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달리기
“쓰리, 투, 원, 스타트! 삐…!”
오색의 화려한 전광판이 5킬로미터 마라톤의 시작을 알린다. 드디어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짧은 함성을 지르며 힘껏 뛰쳐나간다. 이 순간 난 두근거림과 뭐라 말할 수 없는 묘한 긴장감이 일어난다. 시작은 이처럼 늘 기분 좋은 표정을 품고 있다. 처음엔 그저 따라온 아이와 신정호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볼까 하는 요량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끓어오르는 공기가 나의 아드레날린을 들뜨게 하는 바람에 그만 아이를 등에 업고야 말았다.
그렇게 나는 달리는 말, 엄.마. 가 된 채 등 뒤에서 신난 아이의 뭉클거림을 느끼며 그동안 못한 엄마 노릇도 해보자고 다짐했다.
“와 엄마 진짜 잘 뛴다.”
그동안 제자리 뛰기를 열심히 해 온, 인고의 시간이 드디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 5분이 채 지나지도 않아 몸뚱이가 점점 늘어지기 시작했다. 몽글몽글 따뜻했던 아이의 묵직함은 점점 돌덩이처럼 짓눌렀고, 결국 아쉬워하는 아이를 등에서 내려 함께 걷기 시작했다. 샐쭉 토라진 아이를 가만히 내려 보고 있자니 갑자기 우리 엄마가 떠올랐다.
마흔의 엄마는 꽃처럼 우아했다. 장신구로 치장하지 않아도 엄마에겐 기품 있는 아름다움이 흘렀다. '너네 엄마 예쁘시다.' 친구들이 엄마에 대해 좋게 이야기할 때면 그것이 마치 내 칭찬인 양 우쭐해졌다. 난 구수한 아빠 얼굴을 꼭 빼닮았지만. 이렇다 할 부와 명예는 없었지만 자랑스러운 엄마와 시골 학교 선생님이셨던 아빠, 목사님이셨던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내게는 신앙 안에서 가족이 주는 든든함과 안정감이 있었다. 하지만 무탈한 생활이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교통사고... 불과 며칠 전, 음주운전으로 인해 면허가 취소된 차량이었다. 이로 인해 우리는 3년이란 긴 시간 동안 상대편 보험회사를 상대로 힘든 싸움을 해야 했다. 원래도 시골 시집살이가 결코 만만치는 않았겠지만, 아빠의 부재로 엄마는 더욱 강인해져야 했다. 그래서인지 그 후로 엄마 특유의 고상함은 조금씩 그 빛을 바래가는 듯했다. 그래도 하루아침 가장이 된 여인의 책임감이었을까? 엄마가 뿜어내는 생기는 여전했고 시부모님을 봉양하면서 기어코 나와 동생을 꽃처럼 곱게 키워내셨다.
얼마 전, 오랜만에 엄마를 찾았을 때 엄마는 할머니를 업고 계셨다. 한창 할머니를 환자용 침대에 앉히고 계신 모양이다. 올해 96세이신 외할머니는 또랑또랑한 총명기를 치매에 침식당하셨다. 설상가상으로 엉덩이뼈까지 아스라 지셨다. 그때부터였을까? 엄마의 시간은 오로지 할머니를 위해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 옛날, 아버지가 떠나고 남겨진 우리를 위해 흘러갔듯이.
엄마는 날 배웅하며 꽃기린 한 그루를 건네주신다. 일 년 내내 꽃을 피우는 꽃기린은 ‘고난의 깊이를 간직하다’라는 뜻으로 예수님의 가시면류관을 상징한다.
“강인해서 너희 집에서도 잘 살 수 있을 거다.”
내가 식물 돌보는데 서투른 것을 아시고 엄마는 이처럼 당신을 꼭 닮은 꽃을 나에게 선물해 주셨다.
엄마 생각을 하다 보니 벌써 저 멀리 피니시 라인이 바람에 펄럭인다. 다리 아프다고 투정하는 아이를 등에 업고, 다시 난 꽃기린의 생명력을 품은 명마가 되어 내 인생의 첫 마라톤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