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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유 Dec 19. 2023

할머니의 시계

“시계는, 거꾸로 가고 있었다.”


어느 기차역 준공식, 새 출발의 기대감과 환호 속에서 마침내 시계를 싸고 있던 두꺼운 막이 걷히자 역사 전체가 묘한 긴장감으로 낮게 술렁인다. 똑딱똑딱. 시계는 마치 자연의 섭리에 반항이라도 하듯 거꾸로 움직이고 있었다. 전쟁에서 전사한 아들이 시간의 강을 건너 다시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는 눈먼 시계공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그의 바람만이 아닌, 일순간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수많은 부모의 마음이었으리라. 그런 그들의 마음을 아는지 시곗바늘은 힘차게, 힘차게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할머니, 저 왔어요.”

“아, 예. 오셨어요?”

“손녀딸한테 웬 존댓말이래?”


기억 속 할머니의 방에도 특별한 시계가 있었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그것처럼 거대하고 세련되진 않았지만, 강렬함만큼은 절대로 뒤지지 않았을 할머니의 시계. 노인대학 시절, 세월의 흔적 가득한 뭉툭한 손으로 고운 한지 한 장 한 장 바지런히 오려 붙여 완성한 노란 해바라기 시계는 금세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몇 달 후, 어느 날인가 시곗바늘이 멈추어 있는가 싶더니, 결국에는 이놈이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제멋대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그 헤매는 모양새가 보는 이로 하여금 혀를 끌끌 차게 만들었다.  


그때부터였을까. 할머니의 인생에도 샛노란 불이 들어왔다. 시간이라 하면 응당 과거에서 현재를 지나 미래로 흘러가는 것이 당연지사, 할머니의 시간은 마치 고장 난 시계처럼 흩어진 시간의 퍼즐 조각들 사이에서 고무공처럼 이리 튀고 저리 튀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치매 환자가 그렇듯 일찍부터 역행의 기미가 보였던 것은 아니다. 우리 할머니로 말할 것 같으면 예순에 운전면허를 취득하고 여든이 넘어서도 동네 어르신들을 보살피며 읍사무소에 제출할 서류작업까지 하셨던, 가방끈은 길지 않아도 똑똑한 신여성이라 할 수 있겠다. 어려운 살림에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모은 거금 백만 원을 선생님 된 손녀딸 옷 사 입으라고 시원스레 내놓으신 대인군자요, 머리 꽤나 써야 하는 보드게임에서는 손자 손녀들을 모두 물리치시고 당당히 일등을 차지하셨으니! 그런데 이렇게 슈퍼우먼 같았던 할머니가 점점 기억도 깜빡깜빡 말도 더듬더듬, 무엇보다 자꾸 날 먼 손님 치르듯 하시니 손녀딸로서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엔 치매가 그 또랑또랑한 총명기까지 어찌하진 못 했던 것 같다. 대화 중 적당히 맞장구를 치신다든가, 임기응변의 재치를 발휘하여 질문에 두리뭉실 대답하시면서 상대방을 껌뻑 속여 넘기실 때도 있었으니 말이다. 대화가 길어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들통이 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삶의 지혜는 때론 머리가 아닌 몸이 더 잘 기억한다는 것을 할머니를 통해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치매는 머지않아 급속도로 나빠졌고 현실은 점점 웃픈 코미디가 되어 갔다. 증손자 증손녀를 볼 때마다 뉘 집 애들인지 궁금해하셨고, 손녀딸인 나는 건장한 이웃집 아주매 취급을 하셨다. 그러다 종내엔 엄마를 자신의 언니로 생각하시고는, 어쩜 주름이 그리 없냐고, 아흔 세월 당신 얼굴과 비교하며 부러워하셨으니 가족으로서 마냥 가볍게 웃어넘길 일만은 아니었다.


거꾸로 뒤집힌 시간축은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젊은 시절의 할머니까지 소환했는데,


“이것 좀 봐라. 할머니가 춤을 이렇게나 잘 추시네.”

어느 날 엄마가 보여주신 동영상에는 음악에 심취한 낯선 흥 부자 할머니가 있었다. 신체의 관절이며 마디며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은 죄다 리듬을 타고 까닥까닥. 다른 어르신들 다 나가떨어지고 마지막까지 무대에 남아 계셨으니 지구력과 폐활량 또한 일등인 셈이었다. 어느 날 할머니의 세계 속 펑, 하고 발산되어 흩어진 시간의 조각들. 할머니는 그중 하나를 집어 들고는, 옜다 이게 나다, 호기롭게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 같았다.


