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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유 Dec 27. 2023

섬마을 슨생님

올드스쿨로의 초대

바다 앞에 섰다. 얼마가 될진 알 수 없으나 나의 새로운 터전이 된 안면도. 비릿하면서도 청량한 바다는 내 삶의 크고 작은 물줄기를 품고 마침내 그 한 켠을 나에게 내어 주었다. 속절없이 밀려드는 햇빛에 눈을 찡긋하며 내 인생 2막이 무탈하길 기도하자, 그녀는 새삶스레 금빛 속살을 드러내며 부끄럼쟁이처럼 저 멀리 뒷걸음을 친다. 그 사이, 서너 명 될까 말까 한 사람들이 할미, 할아비 바위 사이를 부지런히 드나들며 무언가를 캐고 있다.


이름도 고운 꽃지 해변에서 육지 쪽으로 15분 남짓. 나는 그곳의 고등학교에 첫 둥지를 텄다. 외롭지는 않았다. 저녁노을을 친구 삼아 들른 꽃지 해수욕장에 낮과 밤이 만나 엉키고 설켜, 차갑게 내쉬는 공기가 푸르스름했다가 붉게 물들었다가, 마침내 까만 우주에 잠식당하는 그 시간이 참 좋았다.


그러나 감상은 잠시 뒤로하고...

첫날의 학교는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으니,


"전학생 받으세요." 

교무부장님의 말씀에 전학생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는데,

"아직 인증서가 없겠구나. 내 걸로 해요." 

아니.. 도대체 이건 또 무슨 얘긴지... 신규교사로서는 알 수 없는 아리송한 답변만이 돌아온다.

"샘, 걱정 마세요. 저희가 해야 하는지 알려 드릴게요."

아이들은 한눈에 봐도 어리벙벙한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한바탕 꺄르르 웃으며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넨다. 멋져 보이고 싶은 마음에 반나절 동안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첫 인사말은 제대로 건네보지도 못했다. 


"선생님, 이리 좀 와보셔야겠어요."

업무에 수업에 첫날부터 정신을 쏙 빼놓고 있는데 불쑥 학폭이란다.

'아직 아이들 이름도 못 외웠는데...' 

1학년 후배에게 주먹을 휘두른 그 아이는 자초지종을 묻는데도 입술을 꾹 닫은 채 묵묵부답이다. 무엇을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그 주먹을 나도 한 방 맞은 것처럼 찔끔 눈물이 났다. 아이의 이름은 수호였다. 그래도 이름 하나는 제대로 외웠구나 싶었다.


3월의 학교는 '누가 누가 정신 똑바로 차리나'를 시험하는 자리였다. 얼빵한 신규교사가 잘 적응하는지, 여러 개의 눈이 도로 위의 촘촘히 설치된 감시 카메라처럼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학교는 전교생 가정방문을 합니다." 


요즘 같은 시대, 가정방문이라니...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온 건가? 사람 사이에도 적당히 선 긋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교사라는 이유로 남의 집 문간방을 드나드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땐 운전도 못했던 때라 감히 부장 선생님을 기사로 대동한 호화로운 여정이 시작되었다. 예상과 달리 조그만 섬마을에도 가지각색의 삶이 터를 잡고 있었으니, 문제집에 이름을 써주자 발그레 해지던 정미소 집 아들은 자신이 모는 경비행기가 있었는가 하면, 토끼같이 동그란 눈에 여드름이 귀엽던 소녀는 아버지와 떨어져 홀로 학교 앞 단칸방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가끔 문고리에 간식을 걸어 두었는데 아이는 그때마다 발그레해진 얼굴로 미안해했다. 고작 간식 몇 번, 책 한 권이 다였던 것 같은데... 그때 왜 자신 있게 아이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 좀 더 잔소리를 하며 챙겨주지 못했는지... 아직도 그것이 마음에 걸리고 미안하다. 


바닷가 마을이라 해도 꽤 많은 아이들이 산 넘고 물 건너 저 먼, 시골 안의 시골, 또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나 바람이 좀 거칠어진다 싶으면 아이들은 걱정이 많았는데, 직접 그들의 터전으로 들어가서야 그 한숨 섞인 염려와 어려움이 이해가 되었다. 이런저런 모양새를 보고, 이래저래 사정에 귀 기울이고 나니, 아이들에게 있어 등교라는 행사가 얼마나 소중한지 뒤늦게 깨달았다. 고마운 마음 한 아름 가슴에 안고 돌아오는 길, 내 안에도 화해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며칠 후, 굽이굽이 연이어진 낮은 산고랑을 한참 달려서야 도착한 집. 학폭 당사자인 수호의 집이었다. 어린 동생들에 삼촌까지, 집안은 사람들로 복작복작했다. 걱정 한가득인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리고 발걸음을 돌리는데 아이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제 여자친구한테 자꾸 작업 걸잖아요. 그래도, 잘못했어요."

수호의 주먹은, 자기 이름처럼, 사랑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커플이었던 것을 보면, 아이는 그렇게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을 지켜내는데 성공한 듯싶다.


따뜻한 오월이 되고 섬마을 곳곳에 영글은 꽃망울이 터질 때쯤 내 가슴속 아이들도 선명하게 피어났다. 참 재미있는 아이들이었다. 짜장면을 시키면 


"이 인분 같은 일 인분이요~" 

익숙한 앳된 얼굴이 씩 웃으며 그릇을 건네기도 하고, 회식자리에서도 어느 순간 짜잔 나타나 직접 뜬 거라며 회 한 접시를 건네기도 한다. 


바다를 닮은 아이들. 

거칠게 일렁이는 파도 그 이면에서 한 번씩 단단한 속마음을 내어주는 꽃지 바다처럼 그들의 짙푸른 가슴속에도 황금빛 찬란한 꽃지의 태양이 빛나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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