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군 픽 올해의 책
2023년을 마무리하며, 올해 책을 많이 읽으려는 노력이 제법 성공해서 80권 정도를 완독했다. 그 중에서 널리 읽혔으면 하는 책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챕터 하나 하나 넘길 때마다 바깥 세상이 달리 보일 정도로 충격을 준 책이 많았고 그 중 특별한 열 권을 소개한다. 추천 역순으로 나열한다.
10. 휴먼카인드 - 뤼트허르 브레흐만
'겨울서점'의 김겨울 소개로 읽게 된 책이다. 카인드(kind)는 중의적 표현으로 인'류'라는 뜻과 인간은 '친절하다'로 해석된다.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은 간단 명료하다. 실제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것이다. 수 백 쪽의 지면에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연구로 이를 증명하는데, 대표적으로 스탠리 밀그램의 '전기충격실험', 필립 짐바르도의 '교도소 실험', '키니 제노비스 사건' 에 관한 연구를 든다. 이들이 얼마나 많이 조작되고 왜곡되어 있는지를 밝힌다. (내가 비공식적으로 쓴 '심리학으로의 초대'에 상황의 영향력을 강조하는 실험으로 이런 것들을 소개했었는데 진상을 알고 나니 많이 부끄러워졌다.) 뤼트허르 브레흐만에 따르면 단지 퀴즈를 틀렸다는 이유로 수백볼트의 전기충격을 주거나, 교도관 역할에 과몰입해 동료들을 고문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피험자들은 무기력하게 악한 명령에 복종하지도 않았고 실험 이후에 엄청난 심리적 외상에 시달려야 했다.
인간이나 세상을 어둡게 평가하는 명제는 그 자체로 냉철해 보인다. 그런 취향은 어쩌면 잠재적 위험요인을 피하는 것이 지상 과제였던 원시인의 유전자가 물려주는 인지 편향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보는 대신 그들이 하지도 않은 잘못을 뒤집어씌워 불신한다면, 우리는 이웃에게 불필요한 적의를 가지게 되고 이는 마치 노시보 효과처럼 서로가 서로를 더 많이 해치게 할 것이다. 냉소는 그 자체로 엄청난 비용을 가지고 온다는 저자의 주장에 나는 강력히 동의한다. 최소한 인간의 선한 면을 있는 그대로라도 보는 것이 더 세련되고 과학적인 태도라고.
9,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 백수린
우리 학교 올빼미 독서단 프로그램으로 밤을 샐 때 도서관 한 구석에서 별 기대 없이 집어들었던 책이다. 인간 개개인의 삶에 관심이 별로 없기 때문에 에세이를 잘 찾지 않는다. 뭐든 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전혀 모르는 작가의 책을 얇고 표지게 예쁘다는 이유로 꺼냈다. 저자의 언어가 눈에 닿는 순간 이에 매혹되어 눈을 떼지 못하고 계속 다음 문장을 찾아다니며 마지막 장까지 순식간에 달려갔던 기억이 난다. 맑은 단어와 간결한 문장. 백수린 작가의 안내에 따라 만나는 언덕 위의 동네는 마치 내가 살아본 곳 같아 전봇대와 골목과 석양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이 그림 안에는 집과 친구와 이웃과 생기는 둔탁한 맞물림이 있다. 공동주택 동네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아날로그적 불편의 기록들과 '일인 가구' 여성으로서의 삶까지. 그냥 있는 그대로 존재하며 생활하는 것만으로도 장애물이 많았다. 읽는 나도 짧은 시간동안 팔꿈치에 찔리는 것 같은 기분을 수시로 느껴야 했다. 신기하게도 마지막 장을 덮을때 이 좋기도 나쁘기도 한 모든 이야기가 행복하다는 느낌이 맞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그녀가 전달해준 이 감각을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백수린 작가의 문장을 반만 흉내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8. 감정이 서툰 어른들 때문에 아팠던 당신을 위한 책 - 린지 C 깁슨
