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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유 Dec 26. 2023

어린왕자와 간택 여우

올드스쿨로의 초대


"제 책은 왜 이렇게 얇아요? 이거 동화책 아닌가?"

생일마다 반 아이들에게 책과 편지를 선물했는데 얇고 삽화가 많은 책을 보며 한 아이가 새치름하게 대꾸한다. 

“모르는 소리! 그거 샘이 가장 애정 하는 책이야!”


문득 특별했던 깻잎 머리 여중생 시절이 오버랩 된다. 하얀 얼굴에 초승달 같은 서글한 눈매, 철없는 장난에 쉽게 발그레해지는 얼굴. 마치 어느 소행성의 어린왕자가 사막여우 우글거리는 교실에 불시착한 것 같은! 그는 우리 담임선생님이셨다.


메마른 사막 한가운데서 어린왕자를 만난 우리는, 곁눈질하는 여우처럼 너도 나도 그의 관심을 얻고자 했는데 하루는,

"소유야, 선생님 새 책 받았다."

성은이 망극했다. 교과서 싸개 도우미로 간택을 받은 것이다. 한참을 포장지를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몽글한 별들이 알알이 박힌 하늘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마치 어린왕자의 행성에 초대받은듯한 행복한 착각까지 몰려왔다. 이렇게 까탈스럽게 선택된 책싸개가 선생님 손에서 춤추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매시간 나는 작품 속으로 빨려 들어가 주인공이 되었다.


어느 날인가는 그의 하얗고 긴 손가락에 핀 주부습진을 발견하고는 혀를 끌끌 차며 그의 고된 삶을 동정하기도 하고, 또 수학여행 버스 안에서는 열심히 흐느적거리는 우리의 스타가 민망하지 않도록 함께 엉덩이를 흔들며 화답하면서... 그렇게 싸바싸바 잃어버린 날개를 찾고, 젓가락질 잘 해야만 밥 잘 먹느냐, 힘껏 소리 지르며 얄개시절을 보냈더랬지.


"부탁이에요. 우릴 길들여 주세요!"

굶주린 사막여우처럼 앞 다투어 소중한 존재로 인정받기 위해 내달린 우리들. 하지만 야생에 우리를 계몽시키는 건 결코 만만치 않았을테니! 선생님 이마엔 참을 인이 아니라 주름살만 깊어가는 나날이었다. 그럼에도 진정 문학을 사랑한 어린왕자는 야심차게도 교실 한켠에 아리랑과 태백산맥 세트를 들여놓았고 그 바람에 우린 엉큼한 문학소녀도 될 수 있었다. 아리랑 3권쯤 되었나? 특별히 새까맣게 손때가 탄 부분. 흠. 야한 장면이었음에 틀림없다. 대하소설을 호기심 가득한 사춘기 시선으로 풍덩 탐닉할 수 있었던 순정(純情). 이건 어쩌면 우리가 어린왕자에게 받았던 가장 큰 선물이었을 터.


어린왕자가 섰던 교단에 내가 이렇게 서고 보니 그에게 우리가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코끼리 같은 존재였을지 싶다.


“에이.. 저 두꺼운 건 안 읽을까봐 얇은 걸로 주신 거 아니에요?”

살짝 뜨끔하긴 하다. 그래도 어린왕자에게서 받은 내 푸른 시절을 날 것 그대로 풋풋하게 물려주고 싶은 내 마음은 진정, 진심이다, 애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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