 열어 가난한 이들에게 쌀을 나눠주고, 어느 누구에게도 해코지를 하지 않은 따뜻하고 높은 인품의 소유자로 기억되고 있다. 또한, 어른 키 두 배가 넘는 담을 훌쩍 뛰어넘을 뿐 아니라 축지법을 쓰는 전설적인 무예의 고수로 기억하는 들도 적지 않다. 그는 고향사람들에게는 이미 전설이 되어 있다.


솔직히, 친일 매국노라면 치를 떨었던 '하준수'가 친일경찰들의 핍박을 피해 핍박받았던 파르티잔들을 이끌며 수없이 지나다녔을 간월재(왕방재)에 친일파 시인의 비석이 서 있는 것이 그리 보기 좋지는 않았다.

34세의 생을 빼앗긴 하준수와 79세로 생을 마감한 이은상


한 사람은 신념을 위해
자신의 불같은 삶을 이용했었고,
또, 한 사람은 삶을 위해
신념을 카멜레온처럼 이용했었다.


후세의 역사가 들을 평가할 일이겠지만, 지금 표지석의 비어있는 뒷면에는 부당한 시스템에 굴종하여 호가호위한 반민족 변절자들 보다는, 시스템의 부당함에 저항하여 자신의 양심과 소신을 지키려다 죽은 이들의 이름이 기억되면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간월재는 이데올로기를 벗어 던지고, 어울려 뛰어 놀기 딱 좋은 곳이다.

*빨치산을 찬양하거나 토벌대를 폄훼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그저 개개인 인간들이 가진 소신의 사용법과 가치를 짚어 보자는 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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