Top 10 리스트의 유일한 심리학 책. 이제 우리는 유독한 부모에 관해서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어린 시절 상처 때문에'라는 전제는 질리도록 상투적이다. 그러나 이 담론은 '나쁜 부모가 괴롭혀서 아픈 어린 시절을 겪은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 심리적 문제를 일으킨다'라는 피상적인 수준 이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중요한건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지로 그 인과관계가 처음부터 끝까지 탄탄하게 설득력을 갖춘 책은 드물다. 그러나 저자는 이 어려운 일을 해낸다. 정서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부모, 그들이 자녀에게 하는 말도 안 되는 요구, 그걸 다 들어주면서 살아남는 아이, 통째로 역전되는 인간관계의 본질, 잘 지내기 위해서 엄청난 일들을 꾸역꾸역 해내며 모든 것들이 꼬여 버리는 인생을 모두 이 책은 체계적으로 서술한다. 인간 심리에 관해 잘 써진 학술서는 읽기에 따가울 수 밖에 없고 그 자체로 치유의 체험이 된다. 무엇보다 좋은 개념은 '내부 발산자'이다. 이들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인간관계 갈등의 책임을 다 떠안는 유형이다. 자신에게서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으려는 내부 발산자들은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괴로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므로 남탓하는 외부 발산자들에 비해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라는 주장은 너무 당연하지만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논리였다. 이렇게 나는 의도치 않은 위로를 받았다.
7. 종의 기원담 - 김보영
태초에 종의 기원이 있었다. 그 책은 모든 존재가 오랜 옛날 하나의 유기체에서 분기되어 나왔다고 주장한다. 우리 로봇들에게 과학과 종교는 잘 구분되지 않는 것이라서 과학책을 의심하는 것은 많이 이상하다. 인간만큼이나 로봇들도 자기 존재의 기원이 궁금하고 그래서 종종 '로봇이 어떤 의도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비과학적 의심'을 하는 이들이 있다. 도대체 저자 김보영은 이렇게 기가 막힌 소재를 어떻게 찾은 것일까. 그녀가 그려내는 세계 속의 과학은 마치 전공자가 쓰는 것처럼 매끄럽고 탄탄하다. 있지도 않은 일을 지어서 쓰는게 소설 맞지만 대체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의심을 할 수가 없다. 로봇들이 나누는 자기 존재에 관한 이야기는 내가 살면서 너무 듣고 싶은 주제였어서 그걸 알아채고 다루어준 저자에게 고마운 마음 뿐이다. 올해 SF 소설을 유난히 많이 읽었다. 김초엽, 천선란, 김보영, 배명훈... 나는 올해 읽은 SF 소설의 대표로 이 책을 선정한다.
6. 진화하는 언어 - 모텐 H 크리스티안센
내 지도교수님은 동물행동 연구의 대가로 매 수업 첫 시간에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뭐가 있는지 묻고 시작한다. 이 말도 안되게 만만한 질문에 학부생들은 공을 세우기 위해 앞다투어 도전한다. 그리고 순식간에 쥐도새도 모르게 깨져나간다. '생각을 한다', '도구를 쓴다', '협력을 한다', '집을 짓는다' 등등. 거의 모든 '인간만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동물도 그보다 더 조잡한 버전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일종의 허무주의적 쾌감을 느끼게 된다. '진화하는 언어'를 읽고 나는 이제 조심스럽게 '언어'의 존재 유무가 인간과 동물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고 반박당한다면 최소한 이 책의 저자들은 그렇게 주장한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단어와 문법, 구술과 문자, 문장과 서사는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라고.
언어는 인간이라는 일개 동물의 뇌가 소화하기에 너무나 거대하고 복잡한 기능이다. 어떻게 1초도 안되는 시간동안 인간은 자기 귀에 들리는 문장 내의 수 개 단어(의미 단위)를 해석하고 동시에 다시 이를 조립하여 자기 할 말을 만들어 낸단인가? 이런 불가능한 과업이 달성기능한 이유는 이미 우리는 맥락을 공유하여 상대가 어떤 말을 할지 예측하기 때문이다. '1만 시간의 법칙'이 맞다고 친다면 최소한 거의 모든 인간은 그 이상의 기간동안 공들여 연습하고 있는 기술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언어이다. 언어가 있는 문화권의 인류는 모두 종일 듣고 말하고 읽고 쓰니까.
