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서랍을 열다
“여기야.”
드르륵 문을 열자 낡은 책걸상과 칸막이 틈으로 오래된 나무 향, 퀴퀴하지만 정감 있는 냄새가 코끝으로 스미어 왔다. 아빠의 책상이었다. 책상 한편에는 만화책이 아무렇게나 잔뜩 쌓여 있었는데 버스에서 본 교복 오빠들의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여섯 살 무렵 아빠 손을 잡고 본 교무실의 풍경이다.
몇 년 후, 엄마와 함께 다시 선 학교 운동장.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하늘나라에 가신 아버지를 배웅하는 자리였다. 가득했지만 동시에 텅 빈, 운동장엔 무거운 슬픔만이 감돌았고, 아홉 살 소녀는 그리움과 두려움 사이 어디쯤의, 표정을 들킬세라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애미야. 애비가 늦는구나."
팔순이 훌쩍 넘으신 할아버지는 그날도 다 큰 아들의 늦은 귀가를 걱정하셨다.
"구판장에 다녀올게요."
평소처럼 주거니 받거니 막걸리를 들이키고 계시려니 싶었지만, 제대로 허탕을 친 엄마는 어둑한 밤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오셨다. 전화벨이 울렸다. 멀리 사는 친척들이 오셨다. 아침에는 미처 몰랐었다. 자전거 뒷자리에서 아빠 허리를 꽉 동여 안았던 그 등굣길이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은.
“계세요? 선생님!”
일 년 후 검은 비닐봉지를 든 청년이 아빠를 찾았다.
“돌아갔어, 일 년 전에..”
할아버지의 예상치 못한 대답에 한참을 멍하니 서있다 돌아간 그의 눈가에서, 나는 빛나는 무엇인가를 본 듯하다. 그 와중에 나는 검은 비닐봉지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궁금했다.
“아빠 제자였던 두부집 아들이야.”
그때 그 두부집 아들의 방문으로 나와 슬픔을 나누는 누군가가 있음에 잠시나마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선생님이 되어 첫 발령받은 학교에 인사 가는 길. 덜컹거리는 고속버스 창문에 하얀 눈발들이 부딪쳐 흩어졌다. 유독 공부 못하는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다며 너털웃음을 짓던 아빠가 애지중지 하던 딸에게 축복의 눈꽃가루를 마구 던져주고 있었다. 눈가루에서 나무향이 났다.
나의 보금자리가 된 학생 기숙사에는 특이하게도 동네 목욕탕에서나 볼법한 네모난 이층 라커와 네모난 공동 샤워장이 있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아침잠 많던 내가 단 하루 만에 새벽 네 시에 눈을 떠 시원한 물줄기를 맞으며 하루를 시작하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절대로 학생들에게 알몸을 보일 순 없으니 새벽 형 인간으로 탈바꿈하는 수밖에! 이건 뭐 취업을 한 건지 입대를 한 건지.
면담 후 배정받은 책상. 시골 학교 치곤 꽤 현대적인 걸? 회색빛 반질한 새 책상 위에 유리가 덧대어져 있었다. 뭐, 가끔 인근 양계장에 걸쭉한 닭똥 냄새가 바람결에 몰려왔지만 말이다. 새 가구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책상을 어루만지며 아빠의 그 나무 향을 찾아보려고 애를 써봤다.
‘아빠, 나도 학교에 왔어요. 나, 잘 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겹겹이 쌓아두고 간, 그 시간의 발자취를 따라갔더니 내 길은 결국 다시 학교에 닿았다. 인사말이 깨알같이 적힌 수첩을 들고 처음 교단에 섰던 그날로부터 십여 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아빠가 아이들에게 쏟은 조건 없는 사랑의 마음도, 존경하는 선생님을 잃고 눈물을 비춘 두부집 아들이 느꼈을 상실감도. 무엇보다도 이 길을 먼저 걸어가신 아빠는 나에게도 진정 나무 향 묵직히 간직한 先生이셨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