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글자 에세이 - 음(音)
거리를 걸으면 유선 이어폰, 무선 이어폰, 아무것도 착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유선 이어폰과 비교했을 때 무선 이어폰은 타인이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착용 여부가 식별되기 더욱 어렵다.
길에서 중년 여성분이 길을 물어보려는 눈치였는데 지나가던 내게 무선 이어폰을 착용했는지 모르고 질문했다. 노이즈 캔슬링 상태라 착용한 채 기능을 종료했을 수도 있지만 그 상태로 있으면 대부분 목소리가 안 들릴까 봐 더욱 크게 말씀하시기에 에어팟을 뺐다. 그 행동에 갑자기 미안해하셨고 나 또한 그분의 첫 질문을 노이즈로 받아들인 상황이 미안해졌다.
한 번은 집에서 에어팟으로 라디오를 들으며 돌아다니다 어머니의 말을 놓친 적이 있다. 어머니 역시 내가 에어팟을 착용하고 있는지 몰랐고, 나의 모습을 보자 말을 아끼며 별거 아니라고 하셨다. 유선 이어폰은 기계와 기계의 결합이지만 무선 이어폰은 기계와 인간의 결합이며 이제 유동성을 가지고 어디든 인간의 청각에 관여한다. 인간은 라디오라는 매체를 통해서 처음으로 광활한 대중성을 가졌다.
가끔은 이미 청력을 통해 오프라인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온라인에 접속한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특히 노이즈 캔슬링 기술이 이러한 생각을 증폭시킨다. 얼마 전 발생한 사건으로 내가 재생한 주파수 이외에는 현실의 주파수를 그저 잡음으로 만드는 놀라운 기술에 머리가 서늘해졌다.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 빈 유모차를 끌고 가는 여성과 걸음이 가능한 아이가 있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버스를 가리키며 “저거 타야 되는데 가버렸네”라고 했고 돌연 아이가 출발하는 버스를 향해 달려갔다. 아마 떠나는 버스를 붙잡기 위해 달렸던 모양인데 그 광경에 아이의 엄마도 소리 지르고 서있던 사람들도 아연실색했다. 다행히 버스는 천천히 출발해서 금방 멈췄고 버스 바퀴보다 조금 큰 아이를 향해 엄마가 달려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주변 사람들도 몸이 굳은 채 상황을 지켜보다 각자의 세계로 돌아갔다. 나를 포함한 거의 모든 이가 ‘잘’ 듣지 못했다. 어쨌든 아이는 무사했고, 모두가 잘 들었다고 해도 그 찰나의 순간에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없었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현실의 주파수에서 살았더라면 아이를 막을 수 있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웠다.
이제 시력을 관여하는 세상이 되면 또 어떤 가능성이 선별될까. 멀지 않은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