인간이 아니라 언어가 진화한다. 가장 듣기 쉽고 말하기 쉬운 형태의 소리로 수만년동안 갈고 다듬어지며 지금의 어휘와 발음이 생긴 것이다. 언어 그 자체가 오랜기간동안 길들여진 결과물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언어를 이용한 의사소통'이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현상이 좀 말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5.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 - 마이클 슈머
'굿 플레이스(The Good Place)'라는 미드를 안다면 이 책의 저자가 저 넷플릭스 드라마를 기획했다는 사실에 너무나 반가울 것이다. 이 책의 장르는 윤리학이며, 내가 읽었던 가장 웃긴 책 중에 하나이다. '웃긴 윤리학 책' 이라는 단어, 그 자체로 부조리 아닌가?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벤담과 밀의 철학을 뼈대로 하여 이상한 딜레마를 만들어 자꾸 사고 실험을 시키는데 혼자 할일 없을 때 침대에 누워 했던 공상이랑 내용이 많이 비슷해서 마치 친구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이다. (예를 들어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위대한 록 작곡가가 있는데 이 사람이 자신의 창의력을 유지하려면 100명분의 음식이 필요하다고 하자. 그가 음악을 통해 선사하는 행복의 크기가 100명이 굶었을때 느끼는 불행의 크기보다 크다면 그 사람에게 음식을 몰아 주어야 하는가?) 물론 이런 난제들에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저자의 안내를 잘 따라가면 한번도 생각 안 해본 방향으로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읽기 쉬운', '실생활에 적용가능한', '초보자도 이해할 수 있는' 이라는 키워드는 이제 모든 학술서의 추구사항이라서 여기에 이 책이 위의 조건들을 다 충족했다는 식상한 소리는 쓰지 않겠다. 다만 누구나 윤리적 논제들을 가지고 혼자 씨름하며 고뇌해본 적이 있을 것이고 정확히 그 수준의 생각들을 보기 좋게 다루기 편하게 책으로 옮겨 준거 같아서 저자에게 참 고맙다. 결론적으로 착한 사람 되기는 참 힘들다.
4. 암컷들 - 루시 쿡
2023년에 읽은 과학 책은 많지 않지만 '암컷들'같은 책을 만나고 나면 다른 장르의 책과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비교하기가 미안해진다. 이 장르의 매력은 참고문헌이 1/4쯤 된다는 것과 아무리 사소한 사실이라고 허투로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귀한 정보가 숨막히는 밀도로 엮여 있는데 이렇게 싼 돈으로 접해도 되나 하는 미안함도 느낀다. 예를 들어 거북이 알이 처한 온도가 그 알에서 부화한 새끼 거북이의 성별을 결정한다는 사실 같은 것. 본체가 떼어내고 도망가도 암컷의 몸에서 제 기능을 하는 말라바거미 수컷의 생식기, 우두머리 암컷(alpha female)이 존재하는 미어캣이나 모두 양성애자인 보노보의 세계 말이다. (이제 이 글을 읽은 여러분도 정보 도둑질의 공범이다.) 동물의 세계에는 깔끔하게 구별되는 양성 따위는 없고 고정된 성역할도 없다는 너무나 뻔하지만 몰랐던 이야기를 500쪽에 걸쳐 서술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그러니까 남자는 어떻고 여자는 뭐고 누구는 씩씩해야 하고 또 다른 누구는 조신해야 한다는 등의 모든 주장들이 너무나 우스꽝스러워 더 이상 귀를 기울여줄 말로 들리지 않게 되었다. 동물 생태의 풍경이 전해준 교훈은 그 어떤 인문학 책이 준 것보다 강렬했고, 각 동물 암컷의 새로운 존재 양태를 알게 됐다는 사실에 자랑하고 싶어 입이 간질거렸다. 책을 한 권만 읽었을 뿐인데 마치 열 권 읽은 것만큼 똑똑해진 기분이라 나는 두 배로 기분이 좋았다.
