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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생 Mar 08. 2024

아들의 결심


  아버지가 노년에 업으로 하신 일은 운전이었다. 노란 봉고차를 몰고 아침저녁으로, 때로는 예닐곱 명의 손님들을 모시고 전국의 관광지로 다니셨다. 평생토록 돈을 벌어온 적이 없다며 아버지를 못마땅해하시던 어머니도 이때만큼은 얼굴에 화색이 도셨다.


  최근에 아버지가 가끔 정신을 잃고 쓰러지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연세가 들어서 그러려니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큰 병원의 종합검진에서 위암이 발견되었다. 즉시 수술 날짜를 잡고 암 덩어리를 잘라냈는데, 노령에 큰 수술이어서 다니시는 걸음이 다소 힘들게 되었다. 그래도 어디로 다니실 때는 꼭 차를 가지고 다니셨다. “얼른 운전면허증을 반납해야 한다, 언제 사고가 날지 모른다, 이런 건 맏이가 해결해야 한다.”라는 말들이 주변에서 들려왔다. 아버지는 당신의 운전 경력이 사십 년을 넘어가고 젊은 시절 택시 운전에, 학원 차 운전까지 했는데 운전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며 완강하게 운전면허증 반납을 거부하셨다.


  『청구야담』에 아버지를 찾아가는 이야기가 있다. 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이라 사람들이 약방의 처마 밑으로 피신했다. 약방 일을 도와주던 김 서방은 하염없이 오는 비를 쳐다보며 옛날 충청도 어느 집 밑에서 만났던 비와 똑같다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서 그 말을 들은 최 서방이 아니 비 오는 거야 똑같지, 어느 집 밑에서 만났던 비와 똑같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며 눈을 흘겼다. 그러자 김 서방은 “충청도 어느 산골에서 약초를 캐고 내려오다가 비를 만났다. 그 비를 피하려고 어느 집 처마 밑으로 들어갔고, 추위에 떠는 나를 본 그 집 처녀의 호의로 밥을 얻어먹고 어쩌다 보니 하룻밤 인연을 쌓고 떠났다.”라는 이야기를 약방에 모인 사람들에게 했다. 그러자 한 젊은이가 혹시 오른쪽 허벅지 아래 검은 점이 있는지 물어보는 것이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그런 일이 있었고 그래서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는 것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부자지간이 맞았고 김 서방은 충청도 시골로 내려가 잘 살았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전해주는 내용은 후일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모티프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는 단순한 서사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우리는 금방 이 글이 전해주는 교훈을 눈치챌 수 있다. 아버지를 찾아 나선 아들의 결심 말이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초고속의 시대도 아니며 교통이 편리한 시절도 아니었다. 다만 ‘오른쪽 허벅지 아래의 검은 점’하나 알고 전국의 약방을 다 돌아다닌 아들의 정성이 통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반드시 찾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믿음이 없었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지난주에 기어코 아버지의 자동차 키를 받아왔다. 운전면허증을 반납하시겠다는 약속도 받았다. 아버지가 아들의 말을 믿어주시니 고맙다. 아버지의 건강도 걱정이었지만 사실은 상황적인 문제도 내 마음에는 있었다. 사고가 나거나 하면 그 일을 처리하러 다닐 일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자동차 열쇠를 내어 주실 때는 아마도 그런 상황까지 다 이해하셨을 것이다. 아이들이 시집 장가가서 그 아이들이 쑥쑥 자랄 때까지 오래도록 옆에 계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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