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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생 Mar 15. 2024

저따위라니!


  듣기 싫은 말 중에, ‘네가 그렇지 뭐!’라든지 ‘그따위로 일을 해서 되겠어?’와 같은 말들이 있다. ‘네가 그렇지 뭐!’라는 말은 다분히 깔보는 시선이 깔려있다. 누구나 자존심 상하는 말을 듣는다면 이후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으로 변한다. ‘그따위로’나 ‘이따위로’와 같은 말도 웬만해서는 사용하지 말아야 할 말이다. 현재에도 그런데 옛날에 선비의 입이나 글에서 이런 단어가 나왔다면 뭔가 단단히 꼬여있거나 엄청난 실망을 감출 수 없을 때가 아니었을까?


  『송와잡설』에 따르면, 연산군의 폭정이 심해지자,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顏)이 성왕(聖王)을 세우고 명성을 날렸다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송와잡설』의 저자인 이기(李芑)는 성희안을 두고서 임금의 후궁을 첩으로 맞았다며 지은 죄가 천지에 가득하다. 저런 무리와 함께 임금을 섬길 것인가? “저따위라니, 저따위라니,” 하면서 분개한다.


  박원종, 성희안은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을 옹립하는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일으켜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으로 정해졌다. 박원종은 우의정, 성희안은 형조판서, 유순정은 병조판서가 되었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성희안이 이룬 공이 작은 것이 아니지만 지은 죄가 천지에 가득하다고 적었다. 그 가운데 연산군의 후궁을 첩으로 삼은 일에 관해서 이기는 거의 적개심에 가까운 표현을 하고 있다. 


  이야기에 나오는 박원종은 월산대군의 부인 박 씨의 남동생이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연산군은 큰아버지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 씨가 어머니인 폐비 윤 씨를 닮았다고 해서 겁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박 씨는 자결했고, 누이의 죽음 이후로 박원종은 연산군을 무척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중종반정 이후 박원종과 성희안의 전횡과 횡포가 극에 달했으니, 불만을 품은 선비들이 많았을 것이다. 권력이 생긴 성희안이 임금이었던 연산군의 후궁을 첩으로 들여서 이기는 성희안에 대해 성토한다. 역사 자료를 찾아보면 연산군에게는 네 명의 아내가 있었는데, 모두 자녀를 낳았으므로 그들 중 한 명이 성희안의 첩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갑자년 이후 대궐 안으로 들여온 기생이 백 명가량이었는데 나중에는 만 명에 이르렀다고 적어놓았다. 그중 임금과 동침한 자는 천과흥청(天科興淸)이라 했다는 말이 전해오니 아마도 그렇게 임금과 밤을 보낸 여인 중 하나를 첩으로 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기는 그런 성희안을 ‘저따위라니’라는 말로 적고 있다. 1510년 4월의 기록에는 도체찰사 성희안에게 종사관 이기가 보고하는 내용이 있다. 즉 둘의 관계는 상사와 부하 직원 사이였다. 이기도 중종반정 후 정국공신 1등급에 올랐는데, 아마도 이때만 하더라도 두 사람의 관계가 그리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성희안이 휘두르는 권력이 이기가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일이었고 그중에서도 연산군의 후궁이었던 여인을 첩으로 둔 부분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는가 보다.


  이런 모든 일들의 배후에 중전인 윤 씨를 폐위시킨 성종 임금이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나중 일을 생각해 보면 불 보듯 뻔하게 보이는 일이 아닌가? 임금이 될 사람의 어미를 폐위시키고 죽인다면 아들의 처지에서는 그런 일에 가담한 사람들이 곱게 보일 리가 없다. 성종 임금으로부터 비롯된 일들이 연산군을 거치면서 수많은 죽음을 낳게 되었다. 역사를 뒤져보면 참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많다. 어떻게 일을 그따위로 처리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지금에 참고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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