3. 당신도 느리게 나이 들 수 있습니다 - 정희원
2023년 접했던 책 중에서 세 번째로 좋았던 책의 장르가 건강이라고? 이 책을 8월에 접하고 갑자기 그동안 없었던 이 분야에 관한 관심이 새로이 생겨났다. 올해는 유독 '잘 살고 싶다'라는 바램이 간절했다. 아프지 않고 좋은 컨디션으로 지내고 싶었던 것도 있지만 특히나 내게는 정신건강과 집중력이 더 중요한 이슈였다. 무엇을 하는지가 아니라 어떤 상태로 겪는지가 나의 행복을 결정했다. 평소에 관심없던 활동이라도 마음이 안정된 상태로 마주하면 그동안 몰랐던 즐거움을 찾을 수 있었고, 이전에 좋아하던 것도 불안과 우울에 잠식된 상태에서는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자꾸 쇼츠를 찾아다니며 정신없이 출렁거리는 마음의 불을 끄려는 시도는 도파민 중독이고, 단 것과 술은 잠시 쾌락을 주다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더 많은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하며, 머리가 흐리멍텅한 것은 수면과 운동과 식사 때문이라는 뻔하면서도 정확한 지적은 나에게 경고이자 구원이었다. 이 책은 여름부터 가을까지 다시 명상하고 독서하고 운동하는 생활의 의미를 찾게 해줬다. '짧고 굵게 살겠다'라는 태도는 실제 '길고 아프게 사는' 결과를 낳을 뿐이라는 점에서 어리석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치매에 걸리고 간병인을 쓰게 되며 주변인들의 돌봄을 요구하게 된다는 점에서 무책임한 테러행위라는 저자의 경고는 경각심을 주었다. 이 책 안에는 '잘 산다는 것'이라는 모호한 개념이 건강한 삶에 빗대어 잘 정리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저자가 안내한 대로 하기만 하면 '행복하고 주변 사람들과 잘 지내고 이루고자 하는 바를 성취하는' 마술같은 일을 이루리라고 생각한다. 정희원 교수는 정확하고 구체적인 근거로 얘기하는 사람이다. 그의 모범생스러운 언변이 재미있어서 연말에 이 분이 출연한 유튜브를 몰아 들으며 마치 복음처럼 삼고 있다. 올해는 다양한 분야에서 성취를 이루고자 했지만 신년계획은 건강한 생활 습관 유지하기 하나로 하기로 했다. 몸과 마음의 안정된 상태를 나에게 선물해 주기만 하면 목표를 정하고 노력하고 성취하는 작용들은 그냥 자동적으로 일어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2. 리틀 라이프 - 한나 야나기하라
임민경의 '당신은 자살을 모른다'라는 책에서 자해에 관한 내용을 담은 책으로 '리틀 라이프'를 소개했다. 그래서 언젠가는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동 학대와 자해가 아주 많이 다루어진다고 해서 책 내용에 휩쓸려 덩달아 괴로워질까 두려워 이 책을 장바구니에 넣어 두기만 하고 사지는 않다가 가을에 드디어 읽어볼 용기를 냈다.
책의 첫 인상은 전형적인 미국 대도시의 학벌 좋고 인정받는 성공한 청년의 삶을 수려한 문체로 묘사했다는 것이다. 시트콤 프렌즈의 분위기이다. 네 청년이 공부도 잘하고 능력도 있어 남들 보기에 부러운 삶을 살고 있지만 그 안에도 진로에 관한 고민과 서로에 대한 시기와 사랑 이야기가 있다. 자극적인 내용이 하나도 없지만 그저 작가의 연출과 묘사에 빠져들고 나면 갑자기 전개가 암전되며 자해와 아동학대와 심리적 외상의 세계로 들어간다. 등장인물이 겪었던 말도 안되는 고통이나 지금 하고 있는 자기파괴의 행동들을 눈뜨고 보기가 너무 힘들어서 도망가고 싶지만 이미 한나 야나기하라의 글맛에 빠져 버렸기 때문에 나갈 수 없고 마지막 장에 다다르기 위해 1,000쪽에 달하는 분량을 3일만에 주파하게 된다.
