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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유 Jan 03. 2024

사랑의 언어

올드스쿨로의 초대

학기말의 교실은 언제나 어수선한 시장터 같다. 막바지 성적 산출을 하랴, 생기부 작성하랴 정신이 없으신 선생님의 상황과는 달리 우리는 며칠 후면 졸업이라는 해방감에 가슴이 풍선처럼 마구 하늘을 떠다녔다. 이렇게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건만 몸은 늦은 밤까지 교실에 갇힌 꼴이라니. 좀이 쑤실 수밖에. 당시 우리는 중학생인데도 저녁 8시까지 자습을 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이건 공교육이 전부인 시골학교 처지에선 나름의 최선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그렇지.


“학기말에 무슨 야자래? 그냥 보내주지.”

여기저기서 웅성웅성, 수군수군, 투덜투덜. 여러 모양의 소리가 묘하게 화음을 이루며 교실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때였다.

“3학년. 다 잔디밭으로 집합!”

화난 선생님의 포효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온 교실을 쩌렁쩌렁 들었다 놨다 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처음에는 다들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듯 멍하니 얼이 빠져 있었다. 이런 우릴 더 혼비백산 만든 건 어느새 복도에 나타난 스산한 그림자의 '집합!' 이라는 외마디 외침. 급기야 하는 수 없이 너도 나도 화들짝 놀라 뛰쳐나갈 수밖에.


‘올 것이 왔구나!’

교실 뒤 강당으로 이어지는 길, 그새 밤이슬을 맞았는지 학교 상징인 백합화를 품은 잔디가 상쾌한 풀내음으로 우릴 맞이했다. 그러나 이 상쾌함은 금세 다시 근심으로 바뀌었다. 얼떨결에 쫓겨 나간 우리 앞에 공포의 빨간 모자 출신의 선생님이 떡 버티고 계셨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숨을 내 쉴 틈도 없이 곧장 팔 벌려 뛰기와 오리걸음 등 정신강화훈련이 시작되었다. 


“다 눈감아!” 

명령에 따라 감은 눈 사이로 아이들의 끙끙거리는 신음이 새어나오고, 난 체념한 채, 그 뒤로 당연히 이어질 순서인 특급 잔소리 훈화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였다. 갑자기, 내 손바닥에 따스한 감촉이 묻어나는 게 아닌가. 뭐지? 가늘게 뜬 실눈으로 주변을 힐끔 힐끔 훔쳐보았다. 별이었다. 우리 손에 모두 저마다의 촛불이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가시덤불 속에 핀 하얀 찔레꽃”

누군가의 선창에 맞춰 아름다운 기타 선율이 수를 놓으며 거들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한 자락 바람에도 문득 흔들리는 나뭇가지.”

기막힌 반전에 그날 밤, 우리 손에 쥐어진 촛불은 선생님의 사랑에 언어였다. 살다보면 마주칠 어둠과 절망 속에서도 꿋꿋이 뻗어 나가길 기도하는 촛불 의식. 우리는 그렇게 그 까만 밤, 어느 아름다운 노래 가사처럼, 마음 속 무수한 별들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거대한 밤하늘이 되어 함께 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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