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안도현 시인의 권고가 무색하게도 바싹 마른 연탄 위에 올라가 냉정한 무사처럼 마구 밟아댔다. 마침내 굴복한 연탄이 퍼석 무너져 내릴 때의 그 서걱거리는 소리와 연탄재의 냄새, 발에 닿는 우둘투둘한 감촉까지 오감을 자극하던 그것.
나에겐 소일거리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공병을 내다 파는 것. 내가 살았던 마을엔 구판장이 있었는데, 마을 골목을 들쑤셔 공병을 주워 내다 팔면 내 손엔 어느새 한 손 가득 사탕이 들려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동갑내기 친구들은 내 출생지에 갸우뚱거리기 일쑤다. 내가 살던 곳은 읍이었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논밭이 펼쳐진 산 중턱에 살았으니까. 국민학교 1학년. 엄마 손을 잡고 처음 학교에 간 이후 혼자 다시 학교에 가는 여정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버스를 타러 마을 어귀까지 내려가는 길, 가장 먼저 향기로운 아카시아 나무가 날 반겨준다. 달그닥 책가방 장단 맞춰 한참을 내달리다보면 구수한 소똥 냄새 진동하는 외양간이 나왔고, 한 가득 숨을 몰아 코를 막고 뛰어가다 보면 드넓은 논밭이 펼쳐졌다. 그러나 정류장에 무사히 도착한 건 단지 한 고개만 넘었을 뿐이다. 강경젓갈 냄새 배릿한 시내버스 안에서 교복 언니 오빠들과 뒤섞여 까치발까지 들고 서 있노라면 우린, 한 정거장 설 때마다 너 나 할 것 없이 안으로 차곡차곡 정리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떻게 그렇게 끝도 없이 들어갈 수 있었는지 지금도 참 알쏭달쏭하다. 마침내 읍내에 도착한 버스는 끝도 없이 학생들을 게워냈고, 이렇게 용케 살아남은 전우들 덕분에 학교 가는 길이 그리 심심하진 않았다.
“선생님, 애가 집에 올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안 와서요. 혹 청소를 하고 있나요?”
어느 날 걱정을 가득 품은 엄마가 학교에 오셨다.
“공병을 가져오라고 했는데 안 가져와서요.”
“네? 선생님... 아이가 어떻게 학교에 오는지는 아시나요?”
엄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선생님을 찔렀다. 만원 버스 타는 아이에게 무거운 공병까지 지고 가게 할 수는 없었다며 엄마는 끝내 눈물을 보이셨다. 그 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반짝이는 그것은 이후로도 가끔, 쉽게 웃고 울었던 부드러운 유년의 마음을 조금씩 적시곤 했다.
요즘 우리 동네 초등학교 앞 육교 공사가 한창이다. 큰 도로를 건너야 하는 아이들을 위한 배려이다. 등굣길 도로 하나만 건너도 부모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요즘 같은 세상에도 어딘가에는 어린 시절의 나처럼 한참을 걸어 버스를 타고, 비나 눈이 오면 동네는 괜찮은지, 지붕은 무사한지 걱정하는 아이들도 있다.
감사한 것은 당시 어쩌면 고되었을 학교 가는 길이 어린 내겐 마냥 즐거웠다는 점이다. 가끔 친구들의 집에 놀러 가도 신식 아파트에 사는 애들을 부러워해 본 기억이 없다. 그 시골 마을은 내 터전이었기에 먼 길을 다니는 수고를 무덤덤 받아들였던 건 아닐까? 남과 비교하기엔 너무나도 바쁜 어린 시절. 논밭에서 뒹굴고 올챙이를 잡고, 그물에 걸린 가여운 새를 풀어주느라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었다. 무엇보다도 우리 가족을 위해, 오가는 사람들을 위해 다 타버린 연탄들을 마구 밟아주는 일까지. 이 정도 되면 비록 연탄재는 함부로 찼지만 그 시절의 누군가에게 어쩌면 난 뜨거운 사람이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