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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생 Mar 06. 2024

무사태평 하려면


  요즘은 수업 시간에 토론하는 일이 종종 있다. 모둠수업은 어떤 하나의 주제를 놓고 서로 맞는다고 주장하며 상대방에게 자신의 옳음을 설득하는 방식이다. ‘사형 제도의 존치 여부’와 같은 토론 주제는 이미 진부한 것이 되었고, 요즘은 ‘AI가 인간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와 같은 주제가 떠오른다. 시대가 흘러가면서 요구하는 수준이 달라져서 고등학생 아이들이 토론하는 수준도 높아졌다. 저 윗분들처럼 고성방가나 삿대질로 토론하다가는 야유를 받기도 한다.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먼저 칭찬으로 시작해서 찬반 토론을 벌이는 아이들을 보면 매우 논리적이라서 놀랄 때도 있다. 


  『송와잡설』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익성공 황희 정승이 세종대왕이 좋은 정사를 펼칠 때 그 옆에서 예법을 마련하고 악(樂)을 지으며, 큰일을 논하고 결단하였다. 날마다 임금을 돕는 것만 생각하였고 집안 대소사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하루는 계집종들 간에 다툼이 있어서 집안이 떠들썩하였다. 한 계집종이 와서 자리를 두드리며 "아무 계집이 나와 서로 싸웠는데 이렇게 극악하게 저를 해쳤습니다." 하고 아뢰니 공은 "네 말이 옳다." 하였다. 좀 있다가 다른 계집종이 와서 자리를 두드리며, 꼭 같이 호소하였다. 공은 또, "네 말이 옳다." 하였다. 공의 조카가 옆에 있다가 마땅치 않은 기색으로 나서며, "아저씨는 몹시 흐리멍덩합니다. 한 사람은 저렇고 한 사람은 이와 같으니, 이것이 옳고 저것은 그릅니다. 아저씨의 흐리멍덩함이 심합니다." 하니 공은, "너의 말도 또한 옳다." 하면서, 글 읽기를 그치지 않고 끝내 분변하는 말이 없었다.


  우리가 익히 아는 황희 정승이 남긴 이야기 중 한 편이다. 황희 정승은 많은 이야기를 남긴 인물로 유명하다. 우리가 잘 아는 '누렁소와 검은 소'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두 소 중에 누가 일을 더 잘하는지 묻자, 농부는 황희 정승에게 귀엣말로 검은 소가 일을 더 잘한다고 한다. 뭘 그런 걸 소곤거리느냐고 묻자, 짐승도 다 자기 얘길 하는 줄 아는 법이라고 농부가 황희 정승을 가르친다. 세종대왕이 이루신 한글 창제 업적이야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을 세종대왕이 다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옆에서 보조를 맞추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황희 정승이다. 나랏일로 바쁜 황희 정승의 집에서 종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 황희 정승은 끝내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상황을 정리한다. 이를 본 조카가 자신을 흐리멍덩하다고 하자 그 말도 옳은 말이라고 한다. 참으로 무사태평한 처사다. 게다가 그의 사람 관리가 잘 드러나는 면모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처세를 보여준다. 과연 세종조에 18년간이나 재상을 지낸 인물다운 처신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전달하는 바는 “남의 말을 경청하라.”라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아는 잣대로 상대를 판단하고 상황을 이해하기 쉽다. 어린 조카만 해도 두 이야기를 듣고는 바로 자신의 판단으로 잘잘못을 따진다. 그런 아이를 보면서 황희 정승은 “네 말도 옳다.”라고 한다. 이야기의 자초지종을 들어보지도 않고 성급하게 판단해서 일을 처리하다가는 오해를 받기 십상이다. 게다가 요즘은 짤막하게 올라오는 인터넷 뉴스의 제목만 보고 상황을 판단하다가는 큰코다칠 수 있다. 남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특히 아내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나중에 보면 틀린 말이 하나도 없고 꼭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나처럼 우유부단해서 결정 장애가 있다면 아내의 말을 잘 듣는 것이 신상에 좋다. 여자의 말을 잘 따르면 가정도 편안하다. <<예기>>에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말이 나온다. 어릴 때는 아버지의 말을, 결혼해서는 남편의 말을, 남편이 죽으면 자식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어떤 결론을 내릴지 이미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다. 이제 삼종지도는 여자에게 주어진 의무가 아니라 남자에게 일러야 할 말이다. 어릴 때는 어머니의 말을, 결혼하면 아내의 말을, 나중에는 딸의 말을 잘 들어야 편안하다. 


  서로의 말을 잘 들어준다면 그것이야말로 무사태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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