내 전공 특성상 트라우마와 자해에 관해 공부하게 된다. 하지만 자해행동의 거대한 모순, 그러니까 본질적으로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어째서 애써 자기를 찌르고 베고 뒤트는지에 관해서는 납득하기 어렵다. 어쩌면 그건 학문적 이해의 영역이 아니며 문학적 서술로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이 책은 그걸 완벽하게 해낸다. 어린 시절 주인공의 눈으로 들어가고 나면 그냥 그럴수밖에 없다는게 와닿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밖으로 나와 계속 죽지 않고 일상을 이어가는 생명의 경이에 감동하게 된다. 책의 제목 '리틀 라이프'를 통해 저자는 이런 삶이라도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자 한다.
문학의 위대성이 다른 이의 내면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하는 것이라면 '리틀 라이프'는 그 명제에 정확히 들어맞는 글이다. 책장을 덮으면 아직은 미지이지만 그래도 존재한다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또 하나의 심리적 현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궁금해진다. 저자 한나 야나기하라는 이 등장인물의 내면을 탐색하고 추측해 가며 글자 하나씩 지면에 옮길 때 무엇을 느꼈을지.
1. 이토록 굉장한 세계 - 에드 용
올해의 책을 정하면서 가장 좋았던 책으로 소설을 고를까 과학책을 고를까 고민을 많이 했다.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리틀 라이프'와 '이토록 굉장한 세계'가 나에게 준 선물 중 어느 것의 가치가 더 크다고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사실 둘 사이의 순위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이토록 굉장한 세계'는 동물의 지각을 다룬 책이다. 각 생명이 가지고 있는 감각기관은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다. 호모 사피엔스는 풍경을 구경할 때 시각은 가시광선의 범위 안에서 영사기처럼 세상의 모습을 뇌(후두엽)에 투영한다. 이 광경도 물론 굉장하다. 그렇다면 비슷한 기능을 하는 육각형 하나 하나가 기능 단위인 눈을 여러 개 엮어 만든 '겹눈'을 가진 꿀벌에게는 이 모습이 어떻게 다르게 보일까? 시각이 거의 없지만 초음파로 3차원 바깥세상을 내현적으로 구현하는 박쥐는 무엇을 볼까? 이렇게 보면 만물에게 각자의 우주가 존재하며 그걸 떠올리면 이 지구는 '이토록 굉장한 세계'이다. 이 책은 624쪽에 걸쳐 후각, 시각, 청각, 촉각, 열감, 통증, 전기감각, 자기장 탐지 등을 다루고 있다. 흘륭한 책은 좋은 지식을 많이 전달한다. 이 책은 어마어마한 동물학 지식을 담고 있으며 더불어 내 지각의 한계라는 명확한 선을 보여준다.
신기한 것은 마치 저자가 마치 그 동물로 살아본 것처럼 지각경험을 묘사한다는 것이다. 거미줄의 진동으로 주변을 인식하는 거미나 허리의 측선으로 물결을 감지하는 물고기, 그리고 물고기가 헤엄치며 남긴 수중 진동을 추적하는 바다표범, 자외선을 감지할 수 없는 인간은 볼 수 없는 색의 세계와 그런 빛깔로 자신을 치장하는 푸른 박새들의 느낌 말이다. 깊이 몰입하면 내가 읽는것이 과학책인지 풍경화인지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다. .
우리는 빛과 소리의 범벅으로 도시와 주거지의 낯과 밤을 채운다. 다른 눈과 귀를 가진 동물은 이 조명으로 인해 시야가 차단된다. 자동차 경적 소리와 공사장의 소음은 인간에게는 괜찮지만 박쥐에게는 그렇지 않다. 박쥐가 세상을 인지하기 위해 쓰는 소리인 '반향정위'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온실가스와 폐수만 지구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모르는 사이에 빛과 소리로도 세상을 오염시키고 있었다. 좋은 지식은 자기중심적 세계 안에서 사는 독자에게 자신의 죄를 알게 해준다.