시간의 방향만 달라진 것이 아니라 속도에도 불이 붙었다. 할머니는 영화 속 주인공 벤자민처럼 금세 노인에서 호기심 가득한 아이가 되었고, 끝내는 먹여주고 입혀주고 도무지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갓난아기가 되어 버렸다. 거꾸로 쏘아진 화살은 과녁을 찾을 때까지 결코 멈추거나 뒤돌아서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엄마의 시계도 덩달아 멈추어 버렸다는 것이다. 할머니를 모시고 낮에는 노인센터에서 일하시고, 밤에는 선잠을 주무시며 엄마는 출구 없는 할머니의 세계에 갇혀버렸다. 여행은커녕 미용실 한 번 맘 편히 다녀오실 수 없었으니 그렇게나 모진 세월이 계속되었다. 녹록지 않은 현실과 할머니의 고무공 같은 시간 속에서 종횡무진 바삐 줄타기하셨던 엄마. 근래 부쩍이나 여윈 엄마를 보는 내 마음이 편치 않았으나, 또 그렇다고 나 또한 크게 효녀 노릇을 한 것도 아니었으니…. 그래서일까? 할머니의 고장 난 시계에 내가 더 그토록 뿔이 났던 것은…. 그렇게 우리는 다른 시간 속에서 각기 도생을 꾀하다 어쩌다 한 번 같은 공간에서 얼굴만 마주하는, 가족(假族)일 뿐이었다.


“엄마는 힘들지도 않아? 엄마 인생도 있는데 그만 양로원에 모시자.”

“힘들지. 그런데 엄마 어렸을 적에 할머니가 엄마를 정성껏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할머니를 보살피다 보면 나도 그 옛날 엄마의 손길이 생각이 나. 요즘엔 더 많이. 그래서인지 할머니가 너무 예뻐 보여.”


엄마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아니, 감히 나 따위가 그 고결한 순정을 꺾어서는 아니 되었다. 그 마음이 이해되면서도 한편으론 속상했고, 머지않아 맞닥뜨릴, 할머니의 부재로 엄마가 감당해야 할 외로움이 지레 걱정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할머니의 시계가 그 탄성마저 잃고 영원히 멈춰 서버린 것이다. 갑작스러운 사고였고 죽음이었다. 인생을 순리대로 살든 고장 난 시계를 지닌 채 방황을 하든, 시간의 스펙트럼 위에 둥지를 트는 생명이라면 누구라도 맞이하는 죽음인 것을. 나는 할머니의 시계가 영원히 어디론가 움직일 것처럼 그렇게 생각했나 보다.


“엄마, 내가 엄마를 위한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엄마가 나를 위해 존재했던 거야. 엄마가 곁에 없었다면 난 많이 외롭고 힘들었을 거야. 엄마, 미안하고 사랑해. 우리 천국에서 다시 만나.”


엄마의 마지막 인사말에 할머니의 눈에 눈물이 고여 흐른 걸 보면 마지막 가시는 길, 오랫동안 틀어졌던 시간의 축도 다시 제자리를 찾아 평안에 안착한 게 아닐까!


한동안 엄마의 인생이 밑 빠진 독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틀렸나 보다. 할머니는 엄마의 살아가는 이유이자 행복이었단다. 일찍이 혼자되신 엄마에게 할머니란 존재는 힘이 되는 남편이자 돌보아야 할 자식이었고, 무엇보다 비록 역순의 인생을 살지라도 세상에서 당신을 가장 사랑하는 엄마였던 것이다.



어떤 시간과 세월의 흐름에 몸을 맡기든 누구나 생의 경이로움과 죽음의 슬픔을 겪는다. 그러고 보면 어쩌면 인생이란 다양한 인간 군상 여러 삶이 조우하고 헤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아닐까. 어제까지 할머니가 누워계셨던 공간. 이제 그곳엔 무엇으로도 메꿀 수 없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다. 나와는 다른 공간 다른 시간을 사신다고 생각했는데 그 커다란 구멍이, 이 허전함이, 친절하고도 혹독하게 가르쳐 준다. 우리는 가족(家族)이란 울타리 아래 같은 시간 속에서 늘 함께 생동하며 부대끼고 있었음을!


할머니의 시곗바늘을 이리저리 움직여본다. 힘찬 발걸음을 따라 우리 함께했던 시간을 헤집고 들어가면 할머니의 환한 해바라기 미소가 언제나처럼 나를 맞이하고, 나는 그 꾸밈없는 여유와 당당함을 넉넉히 퍼 올려 내 해어진 마음을 한 장 한 장 이어 붙여 더 크고 노랗게 물들인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시간 여행자이자 누구보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내신 나의 할머니... 할머니의 마음은 오늘도 천진 난만한 고무공이 되어 내 마음 구석 구석을 여행중이다. [끝]


할머니의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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